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살며 생각하며(006)– 시무식 건배사

白鏡 2017. 1. 3. 14:44


2017-01-02 월요일


오늘은 2017년 새해 첫 출근이다.

그리고 과시무식(科始務式)

초음파실에서 열린다.

 

거기서 나는

신년 단배사(團拜辭) 마지막 순서로

건배사를 해야 한다.

 

나이가 육십을 넘어가다 보니

년말 년시에는 건배사 하기 바쁘다.

 

지난 년 말에는 일곱 군데서

송년사 내지는 건배사를 해야 했다.

 

그런데 내 성질 상 똑같은 건배사를

이곳 저곳에서 써 먹지는 못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이것도 은근히 스트레스다.

 

바로 나흘 전 과송년회에서

100명이 넘는 직원들 앞에서

송년 건배사를 했는데......

오늘은 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완벽주의 성향의 내 성정으로는

집을 나설 때 쯤이면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어야 하는데

 

오늘 따라 왠 일인지

도무지 화두(話頭)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희안한 것이

전혀 걱정이 안 된다 점이다.

 

무슨 말을 하지????

광안대교를 넘어가도 감감 무소식이고

황영터널 들어가도 생각이 안 나다

터널을 나오는 순간

번쩍 시 한 편이 떠 올랐다.

 

옳거니!!!

 

# 8:30 AM, 시무식장

초음파실 통로를 따라

긴 테이블 위에

커다란 케이크, 과자, 및 음료수가 놓여있고

 

그 주위를 의국원들과(레지던트 및 교수들)

부서장급 직원들이 둘러섰다.

 

먼저

과장 및 기사실장의 신년인사가 있고 난 후

마지막으로 나의 신년 건배사 차례가 되었다.

 

여러분,

오늘은 제가 한시(漢詩)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이 시는 지금껏

서산대사가 남긴 선시(禪詩) 중 하나로

알려져 왔습니다만

실은 이양연이란 분의 야설(野雪)이란 시이지요.’

 

그리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아래와 같은 시 한 수를 읊어갔다.

 

'눈 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에는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내가 밟아 간 이 발자국은

분명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터이니'

 

설명을 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첫째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관한 것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지요.

 

넓은 들판이

온통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여 버리면

길이고 이정표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겠지요?

 

이런 곳을 통과하는 내가

똑바로 걸어가지 않고

이리 저리 발걸음을 어지러이 걸어간다면

 

내 뒤에 오는 사람은

무얼 보고 길을 가겠습니까?

 

바로 내가 남기고 간 그 발자국을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오늘 날 우리나라가 도대체 어쩌다가

외국인 앞에 차마 얼굴 들고 못 다닐 정도로

부끄러운 나라가 되었습니까?

 

그건 바로

국정을 책임 진 자들이

원칙을 지 마음대로 무시하고

마치 미친년 널 뛰듯 어지러운 발걸음으로 

온 데 똥칠갑하고 다닌 결과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직장에 오면 각 파트의 장들이요

집에 가면 가장이거나 부모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앞 모습을 보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뒷 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지요.

 

우리 모두 솔선수범 합시다.

 

올 한 해 우리가 걸어갈 길은

지난 해보다 더 많은 눈이 쌓인,

아무런 이정표도 보이지 않는

참으로 막막한 들판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이럴수록 정도(正道)로 걸어갑시다.

 

그노무 편법(便法),

야이 썅!, 제발 좀 때려치우고

한 걸음 한 걸음

바른 걸음으로 바른 길을 갑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 오늘 건배구호는

'답설야 중거'입니다

 

다들 음료수 잔을 들고

내가 '답설야!' 하면

'중거!' 하고 힘차게 외치기요.

 

~~-설야!

 

중거~~~~~~~’

 

# 참고

 

 [踏雪野中去]

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我行蹟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이 시는 백범 김구선생의 애송시로서

지금껏

서산대사의 '답설야중거'로 알려져 왔고

나 역시 그렇게 알고 외워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시는

조선 정/순조 때의 시인 임연당(臨淵堂)

이양연(李亮淵·1771~1853)선생의 작품으로서

 

그의 시집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에 실려있고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이양연의 작품으로 올라 있다 한다.

 

그 시의 제목과 원문은 다음과 같다.

 

[]

穿雪野中去 천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我行跡 금조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여기서 원작인 야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의 차이점은

글자 두 개가 다르다는 점이다.

 

첫 행에서

밟을 답() 대신 뚫을 천(穿)으로

셋째 행에서

금일() 대신 금조()로 되어있는데

 

내가 원작에 충실하지 않고

편작(編作)이라 할 수 있는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에 충실한

번역을 한 이유는

 

行跡 '발자국'으로 의역(意譯) 했을 때

전반적인 문맥 상

눈 덮인 들판을

뚫고 지나간다(穿雪野)는 표현보다는

밟고 지나간다(雪野)는 표현이

보다 더 매끄럽고

 

오늘 아침()이라고 한정 짓기 보다는

그냥 오늘()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넓은 시간적 여유를 두는 것 같아

 

원작(原作)보다는 편작(編作)

더 선호하였다.

 

때로는

편곡한 노래가 원곡보다 더 멋지게 들리는 것처럼....

2017-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