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사사이(027-12) 정년 퇴임식 제12막, 퇴임사(5) 또 하나의 갈림길에 서다

白鏡 2018. 11. 12. 11:50

또 하나의 갈림길에 서다

 

이렇게 해서 방사선과 레지던트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레지던트가 된 후 저는 참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얼마나 독이 올랐던지요. 일생을 통 털어 이 때만큼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요? 지금껏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거부했던 사람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고 싶었지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 흐릿한 눈을 부끄럽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거지요. 그래서 레지던트 마칠 때에는 이 머리 가지고 보드(board)를 세 개나 땄습니다.


이제 내가 의사된 목적, 학문을 해서 선진의학을 널리 전파시키고 후배 의사들을 양성하는 것, 이것을 달성시키기 위해 대학에 남으려 했습니다. 그 때 마침 교수 티오가 한자리 났습니다.


그런데 제 때부터 방사선과 수련과정이 4년에서 3년으로 줄어들어 군 복무 후 나보다 한 해 먼저 들어와 4년차로 졸업하는 선배와 같이 수련을 마치게 되었는데 다행히 그는 애당초 학문에는 뜻이 없었고 모 종합병원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고 하여 내가 과에 남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요.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주임교수님께 대학에 남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더니 나보고 시립병원에 가서 3년 근무하라는 것 아닙니까! 청천벽력이었지요. 그런 데 가서 한 삼 년 썩고 나면 학문하는 것 포기해야 지요. 그러고 나면 가는 길 뻔하지 않습니까?


그러려고 내가 의사 된 것 아닌데,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


그 때 마침, 서울대학병원에서 전국 처음으로 임상강사(요즈음 fellow)를 모집한다는 소문이 들렸지요. 2년 차 말에 서울대학병원에 1개월 간 파견 갔을 때 사귄 그 병원 의국장에게 전화하여 지원 의사를 전했습니다.


일주일 후 답이 왔는데 의무장(당시 박재형 교수)으로부터 부산대병원 한 선생이라면 받겠다는 답을 들었으니 지원하라는 겁니다.


지금 젊은 의사들은 도무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당시엔 전문의 취득 후 첫 직장은 주임교수가 가라는 데로 가야 했습니다. (특히 지방 국립대학병원이 더 심했다) 만약 어길 시에는 동문에서 파문 당할 각오를 해야 했지요.


하지만 나는 그럴 각오 했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는 길을 영감님 말 한마디에 따라 갈 순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감님이 내 인생 책임져 줄 것도 아닌데.


보따리 쌀 준비했습니다. "서울로 가면 영감님 얼굴 볼 일 뭐 짜다라 있겠노?" 싶었지요.


그러던 찰나에 백병원 과장인 배철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한 선생, 우리 병원에 온나.”


이 얼마나 반가운 소린지요! 복음이 따로 없었습니다.


말이 서울이지, 저는 눈이 오거나 길이 얼어붙으면 꼼짝 못합니다. 게다가 고향을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장애인인데, 이런 위인이 그런 서울에, 그것도 정식 교수자리도 아닌 임상강사 자린데, 1 년 써보고 신통찮으면 버리는 자린데.


부산에서, 그것도 정식 교수자리 준다는데  내가 미쳤나? 안 가게!


하지만 부산에 남으면 영감님과 이리저리 마주쳐야 하는데 그 압박감을 어이 감당할지~

하여, 아내와 함께 영감님 댁에 찾아가 빌다시피 했습니다.


그 때 아내 역할이 참 컸습니다. 아내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간 것이 중부 보건소였는데 그 당시 사모님이 그 보건소에 촉탁의로 있었고, 그 때 제 아내를 잘 본 모양입니다.


아내가 먼저 사모님을 찾아가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우리 남편 꿈이 이러이러 하다고.

그 날 사모님은 영감님과 함께 자리하셨고 영감님은 시종 굳은 표정 끝에 마지못해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나 대신 그 선배를 대학에 남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병원에 오게 된 겁니다.


* 나 때문에 그 선배는 하기 싫었던 대학교수의 길로 가게 되었고

나는 그 선배 때문에 남고 싶었던 모교 교수자리를 포기해야 했다.


이렇게 또 한 번의 갈림길에서 또 다른 두 사람의 운명이 달라졌다.


2018-11-12

Will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