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사사이(027-10) 정년 퇴임식 제10막, 퇴임사(3) 초이스 커피에 어린 눈물

白鏡 2018. 10. 28. 20:32

‘초이스 커피에 어린 눈물'

 

재가 본과 2학년이던 1976, 부산대학병원에서 희한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인턴시험장에서 두 사람이 쫓겨난 겁니다. 그들은 제 입학 동기였고 둘 다 나 같은 소아마비 지체장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시험장에서 쫓겨난 이유가 참 가관입니다.

 

의예과에 입학하면 의과대학 졸업할 때까지 군 신체검사가 자동 연기됩니다. 그런데 인턴시험은 졸업 전에 칩니다. 하여 엄밀히 말하면 이들이 앞으로 군에 가야 하는 ‘킴스’인지 아니면 군면제자나 군제대자인 ‘난킴스’인지 판명이 아직 안 남 셈이지요.

 

그걸 빌미로 너희들은 아직 군 신체검사를 받지 않았으니 난킴스’ 티오(T.O)로 시험 칠 자격이 없다는 게 쫓아낸 이유였습니다.

참말로 웃기지 않습니까?

 

다리를 저는 사람이 군대 갈 수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삼척동자를 붙잡고 물어봐도 담박에 알아맞출 진데 의학박사인 의대교수님들이 그냥 눈으로 봐서는 진단이 안된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이유라면 아예 수험표를 주지 말았어야지요, 왜 수험표 줘 놔 놓고 시험장에서 쫓아냅니까? 그런 것이 이유라면 다른 사람들도 다 시험칠 자격이 없는 것 맞지요?

 

그들은 둘 다 저보다 훨씬 똑똑한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졸업과 동시에 모교에서 쫓겨나 한 사람은 시립병원 인턴으로, 또 한 사람은 철도병원 인턴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사건은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요. 덕분에 제가 졸업할 땐 내 모교인 부산대병원 인턴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아예 지원할 생각도 못했고 저 역시 시립병원 인턴으로 남았습니다.

 

인턴이 끝날 즈음 이제 레지던트를 들어가야 하는데 갈 데가 없어요.

 

제가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과는 재활의학과 였어요. 본과 4학년 때 진로문제로 지도교수와 상담을 하면서 재활의학과를 하고 싶다 했더니


'환자는 의사가 자신보다 건강한 사람이길 바라기 때문에 자네 같은 사람은 환자를 보는 임상 의사보다는 기초의학자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진심어린 냉정한 조언을 듣고 또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존경하는 교수님의 조언을 따라 기초의학을 하기로 마음먹고 A과 주임교수를 두 번 찾아갔는데 나중에는 같이 찾아간 동기 앞에서 아예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 날 그 방을 나와 비를 맞으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찬비와 함께 뜨거운 무언가가 두 뺨을 적셨습니다.

 

그로부터 꼭 40년이 지난 지금도마치 오래된 옛날 영화 필름 돌아가듯, 이 날의 한 장면 한 장면, 대사 한마디 한 마디, 느낌 하나 하나가 나의 뇌리 속에서 생생히 재현됩니다.

 

기초에서 안 받아주니 이제 임상과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중에서 몸을 가장 적게 움직이며 할 수 있는 과가 무얼까 생각하다 D과를 하기로 마음먹고 부산대 병원을 위시하여 몇몇 수련병원들 주임교수/과장들을 찾아갔는데 그 때 내 스승이란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모진 수모와 인격적 모욕을 당했던지요!

 

요즈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야만적인 일들이, 아예 시험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월권행위가 그 당시에는 당연한 듯 일어났습니다

 

그분들 집을 찾아갈 때마다 인사치례 랍시고 들고 간 게 고래 힘줄보다 더 질긴 17만원 짜리 인턴 봉급 쪼개어 깡통시장에 가서 산 인스턴트 커피 ‘초이스’ 였습니다.



그런데 인턴 생활 중 어렵게 시간 내어 찾아가면 아예 자리를 피해버리거나 서슬이 시퍼래서 해대는 바람에 초라한 커피 병 하나 꺼내 놓을 엄두도 못 내고 인턴숙소에 돌아와서야 그노무 병을 가방에서 도로 꺼내 놓는데 그 때마다 정체불명의 액체 두 방울이 병 위에 떨어졌지요.

 

지금도 이 생각만 하면 눈물이 솟구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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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에 겪었던 상세한 이야기들은 앞으로 쓸 'My Way'란 나의 인생록(人生錄) 속에

‘초이스 커피에 어린 눈물' 이란 제목으로 적지 않은 분량을 장식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 책의 내용을 보다 풍성하게 해 줄 소재를 제공해 주신 '그 때 그 사람' 님들께 감사해야 되겠지요?

 

2018-10-28

Will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