신앙- 성경해석

고린도전서 2장 강해

白鏡 2006. 4. 21. 20:52
 

<고린도전서 2장 강해>


2: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갔을  때'(When I came, NIV)라는 의미로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당시 약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무르면서 전도하였을 때를 가리킨다(행 18:1-17).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 여기서 '하나님의 증거'란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나님을 내용으로 삼는 증거이니 '그리스도' 곧 '십자가의 도'(1:8 주석참조)를 말하고 그 증거를 전한다는 말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다.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For I resolved to know nothing while I was with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헬라어 본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가르'()가 있어서 본절이 앞절의 이유가 됨을 보여준다.

* 바울은 모든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으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은 깊은 지식을 가졌고 또 가지기를 원했다. 바울이 이렇게 다짐한 것은 바울이 회심 때에 겪은 체험과 철학적인 지혜를 동원하여 전도하려다가 실패한 아덴에서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행 17:22-34).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만이 참이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가장 합당(合當)한  것임을 깨달았다.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약함'은 육체적인 허약이 아니다. 그가 비록 이따금 자신의 육체적인 허약을 언급하지만(고후 10:10) 본절에서는 전체 문맥상 육체가 아닌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Hodge). 

 

바울의 마음이 약하고 두려웠던 것은 그가 고린도에 이르기 직전 아덴에서의 전도에 실패한 것이 그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지방에서 성행하던  이교도들의  강한 세력들, 철학자들의 사변과 교만한 태도, 그리고 음탕한 도덕적인 타락상 등이 난무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때 느꼈던 인간적인 중압감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비록 강하고 담대한 대사도(고후 4:7-11;엡 6:19,20)이기도 했지만 자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겸비한 인격자였음을 보여준다.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My message and my preaching were not with wise and persuasive words, but with a demonstration of the Spirit's power,


*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 여기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의  헬라어 '아포데익세이 프뉴마토스 카이 뒤나메오스'(*)는 

1)'능력있는 성령의 나타남' 또는 (2)'성령과 능력의 나타남'이라는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하나 이 구절에서는 전체적인 문맥에 비추어 (1)의 번역이 더욱 타당하다. 즉 성령께서 능력 있게 나타나심에 근거하여 바울이 복음을 전했음을 보여준다. 바울이 성령의 나타나심에 의존하여 설교했으므로복음을 듣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이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믿음'의 헬라어 '피스티스'(*)는 정관사 '헤'(*  )와 함께 사용 되어 믿는 행위 그 자체보다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기초한 믿음의 본질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너희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Mare).

*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바울은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의 근거가 이성에 호소하는 논증(論證)이 아니라 진리와 함께 그리고 진리로 말미암아 심령에 역사(役事)하는 하나님의 권능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는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그 믿음의 근거가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명확하게 인식시켜서 그들이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도록 가르친다.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 바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혜'는 '온전한 자'들이 깨닫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온전한 자'(*텔레이오이스)에 대해 혹자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어린아이(3:1)와 비교되어 영적인 이해에 있어서 성숙한 자를 가리킨다고 한다(Morris).그러나 본문의 문맥상, 구원받지 못한자와 대조되는 구원받은 자들 즉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는 자들을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 바울은 본문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옴을 시사해준다.


2: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No, we speak of God's secret wisdom, a wisdom that has been hidden and that God destined for our glory before time began.


*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 바울에게 있어서 '비밀'(*   뮈스테리오)이란 오랫동안 감취어져 있다가 드러난 것으로(엠 3:3;골 1:26),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엡 5:32).

이 '비밀'은  인간이 전혀 포착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로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연구해도 그 비밀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도 깨달을 수 없다(Morris).

*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  '영광'(*독사)은 백성들과 함께하신 구약의 영광스런 하나님을 회상해 보는 것(출 24:17;40:34;민 14:10)과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나눌 미래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것(계 21:10, 11, 22,23)을 의미한다

* 만세전에 - (프로  톤  아이오논) - 이 말은  문자적으로 '영원 전에'라는 의미로 시간이 발생되기도 전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복음이 후대의 고안물(考案物)이 아니었음을 명백히 한다


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영광의'(*독세스)라는 형용사는 대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용되었고(행7:2;엡 1:6)외경 에녹서에서도 '영광의 주'가 하나님을 지시하였다(Morris)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호칭인 '영광의 주'(*퀴리온  테스 독세스)는 바울 서신에서는 본절에만 나타난다.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할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을 사용하여 십자가의 수치와 극명(克明)하게 대조를  보이고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강조하는 이유는 7절에서 언급한대로 그분의 영광이 '우리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이루실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Grosheide).


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본 구절의 인용 출처를  알아내기가  어렵다.  오리겐(Origen)과 그후 몇몇 주석가들은 지금은 분실된 '엘리야의 외경'이나 또는 '이사야의 승천'이라는 외경에서 인용했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이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만 '기록된 바'라고 함으로 이견해는 타당하지 않다(Lightfoot,  Hodge). 혹자는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주님의 말씀을 인용했다고 하며 사 52:15;65:17등에서 인용했다고 하기도 한다(Chrysostom, Hodge).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사(이사야) 64:4을 대략적으로 언급한듯 하고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는 말은 구약의 전체적인 사상을  일반적인 의미로 함축시킨 것같다. 한편 '예비하신'이라는 동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7절의 사상을 강조해 주고 있다.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오직'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어떤 사본에는 '데'(*'그러나')로 되어있고, 어떤 사본에는(P ,B) '가르'('왜냐하면')로 되어있다(Aland). 개역성경은 '데'를 취하여  본절 을 앞 구절과 역접관계로 보았다.

그리고 헬라어 본문에는 '우리에게'(* 헤민)가 문장의 초두에 나와 특히 강조되고 있다. 이 세상의 관원들이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깊은 지혜가 선지자와 사도들(엡3:5)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계시되었다.

바울이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 줄곧 '우리'라는 대명사를 주로 사용한 것은 계시가 바울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임을 시사해준다.


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본절은 인간의 지혜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영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적인 지혜와 진리를 이해하려면 성령 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본절에서 언급된 '영'(*프뉴마)은 하나님과 사람의영을 모두 지칭하므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실재적인 인격'을 가리킨다(Mare).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본절에서의 '우리'는 바울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은 자들까지도 포함한다.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  안드로포스'(*)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과 진리를 받지 못하여 구원얻지 못한 자연인의 상태'를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저급한 수준에 있어서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정신을 가지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 용어가 신약성경과 교부 문헌에서는 성령과 초자연적인 세계와는 대조적인 자연 세계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었다.  흠정역(KJV) 에서는 이를 '자연인'(the natural man,KJV)으로 번역했는데, 자연인은 거듭나지 않은 생태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1:23). 그들은 아무리 지혜롭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지혜가 걸림돌이 된다.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 헬라어 본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가 있어서 본구절에 앞 구절의 이유가 됨을 나타낸다. '미련하게'의 헬라어 '모리아'(*)는 고대 헬라에서 신체적으로 둔하거나 장애가  있는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우둔함을 의미한다. 거듭나지 않는 자연인은 모든 가치를 육체적 물질적 기준에서 평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은 무익하고 무가치하다고 인식된다.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영적으로라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영'(*프뉴마)의 부사형으로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분변함이니라'의 헬라어 '아나크리네타이'(*)는 13절의 '분별하느니라'의 헬라어 '슁크리논테스'(* )와는 달리 법정 용어로서 진술을 듣기 전에 심문받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원래 '검사한다', '시험한다'는 의미를 가졌으며 나중에는  '판단하다', '평가하다'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육체에 속한 사람은 영적이 아님을 전제하고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를 분별할 가치 기준도 가지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육에 속한 사람'과  대조적으로 '신령한 자'는 분명한 가치 기준이 있어서 판단의 주체자가 될수 있다.

 

'신령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코스'(*)는 '육에 속한 사람'의 헬라어 '프쉬키코스'(*)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영에 속한 사람', '영적인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다. '프뉴마티코스'는 성령께서  내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Hodge).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모든 가치 기준이 영적이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啓示)에 의존하여  판단한다. 그러므로 그의 판단은 정확하며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헬라어 본문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가 있어서 본절이 앞절의 내용을  확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70인역(LXX)의 사 40:13을 인용한 것으로서 긍정적인 질문 형식을 취하여 부정적인 답을 유도하는 수사법을 사용하였다. 즉, 주의 마음을 전혀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의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눈 퀴리우'(*)는 70인역을 따른 것으로 히브리어 본문에서 '여호와의  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 야웨'(*)의 번역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롬 11:34  주석을 보라.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 바울은 앞 부분에서 인용한 구약의 표현 가운데 '주의마음'과 관련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용어를  도입한다.

본절은 주께서 우리를 아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영적인 진리와 영적인 지혜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Mare).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모든 생각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깨닫게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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