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1 퇴임식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새벽 4시쯤 일어나 몸풀고 묵상하며 1시간쯤 보내고, 장산에 있는 한 절에서 5시 예불을 알리는 은은한 범종소리가 들리자 서재로 향했다. 오늘 있을 퇴임식 때 할 퇴임사 정리 및 리허설을 하는데 세찬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출판기념회 때는 태풍이 올라와 사람 애간장을 녹이더니만 이 번에는 이른 새벽부터 비바람이 친다. 내 마음에 먹구름이 낀다. 호텔에서 하면 비야 오든 말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그만인데 학교 강당에서 하다 보니 축하객들 승하차 시 비 안 맞을 방도가 없다. 저녁도 도시락으로 때워야 하는데 비까지 맞게 하면 너무 미안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또다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오후가 되니 비가 그친 것이다. “하나님 무심도 하시지!” 에서 “하나님 짓궂기도 하시지!”로 바뀌었다. 기적 같은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장 우려했던 축사 부분도 이런 저런 사정 및 조정으로 최악의 가상 시나리오 11명에서 5명으로 줄었던 것이다.
오후 5시 반
아내와 나는 식장 입구에서 손님을 맞았다.
오후 6시.
우리 과의 책임교수인 정해웅 과장의 개회사와 내 외빈 소개가 있은 후
동영상이 상영되었다.
거기에는 각 촬영실 직원들이 나에게 보내는 인사와 퍼포먼스를 찍은 것으로 아쉬움과 눈물과 사랑과 익살이 진하게 베어 있었다.
직원들의 석별의 정 동영상 상영 후 축사 순서로 넘어갔다.
맨 먼저, 내가 본인께 축사를 직접 요청한 부산지역의료원장 홍관희 교수.
그 분은 외과 의사로서 나이는 나보다 4-5년 위이나 내가 주니어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라 원내에서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분이었다.
두 번 째로는 의과대학장 이종태 교수.
그는 이 대학 출신으로 예방의학 전공이라 나와는 평소에 잘 교류가 없었던 바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는데 내 책의 내용을 인용해 가며 잘 이어갔다.
세번 째로는 내가 초빙한 유일한 외빈(外賓)이신 前 연세대 영상의학과 이종태 교수.
그 분은 한국 중재적仲裁的 초음파학(Interventional ultrasound)의 아버지로서 정년퇴임
후 분당 차병원에서 아직까지도 정열적으로 일하고 계시는데 주로 나의 국제학회에서의
활약상에 대해 말해 주셨다.
내 외빈 교수들의 축사가 끝나고 다음으로 등단한 사람은 전공의 1년 차 이지윤 선생.
이런 자리에서 제자가 하는 축사는 고년차(高年差) 의국장이 하는 것이 관례이나 그동안 가르쳐 보니 하도 똘똘하고 영특하여 내가 지명하여 시켰는데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기라성 같은 교수님들 다음으로, 이제 과에 발들여놓은 지 채 1년도 안된 일년차가 퇴임식에서 축사를 한다는 부담스러운 자리임에도, 전혀 떨거나 주눅든 기색없이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평소 존경해왔던 한상석 교수님의 정년 퇴임식에서 축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비록 오랜 시간 교수님을 뵙진 못했지만, 교수님의 마지막 제자로서 느꼈던 부분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초음파 파트를 도는 첫날
막연한 두려움 반, 대가 이신 교수님께 직접 가르침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 반으로 교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의 방문을 열고 인사를 드렸을 때 교수님이 처음 하신 말씀은 자기소개를 다시 해봐라 였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며 자기소개의 정석에 맞게 나이, 학교, 졸업 연도를 차례로 말한 저에게 교수님은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기소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첫날부터 꾸중을 들었다는 생각에 시무룩하게 나가려던 저에게 교수님은
“앞으로 나에게 욕을 많이 들어먹을 텐데 네가 미워서 하는게 아니니까 마음 상해하지 말아라” 라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 막연한 두려움과 울적했던 마음이 사라졌고 이후 두 달 간의 수련 동안 저의 미숙한 점을 지적해주실 때에도 혼이 난다는 생각보다는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감사히 수련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한상석 교수님’ 이라는 말을 들으면 앞으로도 제 머릿속에는 어려운 케이스 환자의 초음파를 보고 혼이 날까 두려워하며 교수님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항상 인자하게 “그래, 어떤 케이스냐?” 하며 사진을 보고 함께 환자에게 가던 교수님의 모습이 떠오를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무수히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며 항상 부족한 점을 교정해주는 것이 지루하고 지치실 법도 한데 단 한번도 왜 이렇게 잡았느냐고 화내지 않으시고 이건 이렇게 잡는 것이 좋다고 다정히 교정해주시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깊었고, 앞으로 제가 인생을 살아갈 때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이 없는 초음파실이 상상이 되지 않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배움의 자세, 그리고 의사의 자세를 기억하며 멋진 영상의학과 의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교수님, 다시 한번 영광스러운 퇴임을 축하 드립니다. 저희에게 지식의 등불이 되어 주신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 인생의 등불이 되는 작가가 되어 주길 바랍니다. 그 동안 감사했
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요.”
2018-09-30
will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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