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이(039) 야인 상경기(野人上京記) 1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다
# 2019-02-19
처음 듣는 제약회사 직원이 서울에서 찾아왔다.
용건은 그 회사에서 주최하는 심포지움에서 초음파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이 은퇴한 늙다리를 찾아왔을까?
사연인즉슨
초음파를 직접 하는 내과의사 중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대구의 김일봉 원장을 찾아갔더니 자신은 그 날 다른 일정이 잡혀있어서 안되고 대신 좋은 분을 소개해 주겠다면서 나를 강력 추천했단다.
서울에서 대구를 향해 큐대를 휘둘렀는데 그 공이 그만 대구에서 히네루(spin)를 먹고 부산으로 튕겨온 것이다.
먼저 심포지움 전체 일정 및 연제들을 보자 했다.
일정은 3월 30일 저녁에
서울에 있는 한 호텔에서 50분 짜리 강의 두 개를 듣고,
하룻밤 호텔에서 묵은 뒤
다음날 오전에 또 두 연제를 듣는, 이름하여 Overnight Symposium 이라는데
영상의학자인 나는 이런 행사 처음 본다.
다른 연자들의 강의 제목은 이미 다 정해져 있었고
세 사람 다 GERD(Gastro-Esophageal Reflux Disorder)
즉 위식도 역류성 질환에 관한 최신 지견 및 치료에 대한 내용이다.
“이거~~ 보아 하니 세미나 주제가 GERD인 모양인데
이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초음파를 왜 넣을라 그래요?”
“아, 네~~, 준비 과정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초음파 강의 하나쯤 꼭 넣어주면 좋겠다 해서요.”
“대상이 누군데요?”
“거의 대부분 내과 개원의 선생님들로서 전국에서 약 100 명 정도 초대할 예정입니다.”
이제 감이 잡혔다.
요즈음 병원들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데,
최저임금 상승 탓에 올해는 중소종합병원들도 존폐의 위기에 빠졌다는데,
대학병원에서는 내과 지원자가 적어 레지던트 정원도 잘 못 채우는데,
개업의들이야 오죽 하겠나?
내시경이라도 하나 넣고 수입 좀 올리자니
나홀로 개원의가 무슨 배짱으로 수면내시경의 사고위험 부담을 감당하겠나?
그런데 마침 잘 됐네.
작년부터 복부초음파가 본격적으로 건강보험에 편입되었으니
빚을 내서라도 기계 한 대 집어넣고 이거라도 열심히 배워서 먹고 살자!
게다가 '역류성 식도염' 하면 내과 전문의 치고 모르는 사람 어데 있노?
그러니 마~~ 돈 안 되는 약 처방에 필요한 최신지식보다
그나마 많이 하면 돈 좀 되는 초음파에 대해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것이
훨씬 영양가가 높다, 뭐 이런 말씀 아니겠나.
회사는 또 어떻누?.
복부분야에 있어서는 주로 위장관 계통 치료제를 생산 판매하는 회사이다 보니
울트라사운드(Ultrasound, 초음파)에 대해서는 완전 문외한이던 그들로서는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만난 것이다.
GERD 분야에서 이름난 내과 교수 몇 명만 섭외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이 행사에 참가할 자사(自社) 제품의 User이자 Buyer들의 마음은
GERD가 아니라 울트라에 가 있네요.
결과적으로 내과 교수들의 강의가 아니라
울트라를 강의 할 울트라맨 하나에
‘억’소리 나게 돈이 들어가는 행사의 승패가 갈리게 생겼으니
이 무슨 황당 시츄에이션 이겠는가?
하지만 평소에 영상의학과 의사와는 일 면식도 없어
어느 누가 이 분야의 대가인지 알 길도 없고 하여
강의를 들을 내과 선생들의 추천에 따라
대구까지 내려가 그 분야의 유명 내과 선생을 만났는데
본인은 안 된다 하고
영상의학과 의사 한 사람을 추천해 주어 급한 김에 엉겁결에 물긴 물었는데
아~ 이거이 현직 교수도 아닌 것이
어디 생전에 듣도 보도 못한 지방의 한 조그만 병원에 근무하는
연금수급 경로우대 오전근무 알바 은퇴 노털 의사라니
이 또한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이러한 정황들이 몇 초 사이에 내 머리 속에서 휘리리 돌아가고 나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내 어깨에 짊어진 무게가 묵직하니 느껴졌다.
원외(院外) 초음파 초청강연 제안이 얼마 만이던가?
1년 10개월 만이다,
그 동안 잠잠했던 피가 오랜만에 슬슬 끓어오르는 느낌이다.
프로근성의 피가………
2019-04-04
Will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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