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경해석

로마서 8장 : Life in the Power of Holy Spirit

白鏡 2007. 3. 19. 14:54
 

8: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행하기를 소원하지만 항상 죄의 법이 성도의 육신을 사로잡아 마음이 원하는 바를  못하게  한다. 이로 인해 성도는 심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2절에서 34절에 걸쳐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표준새번역]롬 8:3

육신이 연약하므로 율법이 할 수 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자기의 아들을 죄 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육신에다 죄를 정하셨습니다.


[현대인의성경]롬 8:3

우리의 타락한 성품 때문에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우리의 죄값을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NIV]롬 8:3

For what the law was powerless to do in that it was weakened by the sinful nature, God did by sending his own Son in the likeness of sinful man to be a sin offering. And so he condemned sin in sinful man,


* 위의 절을 쉽게 풀어서 번역하면 


육신이 연약하므로 율법이 할 수 없던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속죄의 제물로서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우리의 죄 값을 그에게 담당시킨 것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 율법은 죄에게 종 노릇하는 육신으로 하여금 율법 자체의 요구를 이루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율법은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보겠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7:24과 같은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다.

  

   죄를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 하마르티아스'(*)는 영역 성경에서 '속죄 제물로서'(as an offering for sin, NASB)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서'(to be a sin offering, NIV)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시지만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으사 인류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의미이다.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NIV]롬 8:4

in order that the righteous requirements of the law might be fully met in us, who do not live according to the sinful nature but according to the Spirit.



   육신을 좇지 않고 - 여기서 '육신'은 정죄된 육신을 가리킨다. 이미 정죄된 육신을 좇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며(13절) 육신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며 또한 인생의 목표를 육신을 만족시키는 데 두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성도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육신에게 져서 비참함을 당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즉  바울이 지금 경계하고 있는 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육신에 져서 죄의 법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는 자 곧 불신자들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 성도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 연약한 육신으로 인하여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그러나 성도는 육신을 좇는 자가 아니라 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이다. 이 영의 원리에서 가장 근본된  것은 복음이며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며 양자됨과 기업을 이어받는 것에 대한 보증을 받는다. 따라서 본 구절은 매우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성도에 대한 것이다.

   율법의 요구 - '요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마'(*)는 '의로운 행동', '계명'(NEB), '규칙'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의로운 요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디카이오마'를 '의로운 요구'(the just requirement)로  해석하기를 좋아한다(Lenski, Hendriksen, Murray, Stott, Black, Harrison, Barmby). 사실상 본 구절에서 '디카이오마'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율법'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문장이 매우 어색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절에서는 '디카이오마'가 '의로운 요구'로 번역되는 편이 매우 자연스럽다.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죄의 법아래 사로잡혀 있는 육신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도 맺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육신이 도모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을 거부한다.

   할 수도 없음이라 - 자연인의 전적 불능(不能)과 전적 부패성을 보여준다. 오직 성령에 의해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과 의지를 가질 수 있다.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 예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말씀하시고 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고 가르치심으로써 사람이 믿음으로 '영생'을 이 땅에서부터 소유하게 됨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도 이신 칭의(以信 稱義)를 근거로 성도의 영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5:18;6:11). 그러므로 성도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다.

몸은 죄의 도구가 된 육신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으나 영은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로 인해  살았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의미는 1절의 '정죄함이 없나니'란 말씀과 2절의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즉 성도가 여전히 정죄받는 신분이라면 아직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신분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정좌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인 '영'은 죄의 포로가 된 육신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을지라도,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의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이다.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빚진 자로되 - 혹자는 성도가 성령께 빚진 자라고 해석하고  있다

(Calvin). 또 다른 학자는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도록 이미 받았고 받고  있으며 장차 받게 될 모든 축복과 비교할 때 성도가 빚진  자라고  설명한다(Hendriksen).  이처럼 '빚진 대상'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대상을 바울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런데 본절의 '빚진 자'를 '성령'께 빚진 자로 해석하게 되면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된다. 오히려 성도는 구원의 전 과정에 있어서 성삼위 하나님께 빚진 자다. 특히 1:14에서 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대하여 빚진 자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하여 빚진 자라는 의미를  강

하게 시사한 것이다.


8: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NIV]롬 8:13

For if you live according to the sinful nature, you will die; but if by the Spirit you put to death the misdeeds of the body, you will live,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
13절은 12절에서 명백히 밝힌 부정적인 표현과 또 함축적인 의미 등 양자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13절은 육신을 따른 생활과 성령을 따른 생활의 반대적인 문제들을 제시함으로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여기 불가피하고도 변할 수 없는 결과가 뒤따른다. 이 결과는 하나님 자신도 파괴하지 아니하시며 또 파괴하실 수도 없다.하나님께서는 육신에서부터는 구해 주시지만, 육신 안에서는 구해 주시지 않으신다. 바울은 지금 여기서  그들을 향해 "만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 제시된 죽음은 가장 넓은 의미의 범위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이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인 궁극적으로 나타나는 죽음에까지 미친다. 신자의 궁극적 구원의 교리와 이 사실은 모순되지 않는다. 죽음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육신의 생활에서 구출을 받아 그것을 단념하는 일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앞서 말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한 경우의 결과처럼, 이 경우의 결과도 불가피하며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 사도는 "너희가 성령대로 살면"(if ye live after the Spirit)이라는 식의 표현을 나타내지는 아니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사도는 보다 구체적으로 부정적인 공식을 쓰고 있다. 즉 "만일 너희가 영으로써(by the Spirit)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했다. 이것은 사도의 사상의 실제적인 내용을 말해주며, 또 성결은 적극적이면서 동시에 소극적으로 무엇을 부정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진술에 대해 몇 가지 고려점을 필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1) "죽이면"(Put to death)이란 말은 우리 편에서의 활동을 가리킨다. 7:4에서 신자들은 죽임을 당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또 그들이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7:6). 이런 귀절 가운데서는 신자의 수동성이 보인다. 그런데 지금 그의 책임적 능동성은 수동성에 기초하고 있다. 신자가 율법과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다고 하는 것이 신자로 하여금 신자의 지체 속에 있는 죄를 극복해야 하는 필요성에서마저 해방시킨 것은 아니다. 신자가 지체 속의 죄를 극복한다는 것은 필요하며 가능하다.

(2) "몸의 행실," 우리가 몸이라고 부르는 실제를 여기서 말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도 없다(참고 10, 11절). 따라서 사도는 몸에 관련된 죄들을 생각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6:6과 관련해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몸이 죄의 근원이란 것도 아니며, 죽음에 처한 죄들은 그 몸이 집행 기관이 되어 있던 단순히 그런 죄들이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분명히 밝혀진 사실은, 신자들 위에 내려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요구 사항들이다. "몸의 행실"은 죄의 몸의 특징인 행습이다(6:6절 참조). 그것은 신자가 진정 살기 위해서는 신자가 죽여 놓아야 하는 행습들인 것이다(참고, 골 3:5).

(3) 이런 능동성은 성령을 떠나서는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것은 "영으로써"되는 것이다. 신자는 자기가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의 저장소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다. 거룩해지고 또 거룩하게 하는 능동성이 작용되는 것은 언제나 "영으로써"(by the Spirit)되는 것이다.

(4) 죽음이 그러했듯이 영으로써 얻은 결과인 생명도 가장 넓은 의미로 언급된 생명이며, 따라서 이 생명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친교 가운데서 영원히 즐기게 될 영생에까지 미치는 생명이다.


또 다른 정반대의 시각


최후 승리는 성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얻게 해주시는 것이다. 엡 6:10-19에서 바울은 성도가 대적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나열했는데, 그 중에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뿐이다. 만일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본 절을 인간의 노력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쉽게 새로운 율법주의로 빠지게 된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뿐 아니라 교회사 전체에 있어서도 성령의 역사는 성도의 어떤 노력이나 의지 여하에 따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에 따라 나타났다. 그러므로 본 절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에 당연히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란 말씀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7:24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NIV]롬 8:15

For you did not receive a spirit that makes you a slave again to fear, but you received the Spirit of sonship. And by him we cry, "Abba, Father."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 '무서워하는 종의 영'과 비슷한 의미로 딤후 1:7에서는 '두려워하는 마음'(*프뉴마 데일리아스)이 언급되고 있다. 성도를 두렵게 하며 속박하는 것은 율법이다. 

성도는 율법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율법이 주는 두려움과 속박(bondage)에서 벗어났다. 결국 성도는 율법을 통해서 성도를 정죄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신분이므로 결코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는 것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보다 왕과 백성의 관계로 더 많이 이해되었다. 비록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언급되었을지라도 신약 시대처럼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J. Jeremias). 양자(養子)의 원리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그 근원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마 6:9;막 14:36). 그리고 바울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거하심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증으로 인쳐 주시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 -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아멘 아멘...'의 형식과 함께

'아바 아버지'란 용어가 '예수의 고유한 언어 구사 방법'(ipsissima vox Jesu)이라고 주장한다(요 20:11-29 주제 강해 '예수의 언어 사용에 나타난 자기 계시' 참조).

예수는 이와 같은 용어를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셨는데(마 6:9) 이 용어는 신

약 시대의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말로서 '아바'는 어린아이의 언어에서 유래되었다. 탈무드(Talmud)에 언급된 "어린이가 젖을 떼면서 밀맛을 볼 때에  '아바'(*)와 '임마'(*) 곧 '아빠'와 '엄마'란 말을 배우게 된다"란 구절이 그 사실을 잘 암시한다.

그리고 탈굼역(The Targum)도 사 8:4을 "어린이가 '아바'와 '임마'라고  부르

기를 배우기 전에"로 번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바'는 매우 친밀한 언어로  하나님을 경외할 분으로만 알았던 유대인들은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바'로 부를 수 없었으며 기도 형식의 문헌에조차 결코 사용된 적이 없다(J. Jeremias).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양자의 영에 의해서 하나님과 부자(父子)관계 속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아바'란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8:19-21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공동번역]롬 8:19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NIV]롬 8:20

For the creation was subjected to frustration, not by its own choice, but by the will of the one who subjected it, in hope


†frustration [frʌstréiʃ-ən] n.

U,C 좌절, 차질, 실패


   피조물 - 바울은 지금까지 구원의 초점을 인간에게 맞추었으나 이제는 보다 영역을 넓혀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이것은 장차 있게 될 성도의 영광이 성도들뿐 아니라 전체 피조물의 회복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 본 구절은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로서 자기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과 피조물의 회복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즉 피조물들조차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은 (1) 인간의 타락과 함께 피조물들도 그 타락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고  (2) 하나님 자녀가 그 영광을 회복함으로써 피조물들도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Hendriksen).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 인간의 타락은 자기 자신만 허무(虛無)한 데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의 지배하에 있던 다른 모든 피조물까지 허무하게 만들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러한 허무를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전1:1-11;2:11-23).

피조물은 스스로 허무한 데 굴복하지 않았고 인간의 타락에 동참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저주하는 가운데 피조물도 인간과 함께 허무한 데 굴복하도록 명하셨다(창 3:17, 18). 이러한 사실은 본절의 '굴복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타게'(*)가 제 2단순 과거 수동태로서 '굴복을  당하였다'는 의미를 지닌 점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was made subject,  KJV). 

한편 이러한 현상은 만물의 지배자인 인간이 타락하여 그 지배권을 사단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발생케 되는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즉 만물의 대표자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당하는 허무를 그 인간에 종속된 피조물도 함께 당하게 된 것이다.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 피조물들은 각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에 순종한다. 피조물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부패해 갈지라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이 땅에  도래하기를  바라는  '희망에서'(*에프 헬피디)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들도 썩지 않는 영광을 함께 얻게 되기 때문이다.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공동번역]롬 8:23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8:24-25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NIV]롬 8:24

For in this hope we were saved. But hope that is seen is no hope at all. Who hopes for what he already has?

But if we hope for what we do not yet have, we wait for it patiently.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 성도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소망을 가지고 산다. 이 소망은 믿음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소망을 성도에게서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은 오직 믿음뿐이다. 이런 점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표현이나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표현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한편 본절에 '구원을 얻었으매'로 번역된 헬라어 '에소데멘'(*)은 과거 시제로서 성도가 구원을 얻은 것이 이미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중생의 체험으로 죄의 종에서 해방된 성도는 이 땅에서 장차 도래할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지만, 이미 성령의 인치심으로 하나님의 권속(眷屬)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본 구절은 히 11:1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과 잘 조화된다. 성도는 믿음으로 자기가 이미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한다. 비록 완전한 구원이 아직 실체로 나타나 있지 않으나 믿음으로 그 실체(實體)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며 그 실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이처럼 현실 세계에서 장차 이루어질 소망을 믿고 바라게 하는 기독교의 진리는 '보이는 물질만이 실상이요 믿을 것'이라고 하는 유물론(唯物論)과 명백히 구별되는 것이다.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공동번역]롬 8:26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성도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졌다는 인상이 본 절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도를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성도로 선택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서 비롯된다. 또한 본 구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부르심을 입은 자'를 동격(同格)으로 취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이에 대한 헬라어 본문은 '판타 쉬네르게이 에이스 아가돈'(*)으로 직역하면 '모든 것이 선을 위해 함께 역사한다'이다. 즉 만물 또는 모든 일이 선을 목표로 하여 협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본 구절이 나타내는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만물로 하여금 선을 위해 역사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공동번역]롬 8:29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공동번역]롬 8:35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본 절은 시 44:22의 인용문이다.

[공동번역]시 44:22

당신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죽임을 당하며 도수장의 양처럼 찢기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NIV]롬 8:38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demon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or any powers,


  바울은 본절과 39절 상반절에서 어떤 피조물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과 여건도  성도의 압도적인 승리를 방해할 수 없음을 진술하고 있다.

  권세자들(*아르카이) - 이는 본래 바울 신학에서 천사의 한 부류에 속하지만(엡 1:21)  주로  사단의  세력하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들을   지칭한다(엡 2:2;6:12). 그리고 특히 바울은 본절에서 '사망'과 '생명', '현재 일'과 '장래  일'과 같이 서로 대조되는 어법을 구사하고 있으므로 본절의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인 천사와 대조되는 영, 곧 사단에 의해 조종되는 악한 영들을 의미한다.

   능력(*뒤나메이스) - 이 단어에 대해 혹자는 '폭풍, 천둥과  번개, 그리고 지진과 같은 자연의 힘'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Lenski). 혹자는 '능력'이 '천사들'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Calv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