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4장 강해>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비밀을 맡은 자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천국의 '비밀'(*,뮈스테리온)을 나타내시고 다른 자들에게는 숨기셨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마 3: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비밀'이라는 말은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계된 은밀한 지식이나 숨겨진 하나님의 경륜을 뜻하는 의미로 쓰여졌다(골 1:26,27;2:2).
특별히 임무를 받은 자들 외에는 숨겨진 것이기에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비밀을 맡은 자들에게는 '계시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Lightfoot). 이런 의미에서 바울과 같은 당시의 지도자들은 '계시된 진리의 교사들'이라고 칭할수도있다.
한편 '맡은 자'를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무스'(*)는 '오이코스'(* ,'집')와 '네모'(*'관리하다')의 합성어로서 한 집안의 행정 관리 및 재정을 맡아 관장하는 지배인 또는 관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꾼'이라는 단어는 가장 낮은 노예적 신분을 나타내는 반면 '맡은자'라는 단어는 중간 관리인, 또는 위엄과 권위를 가진 직분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주관적인 소욕(所慾)을 따라함부로 판단했다.
그들의 판단은 마지막 날에 공력을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과(고후 5:10)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판단이다.
바울은 '아나크리노'(*)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판단이 심판이라는 의미보다는 편견에 의한 분별 또는 식별(discern)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당시 교회의 비난과 배척은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는 심판대의 공정성과 위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야말로 매우작은 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설령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칭찬하며 천사와 같이 높였다고 할지라도 바울은 아무런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주인에게 충성할 자세를 가졌으며 '인간의 판단', '하나님의 판단'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고 자신의 선한 양심조차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판단의 기준이 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판단은 사도 바울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선포한 것이다.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에 기록된 바와 같은 죄인의 고백을 염두에 두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원치않는 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책망할수 없다고 말한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칼빈(Calvin)은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전 생애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이를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노라 - 바울에게 있어서 의롭다함을 받은 '칭의'의 개념은 언제나 수동태로 나타난다. 인간은 자신이 이행한 일을 정직한 것으로 판단하지만 심판자는 그 심령을 감찰하시고(잠 21:2) 판단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의'를 인정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본절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과 모든 판단의 근거를 그리스도께 두는 바울의 겸손한 신앙 인격을 엿볼 수 있다.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will expose the motives of men's hearts)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
'때'를 가리키는 헬라어 '카이로스'(*)는 일정한 기간(롬 3:26)뿐만 아니라 한 순간의 시각(마 24:45)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약속된 시간'(an appointed time)으로서의 '최후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위가 위임된 것로써 혐의에 대한 조사도 그리스도께서 하시며 판결도 그분께서 행하신다. 인간 행위에 대한 고발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죄인을 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의 '판단'은 합당한 이해와 관찰 없이 조급하고 경솔하게 남을 평가하는 죄인의 판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Calvin).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 본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내용이다. 어두움 속에 숨겨진 악한 세력의 일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모두 드러날 것이다
(고후 5:10).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진 모든 비밀조차도 밝히 드러날 것이다(마 10:26). 어두움 속에 숨겨진 인간 행위의 무질서는 그리스도의 밝은 빛에 의하여 모두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설픈 판단은 그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다(요 12:48).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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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위하여...본을 보였으니 - 바울과 아볼로의 모범은 단순히 개인의 영광과 칭찬만을 기대하는 행위가 아니다. 여기서 '본을 보였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메테스 케마티사'(*)는 '적용하다', '변형시키다'(빌 3:21) 또는 '변장하다'(고후 11:13, 14)의 뜻으로 사용된 '메타스케마티조'(*)의 능동태로서 '의지를 가지고 자신에게 적용시켰다'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규범을 자신과 아볼로의 관계에 적용(適用)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규범을 자신들에게 적용시켰다는 바울의 변호는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분쟁이 선한사도들(예를 들면 구체적인 언급이 생략됨 베드로와 같은 자)에 의한 것이 아님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들의 당파 싸움을 부추기는 거짓 교사들이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J. Calvin)
그런데 위에서 '기록한 말씀'(*게그랖타이)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1)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에 관하여 바울 자신이 본 서신 1장에서 부터 지금까지 기록해 모든 교훈(1:10,30,31; 3:16-21)들을 의미하는가?
2) 아니면 교만하지 말며 겸손할 것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는 구약성경 말씀(잠 16:18; 22:4; 사 57:15)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전자의 견해를 취함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교훈한 것중에 인용한 말씀이 많고(1:19,31;2:9;3:19,20) 뿐만 아니라 본절에서는 '우리에게 배워'라는 말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록한 말씀'이란 바울이 본서신 1장에서부터 지금까지 기록해 온 모든 교훈을 의미한다(Harris).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배워...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쟁이 그들의 자화 자찬(自畵自讚)과 교만에 기인한 것이라고 파악한다. 특히 '교만해지다'를 뜻하는 헬라어 '프쉬시오오'(*)는 다른 곳에서 오직 한 번만 사용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골 2:18) 본 서신에서는 여러번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18,19절;5:2;8:1;13:4등).
여기서 교만은 스스로 '자랑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바울이나 아볼로)를 자랑함으로써 서로 속에서 도무지 발견할 수 없는 분쟁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하나를 자랑함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또 하나에 대한 시기와 멸시는 스스로도 해결할 수 없는 파벌 싸움에 휘말리게 하였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쟁과 파벌을 초래한 교만을 말씀 안에서 잘라내는 일뿐이다.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바울은 세 가지의 질문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교만을 지적하며 왜 교만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1)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 본절에서 '구별하다'(*디아크리노)는 말은 '추려내다' 또는 '다르게 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Lenski, Barrett).
따라서 사도는 첫번째 질문을 통해서 '누가 너희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구분지었느냐'는 반문을 한 것이다(1:12). 사도의 이 같은 질문에는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1:13)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동일한 자들이 아니냐'(1:2)라는 책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첫번째 질문은 그들 가운데서 다르게 나타나려 하는 자들이 있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이질문 가운데서 두 가지의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모두 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교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근신할 것을 요구한다.
(2)또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를 동일하게 입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특혜(特惠)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들은 하나님 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우월감의 근거로 삼음으로 인하여 마치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사들 조차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들의 욕심을 자랑하는 거짓 은사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것이다. 설령 구별된다 할지라도 그 판단의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자랑할 만한 아무런 정당성도 가질 수가 없다.
그들이 가진 지식, 혈통, 재산, 생명, 심지어 신앙까지라도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자랑은 무익한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 세번째 질문은 두 번째 질문과 유사한 것으로서 '모든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것인데 어찌하여 스스로가 잘나서 그와 같은 것을 누리고 있는 양 자랑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바울은 점진적인 질문의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교만이 남들과 비교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奪取)하는 오만한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은사를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와 공로를 자랑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 조차 함께 판단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겸손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칼빈(Calvin)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서 겸손할 수 있는 선한 의지를 발견한다면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덕분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4: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Already you have all you want! Already you have become rich! You have become kings--and that without us! How I wish that you really had become kings so that we might be kings with you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하였도다 -
1) 본절은 고린도 교인들의 오만 불손한 행동들에 대한 야유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2) 실제적인 그들의 삶을 묘사한 내용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들 삶은 모든 면에 있어서 풍요로움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풍요는 감사와 찬양으로 돌려지지 아니하고 교만의 근거로 사용되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특별히 주목해야 될 것은 '배부르며'(*케코레스메노이)의 완료분사와 '부요하며'(*, 에플루테사테)와 '왕 노릇 하였다'(*에바실류사테) 등의 부정 과거 동사가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Barrett).
이러한 특징은 '이미' 성취되었음을 시사하는 헬라어 본문의 부사 '에데'(*)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Lightfoot). 그들은 완성될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면서 긴장을 가지고 죄악의 요소들과 싸워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풍요(豊饒)와 배부름 속에서 즉 영적 교만 속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에 빠졌고 현재도 계속 빠져 있음을 보여 준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벌써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함께 우리도 한번 왕 노릇을 해 볼 것이 아닙니까?',공동번역).
그리고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다'는 구절은 무슨뜻인가?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지니게 된 영적 지식이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인한 것인데 이제는 그러한 사도들이 없이도 그들이 모든 영적인 일을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지적이다(Harris).
우리가 너희와 함께...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을 제외하고 허황된 종말론적 사고 속에서 왕노릇하려 할 것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는 미래 지향적인 시각 속에서 함께 왕 노릇하기를 간구한다. 혹자는 하반절에 쓰인 '왕 노릇하기를'을 전반절의 부정 과거 동사 '에바실류사테'와 서로 구분하여 전반절의 왕노릇은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하반절은 장차 올 세상에서 왕 노릇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려 하지만 구태여 구별지을 필요는 없는 것같다(Lenski).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그릇된 종말론적 시각을 수정하고 장차 올 세상에서
왕 노릇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교만 속에서 만들어 놓은 스스로의 왕 노릇을 포기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종말은 아직 완성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유보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부요와 배부름은 자신의 곤고와 가련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교만 속에서 만들어진 거짓 왕 노릇이 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계 3:17).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과(고후 5:7) 어떤 불의한 환경 속에서도 자만하지 않는 겸손을 찾는 일뿐이다.
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For it seems to me that God has put us apostles on display at the end of the procession, like men condemned to die in the arena. We have been made a spectacle to the whole universe, to angels as well as to men.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미말(微末)에 두셨으매 우리는...구경거리가 되었노라 -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방종과 안일을 일깨우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이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회상한다.
'끄트머리(미말)'(*에스카투스)에 두었다는 말은 다스리는 자와 거리가 먼,인생에 있어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해 있는 비천한 자들의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그리고 '구경거리'를 뜻하는 '데아트'(*)은 '극장'과 같이 구경거리가 있는 장소를 뜻하는 말로서(행19:29,31) 당시 원형 경기장(Colosseum)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죽어간 고난의 삶을 암시한다(행 8:1). 그들은 죽기로 작정되어 십자가 위에서 구속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시대의 고난앞에서 주의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순교의 삶을 살았다. 바울은 자신을 그 순교 대열에 내어 놓음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에게 항상 사랑과 열심을 나타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허세를 경고하고 있다.
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 이런 식의 반어적인 대구는 본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바울은 자신의 '미련함', '약함', '비천함'을 나열함으로써 앞절에서 말한 구경거리가 구체적으로 자신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설명하려 한다. 그들도 '그리스도의 연고로' 바보가 되었으나 고린도 교인
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세상 지혜와 경험을 소유함으로 마치 자기들만 지혜로운 자들인 것처럼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라는 뜻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세상 지혜에 대하여 무지(無知)한 자들이 되었으며(1:17,21;3:18) 이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비천한 자같이 매맞으며 핍박을 당하는 자(11,12절)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에 지혜롭고 강하며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굉장한 역설paradox)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지 못하였으면서도(3:1,2) 서로를 판단하며 사도들 없이 왕 노릇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을 신랄하게 책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해지고, 약하고, 비천해진 것은 인간의 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며(고후 12:9) 또한 영광의 기준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불의한 영광과 세속적 지혜를 비교함에 있어서 자신을 과감하게 낮출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멸시하는 인간의 지혜를 고발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4:11-13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한쪽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배부름과 부요속에서 왕 노릇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한쪽은 복음을 인하여 고난과 굶주림에서 허덕이고 있다면 참으로 모순된 현상(결과)이 아닐 수 없다. 특별히 고린도 교인들을 복음으로 가르친 사도들의 형편이 이러하다면 그들의 부요와 배부름이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의 현상에서 실제적으로 겪은 고난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서술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 강조하려 한다.
그들은 신체적 학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난도 동시에 받았다. 유대인의 신분을 포기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다가 동족인 유대인으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때 그가 가졌던 정신적 외로움은 컸을 것이며 특별히 '바로 이시간까지'라는 표현 속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사도들의 고난은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인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까지 외면을 당하므로 그의 고통이 더욱 심했음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들의 자기 도취와 어리석은 영적 교만을 책망하고 있다(고후11:26).
본절에서는 교회를 돌보는 일과 육체적 노동을 각기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교회를 돌보는 일에도 열심을 다했으며 자신의 생계를 위한 육체적 노동에도 열심을 다했다는 뜻이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 본문은 앞에서 지금까지 서술해온 고난의 역사를 결론적으로 정리한다. 그들은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사람이 됨으로써 십자가의 충실한 종이 될수 있었다.
혹자들은 '페리카다르마타'(*'더러운 것')라는 단어 속에서 희생의 개념을 찾으려 한다(L. Morris,C.K.Barrett).
다시 말해서 '페리카다르마타'는 청소를 깨끗이 한 후에 버리게 되는 오물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자신이 바로 이 오물이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을 깨끗게 하는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 단어는 종교적 정화를 나타내는 속죄 양의 개념을 선명하게 나타내지는 않지만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 했다는 의미는 충분히 전달한다.
그리고 '만물의 찌끼'에서 '찌끼'(*페리프세마)란 말은 물로 닦아내고 문지르면 없어지는 옷이나, 물건, 사람몸의 때(dirt)를 가리킨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한 사도들의 고난을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얼마나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모욕하며 배척했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나타내 준다. 그들은 이 지상의 모든 것들로 부터 소외된 찌꺼기와 폐물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소명을 더욱 선명하게 나타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골 1:24).
4: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I am not writing this to shame you, but to warn you, as my dear children.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 상반부에 나타난 반어적인 풍자와 비유는 사라지고 부드럽고 친근감(親近感) 있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바울의 엄격하고 딱딱한 어조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극한 분노와 책망 속에서도 사랑으로 권면하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 '사랑하는'이라는 말과 '권하려 하는'이라는 말이 결코 그들의 죄악마저도 덮어두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것은 아니다. '권한다'는 것은 '권면한다'는 것과 같은 보다 부드러운 해석으로 번역될 수도 있으나 아버지의 훈계와 같은(엡 6:4) 보다 준엄하고 권위적인 훈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듯 '사랑'과 '훈계'를 동시에 나타내고자 하여 사용한 부자(父子) 개념은 다음 절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 '스승'으로 번역된 '파이다고구스'(*)는
1) 엄격하게 말해서 스승이라고 할 수는 없는 지위이다. 이들은 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아들을 가르치며 아들이 아들로서의 예의 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돌보는 노예들이다(slave-guide).
2)갈라디아서에서는 몽학 선생으로 번역되었는데(갈 3:24) 이들은 아들을 학교에 데리고 가는 수행원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다.
바울의 의도는 단지 '일만'(*뮈리우스)이라는 풍자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스스로 스승이라고 자처하는 거짓교사들의 신분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J. Calvin).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여 개종하게 된 많은 이방인들에게 영적 아버지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바울은 모든 복음의 지도자들에게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만 이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지도자들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 설립자인 자신의 위치와 권리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1) 본능적인 사랑을 발휘하는 아버지의 속성을 나타내려 하였다. 즉 그들에 대한 자신의 책망및 권면이 진실된 것이며 책망의 동기 또한 부성애적(父性愛的)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2)다른 복음 지도자들보다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보다 친숙한 관계로 묘사한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낳았음에고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안에서','복음을 통하여'라는 강조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아비'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으로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계속해서 그들을 젖과 밥으로(3:2) 양육하는 영적 아버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고린도 교회에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교인들을 권면하며 훈계하고 의로 양육하려 한 자들보다는 지도자라는 직책(職責)만을 얻기에 급급한 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직접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행 18:1-11), 그 교인들을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참된 영적 아비였다(1:3;3:2).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1:11, 12) 심한 책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4:16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 바울은 자주 이와 갈은 성격의 말들을 반복하고 있다(갈 4:12;빌 3:17;살전 1:6;2:14;살후 3:7,9).
바울이 본받으라고 주장한 본받음의 내용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위와같은 표현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C.K. Barrett).
그러나 설령 바울이 자신의 삶을 본받으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않는 것은 복음을 드러내고자 일평생 고난속에서 살았던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을 대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통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11:1).
바울의 이 선언은 단순한 자신의 추종자나 바울당파의 일원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1)바울이 본을 보인 사랑의 실천과 (2)그의 겸손과 고난에의 동참, (3)지적 교만과 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신앙 안에서 화합(和合)하는 것, (4)결론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4: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바울이 디모데를 처음 만난 것은 실라와 함께 제2차전도 여행을 하던 중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파할때이다.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서 그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은 충실한 일꾼이었으며 바울의 사역 후반기에는 마가 이상으로 바울의 사역에 참여하였던 동역자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분쟁 소식을 듣고 디모데를 파송한다. 바울이 지금 디모데와 동행하고 있지 않음에도(디모데는 실라와 함께 마게도냐에서 하역 중)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속에서 디모데를 파송하는 것은 그만큼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신임이 큰 것을 나타내 준다.
그러나 본절의 파송은 16:10, 11의 기록(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과 비교해 볼때 약간의 난점이 제기된다. 본절의 '보내었노니'(*에펨프사)는 부정 과거 시제로서 과거의 행동을 가리키고 있으나 16:10,11은 미래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1) 바레트(Barrett)는 서신상에 쓰여진 부정 과거는 때로 현재 시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는 현재 파송되지만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 보다는 늦게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디모데가 다른 목적지를 경유하여 고린도에 도착하도록 명령된 것으로 이해한다.
(2) 한편 렌스키(Lenski)는 편지는 배편으로 보내지고 디모데는 육로를 따라 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편지보다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파송하는것은 그 만큼 (1)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을 반영하며 (2)그의 표현대로 '신실한 아들' 디모데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확신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디모데는 이 편지를 고린도에 보낼 즈음에 마게도냐 지방을 통해 고린도로 향하고 있는 도중이었음을 알 수있다(행 19:21-22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각 교회에서 기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문맥에서 볼 때 각처에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지역적인 모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를 특수한 임무로 파송(派送)함에도 불구하고 새롭고 특수한 처방법을 명령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했던 지난 날의 가르침의 내용을 상기시키는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잊어버린 기억들이 다시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누렸던 복음의 능력들을 상기시키려고 한다(1:18). 왜냐하면 사람을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르게 하는 것 중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딤후 3:16, 17).
4:18-20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특징이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시기인 A.D. 51년 경까지 고린도에 머물렀다고 추정해 볼 때 제 3차 여행 중에 서신을 쓰고 있는 이 시점은(A.D. 53-58) 결코 오랜 시간이 지난 때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불과 몇년 사이에 이토록 교만한 자들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들 중에 일부는 교인들의 방종을 부추기며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면서도 바울이 차지했던 영적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바울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기대하며 바울이 이뤄놓은 귀한 설교 활동의 열매를 훔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 하며(9:17) '그의 몸은 약하고 그의 말은 시원치 않다'(고후10:10)고 조소(嘲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고린도 교회 내의 거짓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6:8에서 바울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러 있겠다고 말하나 본절에서는 '속히 가기를 원한다'고 하여 약간의 모순이 발생하는 듯 보인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16:8과 본절을 모순된 것으로 생각하여 이들이 서로 다른 서신서 들에 의하여 재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J. Weiss, J. Hering).
그러나 우리는 바울 당시의 여행 문화가 오늘날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역이나 터미날에 나가면 당장 운송 수단을 만날 수 있는 오늘날과는 달리 여행을 위하여 오랜 기간 준비해야 하며 때로는 항로를 이용하기 위하여 몇달 몇일씩 항구에 대기해야 하는 환경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필기 도구나 타자지가 없는 환경 속에서 이 많은 분량의 편지를 기록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4장과 16장을 집필하는 사이에 대두될 수 있는 시간의 경과와 환경의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C.K.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될 수 있는대로 빨리 가기를 소원하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그들이 더이상 실수하지 않기를 경고하고 있으며 16장에서는 구체적인 시간, 곧 오순절 이후라는 계획(計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타났 듯이 바울의 여행 계획에 모순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16:8에서 바울이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직도 에베소에서 전도 활동을 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행 14:27;고후 2:12;골 4:3). 그러므로 바울의 이 같은 표현은 자신의 에베소에서의 복음 전파 사역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특별히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기회가 자기에게 많이 주어졌기 때문에 에베소를 쉽게 떠날 수 없었다
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너희에게 가겠다는 간절한 심정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교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서 공관복음서에서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 바울서신 가운데서는 본서에서 제일 많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1)이 세상 끝날에 도래하게될(마19:28;25:31) 하나님의 신천 신지(계 21장)이다.
(2)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해 이미 성도들간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눅 17:21),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현재 영적으로 지배하시며 그들의 삶 속에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신다는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두번째 의미로 사용한 말이다.본절에서 바울이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도입하여 저들을 책망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1:5,6과 본장8절이 시사한 대로 모든 구변과 지식에 풍족한 수준에 있었으나 생활의 실제적인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거리가 먼 시기(猜忌)와 심한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도들의 새로운삶(고후 5:17)과 그 능력(요 3:3-8)을 암시한 것이다. 즉 고린도 교인들의 삶의 공동체 곧 교회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복음의 능력과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말'(*고스)에 있지 아니하고 에서 '말'은 '능력'과 대조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말에 상응한 내용이 따르지 않는 단순히 '헛된말'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한편 '능력'은 가시적인 것으로서 예수께서 그의 왕국을 선포할 때에 나타났던 기적들(눅 11:20)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본절에서는 인간의 공허한 웅변과 대조를 이루는 능력,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변화된 품성, 새 사람으로서의 옛 사람을 벗어 버린 의와 거룩함과 화평을 이루는 실제적인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보다 타당할 것 같다(L. Morris, J. Calvin). 따라서 바울은 인격과 삶의 변화, 즉 행동으로 나타나는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헛된 말과 지식 즉 영적 교만 속의 열매없는 신앙 생활을 고발하고 있다.
4:21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매...사랑...온유한 마음 - 이것들은 모두 하나의 생각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바울은 14절에서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과 훈계하는 것이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 바 있다. 본절에서도 매와 사랑을 대치시키지 않는다. 만약 바울이 매를 가지고 나아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에 근거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아픈 채찍으로 훈계하든지 사랑과 온유한 마음로 격려하든지 간에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사설(邪說)과 교만으로부터 해방되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문제는 바울이 매를 택하느냐, 사랑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한편 '매'를 가리키는 '라브도스'(*)는 공관복음서에서 전도자들이 지니는 지팡이를 의미하기도 하였으며(마 10:10;막 6:8) 때로는 지배자의 상징으로서 홀을 의미하기도 하였다(히11:21). 그 외에 '목자의 지팡이' 또는 '스승의 매'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훈계하는 (14절) 것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Le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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