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닥치는 일들 6
- 입장이 바뀌다 -
어느 조그만 병원에 갑자기 영상의학과 과장이 그만두게 되었다.
어렵게 후임과장을 한 명 구했는데 그가 현재 군의관인 관계로
4월 초가 지나야 제대하고 근무할 수 있단다.
그 사이 비는 삼 개월 반을 놀고 있는 나보고 채워달라 매달렸다.
한마디로 급구(急求) 알바 자리다.
그런데 매력적이다.
우선 퇴직 후 사 개월을 놀고 있으니 몸이 근질거리던 차에
몸 풀 일거리가 생겨 좋았고 또한 한시적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인문학 강의 요청이 많아지면
수요는 주로 서울 경인지역에서 일어날 터인데
그럴 경우 정식 직장을 가지고는 응하기 힘든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무도 오전만 하는 걸로 조건을 걸었다.
초판 1쇄 한 달 만에 완판 하고 기세 좋게 2쇄 찍었다가
요즈음 책이 잘 안 팔려 고민하는 사람이
앞으로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강의 걱정에
오전만 일하고 석 달만 일하겠다는 나를 보고
아내는 "당신 혹시 망상병?"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튼 취업이라는 걸 하다 보니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방사선 종사자는 일반건강진단 외에 특수검진을 받아야 하므로
그 부분은 지정 전문병원에 가서 해 오란다.
오전 근무 마치고 갔더니 점심시간이라고 기다리란다.
대학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내 말 한마디면 다 됐는데,
내가 진료받느라 가서 기다리는 일은 없었는데,
대기실에서 멍 때리고 앉아있는 내 모습이 무언가 낯설고 어색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 직원의 지시에 따라 채혈실에 가서 피 뽑고 와서
키와 몸무게 그리고 시력을 잰 후 혈압을 쟀다.
그런데 혈압을 재는 간호조무사가
혈압이 150/100 이라면서 마치 내 딸이라도 되는 양 걱정스런 얼굴로
“혈압이 많이 높은데요!” 한다.
“난 평소에 혈압 안 높은데요.” 하니 반대편 팔에서 한 번 더 잰다.
결과는 똑 같다.
"그럼 좀 기다렸다 합시다." 하고는
한 5분 간 얕고 긴 복식호흡을 한 후 다시 쟀는데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이제 마지막으로 의사와의 면담이 남았다.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 또 기다리란다.
한 10분 앉아있으니 의사 선상님께서 들어오셨다.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
내 이름 불러서 그 앞에 가서,
의자에 앉기 전에 모자 벗고 머리 숙여 정중히 인사부터 했는데
받는 둥 마는 둥 한다.
순간 ‘이 자석 왜 이리 건방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병원에 레지던트는 없으니
상대는 산업보건의학과 전문의쯤 될 것 같다.
노타이에 대충 차려 입은 옷에 가운 하나 걸쳤다.
차림새나 생김새나 태도나 의사다운 품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방금 측정한 기본검사 자료를 보더니 대뜸
“혈압이 왜 이리 높아요?” 한다.
나는 그 질문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아
잠시 동안 그 선상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다
“그 질문은 오히려 내가 선생님께 해야 할 질문이 아닐까요?” 하니
이번엔 이 친구가 나를 멀뚱히 쳐다본다.
그리고는 기분이 좀 언잖았는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설문지에 쓰여진,
내가 다 알고 있는,
영양가 없는,
뻔한 질문 몇 개,
성의 없이 던지길래
귀찮게 연결질문 안 나오게,
모범답안만 골라,
건성으로 대답하고,
인사 없이 나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경망스럽기는 의사나 간호사나 마찬가지였다.
혈압은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재느냐에 따라 10-20정도는 얼마든지 넘나든다.
만약 피검자의 혈압이 높게 나온다면
먼저 검사자가 제대로 된 방법으로 쟀는지 체크해 보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피검자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올 때 계단을 올라오지는 안 했는지,
급히 걸어오거나 뛰어오지는 안 했는지,
오기 전에 놀래거나 열 받은 일은 없었는지,
불안하지는 않은지,
평소에 집에서 편안한 상태에서 재본 적은 있는지 등등
그런데 그 중 한 가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혈압이 높다 하더라도
나이가 들면 혈압은 어느 정도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내 나이에 150/100이 어때서?
내 말은 이게 정상이란 말이 아니라
이게 뭐 그리 심각히 높은 혈압이냐? 하는 말씀이다.
뭘 모르는 환자들이 이 정도에 불안해 하면
그들을 진정시켜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마치 큰 일이라도 난 듯이 눈 똥그랗게 뜨고
호들갑을 떨며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으니
'나 이거 원~~~'.
의사는 무엇보다 환자에게 신뢰감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환자가 자신의 몸을 믿고 맡길 것 아닌가?
신뢰감을 주려면 우선 겉보기에 의사다워야 한다.
그러려면 몸가짐부터 단정해야 한다.
의사란 사람이
머리는 수세미 바가지같이 해가지고
꾀재재한 와이셔츠에,
떨어진 소매단추에,
때묻은 가운에,
손톱 밑에 때 끼고,
입에서 지저분한 냄새 풍긴다면
이런 노무 의사한테 무슨 노무 신뢰가 가겠노?
신뢰감을 주려면 행동거지에 품격이 있어야 한다.
의사는 환자에게 먼저 정중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친절해야 한다.
환자가 하는 인사 제대로 안받는 의사,
나이 많은 환자에게 반말지거리 툭툭 던지는 의사,
환자가 하는 증세 호소를 귓잔등으로 든는 의사,
환자가 묻는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의사,
퉁명한 말투에 천박스런 말씨를 쓰는 의사,
진료실에 환자와 보호자가 들어오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어서 옵쇼~~"하고 90도 각도로 인사하는 장사꾼 같은 의사.
이런 노무 의사한테 무슨 노무 신뢰가 가겠노?
나는 지금껏
나름대로는 환자의 입장에 서서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가운을 벗고 나와 환자의 입장이 되어보니
지금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의사가 환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눈을 두 개 주셨나 보다.
안에서 보는 눈과 밖에서 보는 눈을!
2019-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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