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경해석

로마서 10-11장

白鏡 2007. 4. 3. 14:40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성경]롬 10:2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열심은 바른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현대인의성경]롬 10:3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며 의롭다고 인정받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현대인의성경]롬 10:4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시려고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10:6-8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표준새번역]롬 10:6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 의를 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 말아라.(그것은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또 누가 지옥에 내려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도 말아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는 것이다.)"


[NIV]롬 10:6

But the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says: "Do not say in your heart, 'Who will ascend into heaven?'" (that is, to bring Christ down)

"or 'Who will descend into the deep?'" (that is, to bring Christ up from the dead).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 본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30:12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신30:9-1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9절에 포함되어 있음)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본 절의 뜻은 율법은 우리가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사 45:19)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 우리의 현실 삶에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교훈을 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딤후 3:16, 17).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저기 저곳'(over there)에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곳' (here)에 있다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그것을 지킬 수 없다"든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접할 수 없어서 그것을 지킬 수 없다"라는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어떤 것 인가 하는 것을 신명기에서 모세가 한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의는 결코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고 오히려 아주 간단하고 쉽다는 것이다. 이 칭의와 구원의 길에는 우리를 낙망시킬 구렁텅이나 매듭이 없으며 우리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도 따르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것은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계셨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한 일들을 알아보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곳에 가지 않고도 의롭다 하심을 받고 또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 가까이 계신 것이다(8절). 그 이유는 그 말씀이 우리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즉 우리는 그 말씀을 매일 입으로 읽고 있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다.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해야만 했었다. 즉‘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롬10:5)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5) 하였다.

그러나 복음은 그 일의 대부분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구원이 바로 우리 문 앞에 이르렀다는 것을 밝히 드러낸다.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로 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는 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어지고 또한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어졌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바울은 다시 한번 바벨론 포로 생활 동안 황폐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로써 그 자신의 이야기를 확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사 52:7의  인용구절로서 원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왔다는 기쁨과 평화의 선포였다.

사52;5-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 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알리라 곧 내니라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을지어다 너의 파숫군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음의 전달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왕 고레스 치하(治下)에서부터 구출을 받은 것은 모세에 의하여 애굽왕 바로의 치하에서 구출을 받은 것처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출 받는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보다 완전하고 큰 구원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리라는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다는 메시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인 것이다.


10: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NIV]롬 10:16

But not all the Israelites accepted the good news. For Isaiah says, "Lord, who has believed our message?"


유대인들은 전파된 복음을 대부분 믿지 않았다. 바울은 이것을 완곡어법(litotes)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즉 그들 중  일부만이 복음에 순종하였다는 의미이다(사 53:1;고전 10:5).

   이사야가 가로되...누가 믿었나이까 - 바울은 사 53:1(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확증하고 있다.

바울이 앞 절에서 인용한 사 52:7과 본절에서 인용한 사53:1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고난받는 종에 의한 구원의 메시지가 거부되리라는 사실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말

씀은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예언하는 구절로 널리 사용되었으며(11:8) 친히 예수께서도 공생애 동안 사역하시면서 그 백성이 그를 메시야로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기도 하였다(Bruce).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NIV]롬 10:17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바울은 결론적 접속사 '그러므로'를 사용하여 그의  논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는 믿음에 대해서 결론짓기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온다고 정의한다.

'들음'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코에스'(*)로 '듣는 행위'(act of hearing)나 '들려 오는 것'(that which is heard)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절(16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할 때 '전하는 바'(아코에)와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앞 절과 차이점은 전자는 수동태로 '들려진 말'(was  heard)의 의미로 쓰여진 반면에 본 절에서는 능동태로 메시지를 '들음'(hearing)의  의미로  쓰여졌다(Hendriksen).


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바울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불신앙에 대한 이스라엘의 변명의 소지를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다. 즉,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믿음을 얻게 되는 '들음'(hearing)의  기회가 이스라엘에게는 가장 확실하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소리가...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 바울은 그의 이러한 논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시 19:4을 인용하면서 복음 전파의 편만성(遍滿性)을 주장하고 있다.

시19:1-6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복음이 전 세계에 완전히 전파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바울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한 초점은 종말론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복음 전파는 궁극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당시나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이 매우 신속하게 편만히 전파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5:22-24;요 12:19;행 2:41, 47;4:4;17:6;빌 1:12, 13;골 1:6).


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바울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깨닫지 못했으므로 거부했다는 반문이 나올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반박을 예상하여 앞절에서의 '들음'(hearing)에 관한 질문에서 전환하여  이제 '앎'(knowing)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거절한 것처럼 복음의 의미와 불신앙의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절하였다(Lenski). 그러므로  바울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복음에 대한 앎의 부족이나 깨달음의 결여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Harrison).

결국 이  말씀이  암시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그들이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으려 하는  마음이  없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Hendriksen).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 이는 신  32:21의 인용으로 이 구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모세의 노래 중 일부인데,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예언으로 많이 인용되었다(11:11).


신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표준새번역]신 32:21

우상을 섬겨서 나를 격분시켰고, 신이 아닌 것들을 신이라고 섬겨서 나의

질투에 불을 붙였다. 그러니 이제 나도, 내 백성이 아닌 딴 백성을 내 백성으로

삼아서, 그들의 질투심에 불을 붙이고, 어리석은 민족을 내 백성으로 만들어

그들을 격분시키겠다.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사악성을 질책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질투를 야기시키는 어떤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 일은  미련한  백성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백성  아닌  자'(* 에프 우크 에드네이)와 '미련한 백성'(*에프 에드네이 아수네토)은 다같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단절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또한 어리석은 민족들이었다(Bruce).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용을 베푸셔서 그가 친히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존귀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시켰다.


10: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나타났노라 - 이 말씀은 사 65:1의 인용으로 분명히 앞 절(신 32:21)에서 선포된 내용을 더욱 강하게 확증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까지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철저한 불순종을 증거하고 있다. 

사 65: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현대인의성경]사 65:1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묻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가 나를 나타내고

나를 찾지 않던 사람들에게 내가 발견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않은 나라에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 하였다.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어 정의하기를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은 자들'이라 하였다(Dunn). 그는 이방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틀에 박힌 멸시와 배척, 자기 우월주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이방인들마저도 복음을 듣고 순종하여 구원이 임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불순종함으로 구원을 거절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께 구하지도 문의 하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가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의 기쁘시고 선하신 뜻대로 구원을 베풀 수 있는 주권적인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Hendriksen, Calvin).


10: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 - 앞 절에서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복음을 순종한 사건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사 65:1)을 통해서 인용하였다. 이번에는 역설적으로 사 65:2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사 65: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현대인의성경]사 65:2

내가 하루 종일 팔을 벌리고 내 백성을 맞을 준비를 하였으나 그들은 거역하며

자기들 멋대로 악한 짓을 하고 있다.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베푸셨는가를 탄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종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홀렌 텐 헤메란'(*)은 시간의 범위를 나타내는 목적격으로 '매일'(Michel), '지속적으로'(Cranfield)라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다(Dunn). 또한 '손을  벌렸노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여세페타사 타스 케이라스'(*)로 부성애(父性愛)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의 품에 정답게 안아 주기 위해서 손을 벌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내와 사랑의 손을 벌리고 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눅 15:20).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에게 돌아와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게 하려는 뜻을 가지고 끊임없이 그의  백성을 찾고 또 손을 뻗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참히 거절하고 말았다(Harrison).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自招)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은 완전한 이스라엘의 책임인 것이다.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들어 이스라엘이 결코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답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손인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버림받지 않았다는 하나의 산 증거이다.

예전에 그가 복음을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갈 1:13,14; 딤점 1:13-15)은 이스라엘이 가진 불신앙(10:21)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실은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미리 아신 자기 백성 - 몇 명의 주석가들(Origen, Augustine, Chrysostom, Luther, Calvin 등)은 이 말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은 1절에서와 같이 유대 민족, 곧 메시야의 구원과 관련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암시한다고 봄이 타당할 듯하다(Meyer, Godet). 예수와 동시대에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배척(排斥)했다. 이러한 민족적 불신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신다. 그들의 눈이 열려 그들의 메시야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마침내 메시야를 믿고 구원받게 될 것을 미리 아시고 계신 것이다.

   저가...송사하되 -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완전히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모습(왕상 19:10,14)을 목도한 엘리야는 자신의 민족을 하나님 앞에 송사하며 멸망시킬 것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엘리야의 기도는 민족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자신의  민족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중하게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Calvin).

(왕상 19:9-10)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1: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바알에게 - 그 당시 페니키아인들에게 '바알'은 태양을 상징하는 남신(男神)으로, 아스다롯(Astarte)은 달(月)을 상징하는 여신(女神)으로 간주되었다.

   칠천 - 이 숫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도 그러하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마13:21;막 6:44). '7'은 완전수를 의미하는 것이므로(출 25:37) 7천이란 숫자는 영원 전부터 구원을 얻기로 선택된 엘리야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완전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보호 받고 있었음을 상징한다.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

있느니라


   남은 자 - 바울은 엘리야 시대의 상황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시키면서 그때에 남은 자 칠천명이 있었던 것같이 자신의 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다고 하는 결론을 도출(導出)하고 있다. 바울 주장의 요지는 아무리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불신과 배교가 만연했다하더라도 '남은 자'가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사랑하셔서 택했다고 하는 것이다. '남은 자'사상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먼저 창세기에 살펴보면, 노아의 때에 소수의 택함 받은 자만이 구원을 받았다(창 6:1-8; 눅17:26,27; 벧전3:20). 롯의 때에도 그러했다(창 19:29;눅 17:28, 29). 이사야 시대에는 그루터기와 같은 남은 자들이 있었다(사 6:13;10:32). 이 외에도 구원은 선택된 남은 자들의 것이라는 사상이 구약 여러 구절에서 발견된다(사 1:9;11:11, 16;렘  23:3;31:7;욜 2:32 ; 암 5:15;미 2:12;4:5-7;7:18;습 3:13). 특별히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은 그  이름 자체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으로서 구약의 남은 자 사상을 대변해 준다.


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공동번역]롬 11:16

떡 반죽에서 떼낸 첫부분을 하느님께 드리면 그 반죽덩어리 전체도 거룩합니다.

또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다 거룩합니다.


[표준새번역]롬 11:16

맏물로 바치는 빵 반죽 덩이가 거룩하면 남은 온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합니다.


[현대인의성경]롬 11:16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면 떡덩이도 거룩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합니다. 


[NIV]롬 11:16

If the part of the dough offered as firstfruits is holy, then the whole batch is holy; if the root is holy, so are the branches.


†dough [dou] n.

U 굽지 않는 빵, 가루 반죽; 반죽 덩어리(도토(陶土) 따위);


 batch [bætʃ] n.

① 한 벌; 한 묶음; 한 떼, 일단(一團); 〖컴퓨터〗 묶음, 배치.

② (빵·도기 따위의) 한 가마, 한 번 구워낸 것.

┈┈•a ∼ of books 한 묶음의 책.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 이러한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대표성을 의미한다. '처음 익은 곡식가루'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파르케'(*)는 '최초의 것'이라는 의미로 제사에 있어서  전체 큰 덩이에서 일부를 떼어 내어서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이것은 민15:17-21에 나오는 제사의 규례에서 온 것으로 떼어 낸 부분이 원덩이를 대표한다는 개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곡식인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다. (2) 거룩성을 나타낸다. 첫 열매가 전체 떡덩이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이다(Barmby).

결국 이스라엘과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조상들이 거룩했으니 남은 그의 자손들도 거룩하다는 의미이다.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감람나무(Olea europaea)는 팔레스타인의 중요한 나무작물 가운데 하나였다. 감람열매는 절여서 먹기도 하였고 기름을 짜서 더욱 가치있게 사용하였다.
감람유(올리부기름)는 다양하게 요리에 사용되었으며 또한 등불의 기름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에서는 피부연고제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성경에서는 사람을 특별한 직무에 세울 때(왕과 제사장 등) 그 머리에 붓는 기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때에 사용하는 거룩한 기름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상징하였다


감람나무(橄攬):Olive 


[히] tyIz"(zayith) [그] ejlaiva(elaia)

[영] 성서에있어서 감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자이스]는 올리브나무와 그 열매를 가리키고 있다. 노아의 방주에서 날려 보낸 비둘기가 물고 온 것이 이 올리브의 잎이었고(창 8:11) 이것은 평화의상징으로 되고 있다. 올리브는 서아시아 원산으로 일찍부터 지중해 연안에 이식되어 올리브는  무화과와 함께 지중해적 특징의 과실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가장 귀중한 과수의 하나로 되고 (출23:11,27:20,30:24, 레24:2, 신6:11, 28: 4 기타) 평야에서는 특히 큰 숲을 이루었다(대상 27:28). 옹이가 많아서 울퉁불퉁 하게 된 줄기와 은색으로 빛나는 잎은 팔레스티나의 특징 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야생 올리브가 높이 2m 가량 자랐을 때 그 줄기를 베고 좋은 올리브의 가지를 이에 접목하는 것이 보통이다.

바울은 올리브의 노수(老樹)를 젊게 만들기 위해 참 올리브 나무에 야생 올리브를 접목하는 일을 인용하고 있다 (롬 11:17). 이 역접목(逆接木)의 습관은 팔레스티나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마도 바울은 이방인 교회의 희망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표현을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장은 더디어 10-14년으로 결실을 시작하여, 30년 이상 되어 완전한 수확이 얻어진다. 30-40년 수령의 나무는 높이 7m이상 자라 1년 간격으로 한 나무에 120kg의 과실이 달리고 이것은 25ι의 올리브유(-油)가 채집되는 양이다. 9, 10월에 익어 자색으로 되고, 올리브유를 짜낸다(출 27:20). 또한 생과는 소금에 절여 식용한다. 목재는 황색으로 다색(茶色)의 나뭇결이 있고, 견고하여, 닦을수가 있어서, 여러가지 공작에 사용된다(왕상 6:23,31-33).  올리브 열매는 식용되는 외에도, 그 열매에서 짜낸 기름은, 관제, 약제(눅 10:34), 식용, 등화(마 25:1이하)에 씌어졌다. 제사장은 이 정결한 기름에 의해 성별되고(출 30:25,→레 4:3, 8:12, 30, 시 133:2참조), 왕은이것에 의해 기름 부어졌다. 주는 메시야(기름부음 받은자)로 불리웠다. 올리브는 변성, 축복, 미의 상징으로 되고(시 52:8,128:3,렘 11:16,호 14:6), 성서 이외에서도 올림픽 경기에서 승리자의 관에 잎이 씌어지고 있다.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 돌감람나무는  야생  감람나무로서 (1)원래부터 돌감람나무로 자란 것과 (2) 원래는 좋은 감람나무였으나 주인의 손질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이 있다. 통상적으로 감람나무를 접붙이는 방법은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는 것인데 본문에서는 이를 거꾸로 비유한다. 이처럼  참감람나무의 가지 일부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였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방인이 원가지가 아님을 명백히 한다. 아마도 바울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의 뿌리에 연결되어 좋은 진액을 받아 품질이 낫게 변화되는 것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Murray). 이러한 접붙임으로 원가지와는 전혀 무관하던 돌감람나무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동일한 특권을 누리게 된 것이다.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 이방 그리스도인도  이스라엘 족장이 누렸던 구속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액이라기보다는 그 뿌리이다. 즉 이스라엘과 무관했던 이방인이 참 이스라엘에  접붙임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12족장과  맺은  구원의  언약과  연관된다

(Hendriksen, Lenski). '참감람나무'는 16절의 '처음 익은 곡식'과 통하는 것으로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모든 혜택의 근원(根源)을 상징한다. 이처럼 이방인과 유대인이 모두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현대인의성경]롬 11:22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엄하심을 생각하십시오.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엄하게 다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계속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으면 여러분에게는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여러분도 잘리게 될 것입니다.


11:25-6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현대인의성경]롬 11:25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만하지 않기 위해서도 한 가지 알아야 할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방인의 수가 다 차기까지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신앙을 고집하겠지만 그 후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충만한 수'에 대해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고 한다거나(공동번역), 구원받을 자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는 논리를 여기에 도입시켜버리는 것은 바울의 정신을 오해하고 본 구절이 다루고자 하는 핵심을 흐려지게 할 뿐이다(泉田昭). 이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라'는 종말 현상에 대한 예수의 말씀(마 24:14, 막 13:10)에  근거한 것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시점을 의미하는  것이며(Godet) 선택된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말하는 것이다(Meyer).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 '완악해졌다'는 표현은 7절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17절의 비유에서는 '가지 얼마가 꺾여졌다'고 암시되었다. 본절에서는 '더러는'이라는 표현이 추가되었다. 이 '더러'(*메루스)라는 낱말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1) 칼빈(Calvin)은 이것이 단순히 시간이나 숫자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정도'(measure)의 의미로서 듣기 좋게 수식하려 했을 뿐이라고 한다.  (2) 혹자는 이것을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시간적으로 충만한 숫자가 들어오는 기간동안만 제한적으로 지속된다는 의미라 한다(Godet, Harrison). 그러나  본 구절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집중되어 있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언제 완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 계획이므로 알 수 없다. 결국  칼빈의  견해대로 바울은 본 구절에서 숫자나 시간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완악하게 된 것은 이방인이 구원얻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고 결국 이스라엘도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1:26-27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본 구절은 사 27:9의 인용이다.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 죄를 없이 함을 얻을 결과는 이로 인하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로 부숴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으로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바울은 이 구절을 자유롭게 고쳐서 인용했으며 여기에는 렘 31:31-34과 미 5:2 등에서 볼 수 있는 사상도 깃들어 있다(Harrison).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때 얻게 되는 복스러운 은혜를 말하고 있다.

본 구절 역시 70인역의 번역을 따랐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에서 돌이키지 못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회심이 어려운 이유는 그 백성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70인역은 새로운 언약을 통해 저희 죄를 값없이 처리해 주겠다고 선언한 데 강조점을 두었다.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사27:9의 예언을 보면, 여러 우상이 진멸될 때 비로소 야곱의 불의와 죄가 속함을 받을 것을 말한다. 이러한 약속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70인역의 번역을 따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완성된 구원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스'(*'죄들')는 70인역에는 단수(*하마르티안)로 되어있으나 복수로 고쳐 인용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개개인이 범한  모든 죄악을 총칭하고 공동체 전체가 범한 죄 모두를 강하게 시사하는 표현이다.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 바울은  이러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새언약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  새  약은 렘 31:31에서 제시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옛 언약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행되어 하나님의 법이 백성들 속에서 작용하고 마음에 기록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완악하여지긴 했어도 대부분의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제시한다. 결국 바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한 언약의 개념이 보다 구체화되어 계속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Dunn).


11:28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표준새번역]롬 11:28

복음을 따라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은 것을 따라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11: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표준새번역]롬 11:30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NIV]롬 11:30

Just as you who were at one time disobedient to God have now received mercy as a result of their disobed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