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조카의 부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쉽게 생각했다.
메디칼 전문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일반영화에서 종종 보는
의료와 관련된 말도 안 되는 상황설정,
병명과 맞지 않는 증세,
병원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병원장면 등
전문가인 의사의 눈에 비치는
코메디같 은 황당 시츄에이션 정도만
좀 바로 잡아주면 되지 않겠나?
하는 정도로 말이다.
헌데
막상 대본을 받아보니
이제 내가 황당해 진다.
첫 회부터 바로 교통사고다.
주인공인 한류 스타가
건널목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음주운전 차량에 치어 심하게 다친다.
119에 실려 병원 응급실로 가고
거기서 바로 수술실로 가서 여러가지 수술을 받는 등
상황은 숨가쁘게 이어지는데
그에 따른 병명이라는 것이
한 둘이 아니에요.
1. 대퇴부와 무릎, 팔목 등에 복합 골절로
핀 고정술 시행
2. 다발성 장기 손상과 복강 내 출혈로
비장 절제술 시행
3. 수술 도중에 저혈압성 쇼크로 인한
심정지가 한번
4. 두개골 골절로 인한 뇌출혈.
5. 뇌손상에 의한
신경학적 이상 증세 및 기억상실증
6. 회복기 재활치료 및
더 전문적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이런 병원 상황만
드라마 첫 회부터 5회 초까지
죽 이어지는지라
분량도 만만찮을 뿐 아니라
너무 많은 과가 개입이 되다 보니
복부만 전공해온 영상의학 전문의 입장에선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대충 해 줄 수도 없고…
결국 방법은
각과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수 밖에.
우선 119 차량 내 및 응급실 장면에선
1) 응급의학과
수술실 상황에선
2) 정형외과
3) 일반외과
두개골절 및 소량의 뇌출혈에 대한 치료는
4) 신경외과
병실에서의 신경계 이상증세 및 기억상실증에 대해선
5) 신경과
6) 정신과
재활치료에 대해선
7) 재활의학과
그 사이사이 필요한 영상검사에 대해선
8) 영상의학과
결국 나 이외에
일곱 개 과 전문의의 자문이 필요하다.
하여
각과 교수들 명단을 앞에 놓고
내가 제일 마음 편히 부탁할 수 있는 사람 7 명을 골랐다.
이럴 땐 나 많은 값, 33년 터줏대감 값을 톡톡히 한다.
다들 내 제자 아니면 대학 후배들이다 보니 못 한다 소리도 못하고.
그 때부터
한 회 한 회 대본이 넘어올 때마다
해당과 교수들에게 대본을 보내고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의과대학 교수란 게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바쁘다.
게다가 임상과의 경우
외래를 보고 있을 때나 회진 돌 땐
환자 보는데 방해될까 봐
전화하기가 좀 거시기 하고
수술실에 있을 땐 아예 연결이 안되고
그러다 보니
같은 병원 내에서도 전화 한 번 연결하려면
시간 차를 두고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야 하니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이런 우여 곡절 끝에
한 장면에서 보이는
상황 설정 하나 하나
쓰는 약물 하나 하나
의료진이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
배우들의 증세 표현까지
세밀히 살피고 고쳐서 무사히 끝냈다.
그 후 명절 땐
그 동안 도와준 각 과 교수들에게
감사의 선물을 다 돌렸다.
그리고 나에겐
그 드라마 첫 회부터 38회까지
Ending credit에
의료자문 'HAN SANG SUK' 이란
내 이름 석자가 올라가는
대가가 주어졌다.
수많은 이름 자막 중에
(이렇게 이름 많이 들어가는 credit은 처음 봤다)
앞에서 15번째
그 중에서도
한 화면에 사람이름 몇 명 안 들어가는 곳에
그 중에서도
제일 눈에 뛰기 쉬운 맨 마지막에
배치해 주었다고
조카가 생색을 낸다.
(위의 이미지를 클릭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보시길)
이래서 영화나 드라마는 끝까지 봐 주어야 한다.
인내심 단련도 할 겸.
2017-01-21
Revised 201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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