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운명'
11월 24일 결혼했습니다. 이제 부양가족까지 생겼는데 당장 내년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하도 당해서 이제 더 이상 어딘가 기신기신 찾아가 부탁하는 것도 신물이 났습니다.
‘케세라 세라(Que Sera, Sera)’ 말 그대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죠 그런데 희한한 것이 이런 한심한 처지임에도 별로 걱정이 안되는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심심해서 전화번호 수첩을 넘기며 이러 저리 전화질을 하다가 더 이상 돌릴 데도 없게 되었는데 문득 부산대학병원 방사선과 레지던트로 있던 후배가 생각나 그에게 다이얼을 돌렸습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양산부산대병원의 문태용 교숩니다. 그와는 학교 다닐 때 형, 동생 하며 친하게 지낸 사이였어요.
“문 선생, 잘 있나? 오랜만이네.”
“아이고 형님 우짠 일이요? 잘 있소?”
그러면서 이런 저런 잡답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너거 레지던트 티오(T.O)는 다 채웠나?”
라는 말이 나왔고 그에 대해 돌아온 답이
“킴스는 채웠는데 난킴스 지원자가 아직 없소.
내일 모래 접수 마감인데 지원자가 아직 없는 일은 의국 생기고 처음이라요.”
저는 이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바로
“그라믄 내가 가면 되겠나?”하고 물었죠.
“잘 됐네요, 빨리 오소!”
이 과 저 과 돌아다니며 그렇게 문전박대(門前薄待) 당하면서도 단 한 번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던 방사선과였지만 더운 밥 찬 밥 따지고 있을 단계가 아니었죠. 그 순간에는 무조건 레지던트부터 들어가고 보자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다 다음날 토요일, 원서접수 마감일, 오전 응급실 근무 마친 후 서둘러 아미동에 있는 부산대 병원 방사선과 의국으로 향했습니다.
의국에 도착하니 의국원은 아무도 없고 의국을 지키고 있던 아르바이트 여고생 말이 다들 점심식사 하러 밖에 나갔 다네요.
조금 앉아 있으니 그 여학생이 나보고 의국 좀 지켜 달라는 말을 남기고 퇴근했습니다. 학생이 나가고 채 5분이 채 되지 않아 누군가가 의국 문을 빠끔히 열고 얼굴만 살짝 내민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방사선과 남킴스 지원자 있습니까?” 하는 게 아닙니까?!
그의 눈에는 의국에 혼자 앉아있는 내가 의국원으로 보였고 서로 얼굴이 생소한 걸 보아 내년 5월에 군복무 마치고 나오는 선배 난킴스 지원자임이 분명했습니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아무 데서도 받아주지 않던 장애인인 나와 군 제대한 사지 멀쩡한 사람과 둘이 붙으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 그래서 두근거리는 가슴 달래며 그를 힐끗 쳐다보면서 퉁명스레 한 마디 했지요.
“지원자 있어요!”
그러자 그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더니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고 나중에 보니 그 선배는 마취과에 남았습디다.
그렇게 해서, 몇 분 상관에 두 사람의 길이, 운명이 엇갈렸습니다.
그는 마취과로, 저는 한 번도 생각치 못한 방사선과로.
(박수 짝짝짝)
저는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 생각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이 어찌 모두 우연히 일어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전부터 나에게 가장 적합한 길을 예비해 놓고 계셨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엉뚱한 문을 두드리니 문은 열릴 리 없고 대신 열나게 깨지기만 한거죠.
그것은 하나님이 앞으로 재목으로 쓸려고 광야를 돌리며 엄청나게 트레이닝을 시킨 것 아니겠습니까?
2018-11-11
Will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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