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경해석

고린도전서 1장 강해

白鏡 2006. 4. 21. 14:30

<고린도전서 1장 강해>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Paul, called to be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and our brother Sosthenes,

'사도'라는 직분은 원래 오직 그리스도가 임명을 해서 직접 보낸 열 두 제자만을 가리켰다. 그러다가 초대 교회에서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게되었다(Cole).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근거로  해서(행9:15) 자신의 사도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명백히 한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권위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이 본서의 첫머리에서 자신의 신분을 사도라고 밝힌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형제 소스데네 - 헬라어 본문에서 '형제'의 헬라어 '아델포스'(*) 앞에 정관사  '호'(*  )가  있어서  소스데네가  '형제들'가운데  하나임을  의미한다(Farrar).

그가 바울과 함께 본서신을 집필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나 고린도 교인들이 소스데네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언급했을 것이다. 소스데네는 고린도의 유대인 회당의 회당장이었으며, 유대인들이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송사(訟事)했을 때 바울 대신에 그들에게 매를 맞은 사람이었다(행 18:11-17).

(“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갈리오가 아가야 주 총독으로 있을 때에, 유대 사람이 한패가 되어 바울에게 달려들어, 그를 재판정으로 끌고 가서, "이 사람은 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바울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 사람에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 여러분, 사건이 무슨 범죄나 악행에 관련된 일이면, 내가 여러분의 송사를 들어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그러나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여러분의 율법에 관련된 것이면, 여러분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이런 일에 재판관이 되고 싶지 않소."

그래서 총독은 그들을 재판정에서 몰아냈다. 그들은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들어다가 재판정 앞에서 때렸다. 그러나 갈리오는 이 일에 조금도 참견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스데네라는 이름은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그가 반드시 본절의 인물과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Hodge, Alford, Morris).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To the church of God in Corinth, to those sanctified in Christ Jesus and called to be holy, together with all those everywhere who call o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their Lord and ours:


바울이 고린도라는 지명과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언급한  것은 기독교의 고귀한 이상과 우상 숭배의 허탄함을 극명하게 대조해 주는 역설적인 표현이다(Bengel).


'거룩하여지고' 의 헬라어 '헤기아스메노이스'(*)는  완료형 분사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고 그 결과 이루어진 상태가 현재에도 계속 유지됨을 의미한다(Grosheide).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 등이 하나님의 소유로서 거룩하다고 불리워졌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을 지칭하여 거룩한 자들이라고 불렀다(30절;6:11). 바울이 여기에서 고린도인들을 '성도'와 '거룩하여진' 자들로 칭했다고 해서 고린도 교인들 모두가 참 신자였다고 말할 수 는 없다.의심할 바 없이 고린도시가 부패했던 것처럼 교회도 교리와 실천에 있어서 상당히  부패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고  있다(Calvin).


또 각처에서...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각처에서'라는 말은 이 서신이 고린도 교회 이외의 다른 교회에서도 읽혀질 것을 목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본서와 같은 특정한 내용의 서신 다시 말하면 특정한  교회의 개별적인 문제를 취급한 편지가 일반 교회를 상대로 하여 쓰여졌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고 한다(Robertson, Plummer). 그러나 본 서신이 비록 고린도 교회에  보내진

것이라할지라도 다른 교회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배제(排除) 할 수 없다(Lightfoot).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바울의 서신은 하나님의 교회의 근본적인 성격을 원리적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본장의 1절부터 9절까지 아홉번이나 반복되었다.바울의 문체의 독특성 중의 하나는 핵심되는 단어를 계속하여 되풀이하는것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명백히 보여준다.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엔 크리스토 예수)라는 말은 바울의 서신에 164회나 나타나며 옥중 서신(獄中書信)에 특히 많고 본서에서도 11회나 쓰였다

바울이 여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일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영역 안에서 특정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1: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구변'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고'(*)는 '교리'혹은 '진리'를 의미한다(Calvin, Hodge). 그리고

'지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그노세이'(*)는 영지주의(Gnosticism)에서 언급하는 감추어진 신비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을 말한다(Mare).  즉 바울이 말하는 '지식'이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8) 곧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실재 위에 기초한 구체적인 지식을 말하고 있다.


1:6-7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그리스도의 증거'란 바울이 4년 전에  고린도에 머무르면서 전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말한다

'은사'라는 말은 값없이 주는것, 온전한 선물,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며 그 종류로는 다음과 같다.(고전12:8-10)

1) 지혜의 말씀

2) 지식의 말씀

 '지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비밀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용어로 이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고후 10: 5)이며,

3) 믿음

4) 병 고치는 은사

5) 능력의 은사 : 병고치는 것 외에 여러가지 이적을 일으키는 은사를 가리킨다. 사귀를 축출하는 일, 아나니아부부와 박수 엘루마를 징계하는 일(행5:1-10, 13:8-13) 등이다 (이상근주석)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을 감당하게 하는 힘, 비상한 고난을 견디어 나가게 하는 힘 등이다(박윤선주석)

6) 예언의 은사

7) 영분별 은사

행19:13에 보면 악한 영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예언과 거짓 이적을 행사케 한다. 요일4:1은 거짓영이 있다고 했다 고로 악령을 식별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고후 11:14-15) 그러나 교회의 보호를 위해 식별하는 일은 필요했다. 그래서 이 은사를 주신 것이다.

8) 방언의 은사

9) 방언통역의 은사


'나타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칼립신'(*)은 문자적으로 '뚜껑을 열다', '수건을 벗긴다'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감추었던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참뜻은 현재에는 비밀에 속한 것인데 종말에는 비로소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한편

'기다림이라'의 헬라어 '아페크 데코메누스'(* )는 바울이 주로 사용한 단어로 초대 교회 교인들의 종말론적 삶을 잘 표현해 준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강하고도 진지하게 기다리며 경성한다는 의미를 지니며 '간절하게 기다리면서'(eagerly waiting for, NIV)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들의 간절한 기대는 주님의 종말(終末)에 관한 말씀(마 24:30,34)에 근거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가능하면 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주님께서 재림하시기를 바랐다(15:51;살전 1:9,10;약 5:8,9;벧전4::7;요일2:18;계 22:20).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주께서'라는 인칭관계대명사 '호스'(*   )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다. 7절을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인  듯  하지만(Origen,Meyer, Robertson), 9절에서 하나님의 미쁘심을 언급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하나님아버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Calvin, Alford,  Bengel,  Hodge, Mare). 만약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날에 견고케 하시리라'고 말하는 격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바울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faithful. 신실함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형제들아 - 바울은 그의 편지의 서론을 마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기의  집필목적에 따라 고린도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에 관하여 언급하기 시작한다.  본론에 들어가는 첫 부분에 나와 있는 반의어 접속사 '데'(*, '그러나',개역성경에는 생략됨)는 전체적인 흐름을 잘 표현해 준다. 즉 뒤에 나오는 내용이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과 상당히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형제들아'라는 호칭은  바울  서신에서 자주 사용되는 말로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 담긴 어조이다.


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글로에의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클로에스'(*)는 문자적으로 '글로에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정확하게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수 없다. 다만 글로에는 고린도 교회에 잘 알려진 상업에 종사하는 여인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Hodge).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그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녀의 집에  속한 종들이나 가족 중의 한사람이 바울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다(Grosheide). 그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것이고 고린도 교회의 교인이면서 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본문에 소개된 네분파의 내용을 살펴보자.

   바울에게 - 바울에게 속했다고 하는 자들은 주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자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이방인 개종자들이 모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여튼 그들은 바울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다른 지도자들을 배격(排擊)하면서까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향한 바르지 못한 충성심을 배격하고 비난했다.

   아볼로에게 -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학자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고 웅변적인사람(행 18:24-28;딛 3:13)인 것 외에 그를 알 수 있을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고전3:16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라는 말로보아 그가 고린도 교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그의 풍부한 학식으로 인해 지식층의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였을 것이고 그들은 곧 바울을 멀리하고  아볼로를       지도자로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가 대립적이 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는 없다.

   게바에게 - '게바'(*,케파스)는 '바위'(rock)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게바'(*) 음역으로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이다. 그가 당시에 고린도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혹자는 이 파를 바울에 대항하는 율법주의 부류로  보기도 한다(Baur).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신학적인 것이 아니며 단순한 편당심리에서 발생된 것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이 파는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에서 지도를 받은 유대인 신자들이 그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모여 그를 추종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베드로의 이름을 헬라식으로  부르지않고 아람어로 부른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그리스도에게 - 이 파가 어떤 성격인지 알기가 매우 곤란하다. 혹자는 고린도 교회 내의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한 분파라고 한다. 그러나 전술했듯이 고린도 교회의 분파문제는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은 설득력이 없다.  추측하건대  이 파는 위의 세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당파인 듯하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그리스도에게만 속하였다고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 역시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그 곳에 당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러한 당파를 만든 그 정신을 책망하고 있다.


1:13-15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  바울은 인간 지도자를 중심으로 당쟁을 일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값을 무효화(無效化)시키며 그리스도만이 가지는 구주로서의 권위를 무시하는 결과임을 보여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아무도 그리스도의 자리에 설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 이질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여기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토 오노마'(*)는 전치사 '에피'(* , 행 2:38)나 '엔'(* ,행 10:48)과 함께  쓰인 용법보다 강한 표현으로 영적인 결합의 상태로 들어감을 가리킨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나 삼위일체 하나님과 견준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있다.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그리스보'

행 18:8에 나타나는 '회당장 그리스보'와 동일한 인물로 보여진다. 그리고 본절의 '이오'라는 이름은 행 19:29에 나오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는 다르지만 롬  16:23에  언급된 모든 고린도 교회를 접대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요삼 1:5,  6)에  나오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가이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Robertson).

여하튼 바울은 이 두 사람과 스데바나 집 사람(16절)에게만 예외로 세례

를 베풀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이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바울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때  타당하지 않다(Morris).

바울이 제한적으로 세례를 베푼 이유는 구태여 밝히고 있지 않지만, 바울이  이들에게만 세례를 베푼 것을 '감사한'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는 몇몇  당파의 지도자들이 자기 파의 세력를 확장하기 위하여 서로 다투어 가며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세례의 본래 의미를 잃고 세례를 단순히 당파 확장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 세례를 베푸는데 있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

는 데  있었기  때문에 몇몇 소수의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었을 것이다.

이 사실이  바울 자신이 제자를 만들고 있다는 비방을 막을 수 있어서 그는 기뻐하였다.


=====1: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당파적 정신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만약  그들이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그들은 '바울파'임을 주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세례를 몇 사람에게만 베풀었던 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보아  감사의  제목으로 삼았다(14절).

이렇듯 바울은 성도들을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묶으려는 어떤 시도도 배

제하였고 도리어 그리스도와 구속받은자들 사이에 있게 되는 교제와 연대 의식을 중요시했다.

결국 본절에서 바울이 자신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갖도록 성도들에게 말했거나 시도했다는 실마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였다(Morris).


1:16-17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은 아가야에서 최초의 열매였다(16:15). 당시 스데바나는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에베소에서 바울과 같이 있었다(16:17).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 '말의 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피아 로구'(*)는 '말의 명석함으로'라고 번역될 수 있다(Mare). 당시 고린도의 어떤 신자들은 인간의 지혜와 달변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전형적인 헬라인으로서 수사학과 철학 연구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였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여 바울은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가 받은 사명이 아님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헛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노데'(*)는 이름과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무력해지거나 효력없는 상태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바울이 설교하면서 십자가의 도 대신에 인간의 지혜나 인본적(人本的)인 철학 따위로 대치하였다면 그의 설교는 무력하고 인간의 지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1:18-20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십자가의 도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로고스 호 투스타우루'(*)는 문자적으로 '그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의미로 앞절에 있는 '말의 지혜'와 대조를 이룬다.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대한 문제는 잠시 제쳐 두고 개심자들이 인간의 말과 지혜에 대해서 지나치게 찬사를 보내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Lightfoot). 결국 그가 여기에서 언급한 '십자가의 도'란 십자가에 관하여 전하는 말로서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를  의미한다.

=====1:19

  기록된바...폐하리라 하였으니 -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인간의  지혜를 채택하지 않고 버리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29:14(LXX)을 인용하고  있다.


사 29:13-14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


다만 70인역에서 '가리워지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립소'(*)가 본절에서는 '폐하리라'의 헬라어 '아데테소'(*)로 대치되고 있다. 이사야서의 문맥을 살펴보면 인간이 입술로만 경배하고 마음은 멀리 떠났으므로(사 20:13) 인간의 지혜와 총명이 가리워진다고 되어 있다. 바울은 이 사상을 자신의 논쟁에  적용시킴으로써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논리를 펴나가고 있다. 본문에서 '지혜'와 '총명'은  차이가 별로 없으나, 의미상 전자는 뛰어난 마음 상태를 뜻하며 후자는 어떤 일들을 분별할 수 있는 지적 판단력을 의미한다(Morris). 이것들은 인간이 발휘할수 있는  독특한 능력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없애버린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인간의 지혜가 상대적이고 의존적(依存的)이며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1:20

  지혜있는 자가...선비가...변사가 어디있느뇨 - 인간의 지혜가 갖는 한계를 명확히 제시한 후, 본절에서는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한다. 여기서 '지혜 있는 자'란 바울이 헬라인을 염두에 두고 한  말

이다(22절). '선비'의 헬라어 '그람마튜스'(*)는 '서기관'을 가리키기도 하지만(막 23:2;눅 20:39;행 19:35), 율법에 능통하여 '율법을 가르치는 자'(teacher of the law, NIV)를 지칭하기도 했다.이 용어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기가 적절한 단어였다. 또한 '변사'의 헬라어 '쉬제테테스'(*)는 무슨 문제든지 인간의 이성으로 해결하려 드는 사람을 가리키며 본절에서는 지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하려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동시에 지칭한다(Mare).

이러한 용어들을 번갈아가며 사용한 것은 당시 고린도 교회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로 구성되어있어서 헬라적 개념과 유대적 개념을 같이 사용해야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세상의'의 헬라어 '코스무'(*)는 앞 구절의 '세대'(* 아이오노스)와  동의어로  원래 질서 정연한 배열을 의미하다가 나중에는 비기독교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Robertson).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

이 구절은 해석이 난해하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테

소피아 투 데우'(*)는 '하나님의 지혜로'  혹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등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그 의미는 (1)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2) '하나님의 지혜의 드러남 가운데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의 해석을 따르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곧 하나님의 지혜 라는 의미이다(Alford, Lightfoot). 또한

(2)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세상에 나타내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나(롬1:20) 세상이 알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Chrysostom, Meyer). 이 가운데 (2)의 견해가 더욱 타당한 데, 이 견해를 따라  해석하면 사람이 비록 창조와 섭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에 둘러싸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지식을 얻는데는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분명하지만,  인간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인간은 빛 가운데서도 눈이 먼 상태로 있고 자신의 지식 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롬 1:28).


1:22-25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 '표적'은 구체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을 의미하는데 유대인들은 종종 예수께 찾아와 표적을 구하였다(마  12:38;16:1;막 8:11,12;요 6:30). 그들은 항상 증거를 요구했고 현상적인 것에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도 역사 속에 표적과 큰 능력과 기사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혀 저주 아래 있게 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헬라인들은 이성적인 증거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것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장 큰 이상(理想)은 지혜 곧 철학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가 때로는 무의미한 궤변에 빠지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행 7:21) 지적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란 조국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존재케 할 영광스런 왕이라고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행악자 취급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모욕(侮辱)이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걸림돌만 될 뿐이다(롬 9:33;벧전 2:8).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당시의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십자가의 형벌을 가장 비천한 죄인들이나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십자가와 구세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다. 또한 헬라인들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된다 해도 육신의 한계로 인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본 구절을 통해 모든 인류가 빠짐없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거부했음을 말하고 있다.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육체를 따라'의 헬라어 '카타 사르카'(*)는 '육체를 표준으로 삼아'라고 해석되는데, 대개 '육체'는 인성(人性)을 뜻하므로, 세속적인 관점으로 분별한다는 의미가 된다.

'지혜 있는 자'(*,소포이)는 헬라의 철학자들처럼 높은 교육을 받은 지적인 사람들을 가리키고 '능한 자'(, 뒤나토이)는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자를 의미하며, '문벌 좋은자'(*, 유게네이스)는 사회적으로 상류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바울은 이 세 용어를 사용해서 지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유력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상류 계급에 속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러한 외적인 조건에 근거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천한 것들'의 헬라어 '아게네'(*)와 '멸시받는 것들'의 헬라어 '엑수데네메나'(*)는 낮은 계급에 처한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로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선택이 적용됨을 강조한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고린도에 노예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이 처한 특별한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다.

또한 바울은 '없는 것들'(*, 타 메 온타,the things that are not)이라는 표현을 통해 사회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고 필요가 없는 자들까지도 선택의 대상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있는 것들'의 헬라어 '타 온타'(*)는 세상에서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는자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유력한 자일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심'과 '폐하심'의 주체자로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이 대조법을 통해 다시 한 번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신분은 구원을 얻기위해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Mare).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무 육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사 사륵스'(*)는 문자적으로 '모든 육체'를 가리키며 비유적으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구속함'이란 적당한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자유롭게 한다는 뜻에서 전용(轉用)된 말로(출 21:8),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대가로 인간을 죄의 속박에서 풀어놓으셨다는 뜻이다(엡 1:7;골 1:14;히 9:15).


1: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렘(예레미아) 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을 인용함으로써 구약의 권위를 빌어 강하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얻게 되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유래한다. 모든 선(善)은 하나님께만 있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자랑해야 한다. 결국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구속받은 백성임을 인식시킨 후 그의 백성에 합당하게 주님의 영역 안에서 자랑할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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