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닥치는 일들
‘설거지 담당이 되다’
결혼생활에서 아내에게 제일 미안한 점은
지체 장애인인 내가 아내를 위해 집안 일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겨우 하나 할 수 있는 것은 설거진데 직장 다닐 때는 그마저 거의 손 대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 환갑 때 아이들이 낭독해 주던 편지 중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아들의 편지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있었다.
“결혼하면 손에 물 한 방울 안 뭍이게 해 주겠다던 아버지는
어느 날 만덕의 조물주로 등극하시어 모든 걸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어머니는 그의 충실한 시녀가 되어 손에 물 마를 날 없어
날이 갈수록 신앙심은 깊어만 갔습니다.”
이러던 내가 은퇴 후 돈도 안 벌어오고 매일 집에서 죽치고 앉아 아내 시중만 받고 있으려니 눈치가 보였다.
하루 한 두 번 설거지라도 해주어야겠다 싶어 어느 날 아침밥 먹은 후
싱크대에 가서 고무장갑을 꼈다.
"마~~ 놔 두소. 나중에 내가 할 테니까."
"아니 이 정도는 내가 해야지."
처음엔 사양하던 아내도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자 어느새 아침 점심 설거지는 내가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변해갔다. 그것까진 괜찮은데 내가 해 놓은 설거지에 대해 슬슬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깔끔맞기로 말하자면 내 아내야 말로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눈으로 내가 씻어놓은 밥그릇 검사하면 어찌 티끌 하나 안 잡히리요!
“아이고, 이 양반이 그릇 씻다가 말았나~~이기 머꼬?”
“당신, 그릇 씻을 때 몇 번 씻소?”
“두 번, 그것도 한 번 씻을 때마다 박박.”
“그런데 와 이런 게 남아있소?”’
하면서 밥그릇 바깥 면에 약간 남아있는 얼룩자국을 지적한다.
“야 이 사람아, 씻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마 ~ 그냥 좀 넘어가면 안 되것나?
그런 것 좀 묻었다고 밥 먹다가 죽은 사람봤나?
정 마음에 안 들면 본인이 씻던지!
아이고 깔끔은 혼자 다 떨어요.”
그 후부터 더 박박 문질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검시관(檢屍官)의 눈으로 검시檢視)까지 한 후 마무리했다.
며칠 동안 잠잠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릇은 열심히 씻었는데 마지막 마무리가 안되네 ㅊㅊ”
“결국 내 손 가게 만드네.”
설거지에 집중하다 보니
설거지 마치고 싱크대 주변에 묻은 물을 안 닦고 끝낸 게 화근이었다.
속으로 부아가 솟아올랐다.
“뭐든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데 있노?”
“그러면 살살 가르쳐가며 격려해가며 부려먹어야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ㅊㅊ.”
그런데 이런 나의 억울한 심정을 한 방에 날려준 사람들이 있다.
아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친한 친구 두 사람이다.
어느 날 아내가 위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했나 보다.
그들이 철저히 내 편이란 사실을 잠시 망각한 채!
그러자 그 친구 두 사람이 아내에게 집중포화를 퍼부었단다.
“니는 남편한테 우째 그렇노?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이 어데 있노?
만약 니보고 초음파로 환자보라 하면 한 교수만큼 잘 할 자신 있나?”
(캬!~~~ 내 할 말 참말로 속씨원히 대변해 주네)
“그거하고 이거하고 같나? 그건 전문직 일인데.”
“다를 게 뭐가 있노? 설거지는 니 전문아이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꾸벅)
이런 말을 여과 없이 전해주는 아내가 사랑스러웠다.
그만큼 부부 사이가 건강하다는 말 아니겠나?
역시 사람은 좋은 친구를 옆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남자는 낮에 집에 있을 게 못 된다.
2019-02-12
(베트남, 남호이안, Vin Pearl Resort, 2019-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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