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사사이(027-4) 정년 퇴임식 제4막, 예상치 못한 딸아이의 헌사(獻辭)

白鏡 2018. 10. 2. 03:43

사사이(027-4) 정년 퇴임식 제4, 예상치 못한 딸아이의 헌사(獻辭)

 

마지막으로 가족 대표의 축사가 있었다.

아니, 원래는 없었다.

?

지금껏 선배들 퇴임식에서 이런 식순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퇴임식을 1주일쯤 앞두고, 생각지도 않게, 내 딸이 자기가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참으로 뿌듯했다.

출판기념회 때는 아들이 나서서 프로 사회자들 명함도 못 내밀도록 멋지게 사회를 봐 주어 기념회를 빛내 주더니만,

이 번에는 딸이 나서서 어떤 퇴임식에서도 보지 못 한 아빠에 대한 헌사(獻辭)를 바치겠다니 말이다.   

 

늘씬하고 씩씩한 우리 딸이 연단에 올랐다.

준비해 온 원고를 내 놓고 한상석 교수님, 아니 저의 아빠..”란 말 한 마디 읽어 놓고는 바로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발게지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죄송합니다. 안 울려 했는데, 이를 악물고 올라왔는데아빠란 말에 그만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네요.”


그러자 눈물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내가 옆에서 바로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는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뒷줄에 앉은 나의 47년 지기(知己)이자 입사동기인 차교수도 눈물을 훔치고 있다)


(퇴임식 날 찍힌 사진들을 찍힌 순서대로 한 장씩 넘겨보니 차교수가 내 아내보다 먼저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로써 눈물에 관한 한 아내가 둘째 가도 서럽지 않게 되었다)


이제 감정을 가다듬은 내 딸이 축사를 이어가기 시작한다.

살아보니 세상사는 것이 참으로 만만치 않은데 65세까지 근속하시면서 저희 가족의 경제적 정신적 버팀목이 되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동안 아빠께서 엄마, 승윤이, 저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 주셔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철없는 어린시절은 오로지 저 자신의 학업과 커리어에 포커스를 두며 살았기에 아빠에 대한 감사함을 찬찬히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지요.



어렸을 때는 아빠와 생각차이로 인해 종종 논쟁했으나 이제는 어쩌죠?

얼굴이면 얼굴, 카리스마면 카리스마, 사람들은 제가 아빠를 빼다 박은 거 같다네요.



어릴 적 아빠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빠는 베란다 널찍한 회전 의자에서 신문, 책을 보시거나, TV를 보면서 저녁을 보내셨죠.


아빠가 거실에서 가끔 TV를 보실 때면 제가 아빠 배에 기어 올라가서 자리잡고 함께 말없이 TV화면만 시청했던 기억이 나요.


(아빠의 신체적 여건상) 우리와 적극적으로 놀아주시진 못했지만 저희에게 사건이 벌어지면 벌떡 일어나셔서 번개같이 보조기를 신고 사건의 현장으로 달려와 주는 든든한 아빠였습니다.

아빠의 자상한 면을 꼽자면, 집에 돌아오실 때 양손에 맛난 것을 하나 가득 들고 오셨죠. 전 다른 건 몰라도 아빠가 먹을 것을 사 들고 올 때가 가장 좋았어요. 봉지에 가득한 과자, 스낵을 보면 아빠에 대한 사랑과 행복감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아빠는 저희의 학업과 진로에 하나하나 신경쓰는 스타일은 아니셨어요. 그런데 완벽주의자이신 아빠가 저희의 학교, 진로 선택 하나하나 다 신경 쓰셨다면 전 아마 숨막혀서 가출했을지도 몰라요.


세세하게 참견 안 하신 점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후 제가 성장한 다음 한잔하면서 연애 고민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경청자이자 조언자가 되 주셨어요.


아빠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분 이셔요. 한번씩 날카롭게 직타를 날려서 저를 숨 넘어가게 만들기도 하지만 진심 어린 마음으로 들어주고 조언해 주셨어요.


아빠의 가장 큰 장점은 본인께서 잘못했다고 느낄 시에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부분입니다. 어릴 적 저와 논쟁하시다 쌍 너 잘났다!’ 하고 대화가 마무리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아빠는 다른 관점이 설득력이 있을 때면 즉각 수용하는 넓은 맘이 있는 분 이세요.


또한 우리의 별것 아닌 성취도 너무 자랑스러워 하면서 칭찬해주는 아빠. 참 이런 점이 의외였어요. 뭔가 높은 기준을 성취해야 칭찬하실 것 같은 느낌인데 자격증 취득에도 취업소식에도 우리 아들 우리 딸 자랑스럽다하면서 치켜세워 주셨어요.


아빠는 제가 아는 아빠 연배의 무뚝뚝한 경상도 아저씨들과는 좀 달랐어요. 이상하게 사투리를 심하게 안 쓰세요. 그 이유를 여쭤보니, “국민학교 때 웅변반에 있어서 그렇지라며 자랑스럽게 대답하셨던 귀여운 아빠.


요즘 감수성이 충만하셔서 눈물을 쉽게 보인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아빠가 벌써 이렇게 나이가 드셨구나라는 생각에 울컥합니다.


아빠는 힘들어도 아파도 항상 괜찮다고 하셨어요. 신발 때문에 넘어지셔서 이빨이 나가도, 초음파 하신다고 어깨를 많이 써서 통증경감주사를 맞아도 괜찮냐 고 물어보면 고럼, 괜찮아!” 라고 대답하셨죠. 아빠 이제는 제가 곧 40이니 함께 의지하면서 살아가요.


제 커리어의 모델이신 아빠.

내가 열정을 가지고 도전했던 학문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려는 순간 엄마와 아빠는 긍정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셔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아빠가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눈물의 사건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러한 시련의 끝은 결국 아빠에게 가장 좋은 목적지였습니다. 아빠의 열정과 인생을 쏟은 영상의학과를 선택한 과정과 그 바쁜 와중에 엄마와의 결혼을 결심한 사건들을 찬찬히 생각해보면 신의 손길과 사랑이 느껴집니다.


은퇴하시는 순간에도 작가로서 새로운 길을 벌써 개척하신 아빠, 너무 멋져요!


며칠 전 아빠 책 얼굴특강을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베스트셀러라고 뜨더라구요


앞으로 작가로서의 아빠 삶이 어마무시하게 기대됩니다.

사랑합니다. 아빠!”


감동스러웠다.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아이들 어렸을 때 보다 자상하고 보다 잘 놀아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했다…….


 

2018-10-02

Will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