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표준새번역]롬 7: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율법을 아는 사람에게 말을 합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 이 표현은 바울이 법을 아는 자들과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해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Murray). 바울은 오히려 모든 사람이 법을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 표현을 사용했다.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되나 - 고전 7:39에서 바울은 본절과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고전 7:39에서는 '법으로'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본 절에서 이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은 1절에서 3절까지의 비유가 율법 아래 있던 사람이 율법에서 어떻게 해방되느냐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법으로'라는 말이 강조적으로 첨가되어 있다.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 여인이 남편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1) 본 절의 진술과 같이 남편이 죽으면 그 여인은 남편에게서 해방된다.
(2) 여인 자신이 죽게 되면 역시 남편에게서 해방된다.
4절 이하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은 '남편'에 비유되고 있다. 그런데 '율법'은 죽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1-3절의 비유를 문자적으로 적용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굳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여인 자신이 죽음으로써 남편에게서 해방되는 것으로 본문을 고쳐야만 한다.
이렇게 되면 여인에 비유될 수 있는 신자는 그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6:3, 4, 6의 진술과 합치(合致)될 수 있다.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본 절에서 바울은
(1) 결혼 관계에 있는 여인이 그 관계를 지속시키지 못했을 때 '음부'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한 정죄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은 그 아래 있는 자들에게 조금도 자유를 주지 않으면서 그것을 범하는 자에게는 어김없이 정죄하게 된다.
(2) 남편의 법에서 해방된 여인의 자유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본래 성도는 죄의 종이요 율법 아래 있던 자였으나,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은 그것에 대하여 죽는 것뿐이다(4절).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 바울은 율법이 죽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이 죽어야 그 사람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해 죽는 것은 바로 옛사람인 바, 이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 바울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사람은 율법에서 벗어났다. 위의 비유에서는 율법(남편)이 죽는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율법은 죽을 수 없기에 여인이 죽어야 한다(2절 주석 참조). 이 여인도 직접 죽을 수 없고 결국 대신 죽은 자에게 붙어 있게 됨으로써 그 죽음이 인정받게 된다. 그 후에 여인 된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다시 사신자와 연합하게 된다. 여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란 표현은 무엇보다도 결혼 관계의 성립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또한 두 몸이 한 몸으로 연합됨을 가리킨다. 이처럼 바울은 6장에서는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聯合)에 대해 추상적으로 설명했으나(6:3-6). 본장에서는 결혼 관계를 비유하여 보다 구체화 시키고 있다.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맺히게 될 열매에 대한 견해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혹자는 결혼의 비유의 연속으로 보고 결실로서 '자손을 생산하는 것'과 연관짓고 있다(Fritzsche, Reiche). 그러나 이처럼 '열매'를 결혼으로 인한 자손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6:22)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맺는 열매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과 의라고 할 수 있다(Calvin). 즉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의'를 얻고 '거룩'하게 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6장과 본장에서 말하는 '열매'의 본질이다.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공동번역]롬 7:6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계약을 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표준새번역]롬 7:6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얽어 매던 것에서 죽어서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문자를 따르는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현대인의성경]롬 7:6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율법에 대하여 죽고 거기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의한 낡은 방법이 아니라 성령님의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NIV]롬 7:6
But now, by dying to what once bound us, we have been released from the law so that we serve in the new way of the Spirit, and not in the old way of the written code.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 여기서 두 문장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즉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진술은 율법에서 벗어난 방법에 대한 설명이다(Murray).
그러므로 '얽매였던 것'은 '율법'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율법은 사람을 얽매는 것이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죽는 방법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사람의 정욕과 율법이 조화를 이루려면 이처럼 과격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율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대표(代表)로 죽으신 것이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 바울은 '영'이란 용어를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영'을 '성령'으로 해석하지만(Hendriksen, Murray, Stott, Harrison) 그 한 단어로 '영'이란 용어가 지닌 의미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
** 바울이 '영'(프뉴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용례들 **
(1)육신'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8장에서)
이것은 '영'이 죄에 대해서 전혀 배타적임을 가리킴과 동시에 율법에서 벗 어났음을 보여준다.
(2) '영'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갖게 된 '새생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때 에는 '영'이 '성령'과 동일시될 수 있다(8:14).
(3) 본 절에서와 같이 '영'은 '의문'(儀文)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즉 '의문'이 옛 시대의 지배 원리였던 것과는 반대로 '영'은 새시대의 지배 원리이다. 물론 새시대의 지배 원리는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지만 새시대의 지배 원리 자체와 성령은 동일시될 수 없다. 새시대의 지배 원리에 속한 것으로는 '영'과 '복음'을 들 수 있다.
(4) 그리고 성령과 사람의 영이 8장에서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으며,
(5) 고전 6:17에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볼 때 바울이 '영'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에, 어떤 곳에서는 새 생명을 주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새시대의 지배 원리에 대해 적용하기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절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것'(Murray)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새시대의 지배 원리를 따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7:7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표준새번역]롬 7:8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NIV]롬 7:8
But sin, seizing the opportunity afforded by the commandment, produced in me every kind of covetous desire. For apart from law, sin is dead.
죄가 기회를 타서 - 본문은 '죄'(*하마르티아)가 주체로서 인격성(人格性)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기회를'(*아포르멘) 엿보다가 '취한다'(*라부사)는 의미이다. 이처럼 죄가 인격성을 가지고 능동적인 활동을 한다는 표현은 죄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그 유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리슨(Harrison)의 말대로 본 절 배후에 유혹과 타락에 관한 창세기 기사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죄'가 인격성을 가진 주체로 표현되는 것은 사단의 교활한 특성을 반영하고자 한 것이다. 틈만 보이면 달려드는 맹수 같은 성격을 가진 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탐심이 속에서 잠재해 있다가 계명으로 인해서 드러난다'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이미 7절 하반 절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의 마음이 백지와 같음을 전제하고 죄가 계명을 통해 탐심을 유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인간 내부에 있는 탐심이 죄의 요구를 따라 계명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온갖 탐심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처럼 끝없이 유발되는 죄로 인하여 인간은 도무지 살길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 본 구절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4:15)는 말씀과 의미상 같다. 왜냐하면 '죄가 죽었다'(*네크라)는 것은 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에 대한 인식이 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으로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Calvin). 아무튼 본 장에서는 죄 자체는 항상 활동하고 있으나 인간 편에서 법이 없을 때는 그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율법이 죄를 밝히 드러나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이라도 바울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은 율법의 각 조문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누구 못지않게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10:3)사람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바울은 율법에 대한 지식은 있었으나 깨달음이 없었던 것이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 '계명이 이르매'란 표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명을 깨닫게 되매'라는 말로 의역이 가능하다. 그리고 '살아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제센'(*)은 '아나자오'(*)의 부정과거 동사로 본래 '다시 살아나다', '희생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본 절에서는 단순히 '활동하게 되다'라는 의미이다(Hendriksen). 죄가 본래부터 있었으나 사람이 계명에 대해 깨닫기 시작하면 죄가 자기 속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깨달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죄의 요구도 함께 커지므로 죄에 대한 자신감보다는 죄를 이겨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된다
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표현 방법상 본절은 8절과 같지만 내용면에서는 서로 다르다.
8절은 죄를 드러나게 하는 계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본 절은 계명을 통해서 죄가 사람에게 철저한 좌절감을 맛보게 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를 속이고 -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던 바울은 이제 계명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이전과 같이 자신이 죄를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마땅히 계명을 지킬 수 있어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바울은 죄가 계명을 통해서 자기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속임수는 죄가 계명을 통해서 바울로 하여금 죄의식을 갖게 함으로써 '네가 그래도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 ?'고 정죄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와 같은 속임당함에 의한 심한 좌절과 고민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나를 죽였는지라 - 이 표현은 9절 하반절의 '나는 죽었도다'란 고백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Murray).
7:13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은 율법의 기원이 하나님께로서 시작되었음을 가리킨다(Black). 실제로 '신령한'(*프뉴마티코스)이란 형용사는 신약성경에서 세상적이고 육적인(*르키노스) 것과 대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전 2:13, 15;3:1;10:3, 4;12:1;15:44;엡5:19;골 1:9;벧전 2:5). 그러나 율법이 비록 신적인 기원을 가진 신령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닌 약점(弱點)은 아무것도 온전케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히 7:19).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 율법이 신령한 것이었던 점과 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육신에 속한(*사르키노스) 자라고 고백한다. '육신에 속한 자'란 죄에 대해 저항력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바울이 6장에서 이미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육신에 속한 자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율법과 관련해서 볼 때 성도는 항상 육신에 속한 자이며 죄인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의미에서 성도는 육신에 속한자요 죄 아래 팔린 자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 혹자는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라고 주장한다(Thomas).
그렇다면 본 절이 바울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난 고백이 아니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러나 바울은 이신 칭의(3:21-4:25)와 그것에서 비롯된 하나님과의 화해(5:1-21)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함께 거룩(성화)의 성취(6:1-23)에 대해서 논리를 전개해 왔고 본장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에 걸맞는 삶을 살아보려고 시도했으나 다시 율법의 굉장한 벽에 부딪힌 체험을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본 은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겪는 신앙의 갈등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죄 아래 팔렸도다'라는 말은 '죄에서 해방되었다'(6:18, 22)는 말과 대조적인 표현이다. 성도는 이 두 가지 신분을 동시에 지니고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무시하면 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행하는 것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울 자신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뜻하는 바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도의 신앙적인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회의가 찾아들게 되는 시점이 바로 이 때 이다.
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NIV]롬 7:16-17
And if I do what I do not want to do, I agree that the law is good.
As it is, it is no longer I myself who do it, but it is sin living in me.
[표준새번역]롬 7:16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 바울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율법에 따라 의롭고 정당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는 그 원하는 바가 나오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바가 나타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해 내기 위해 바울은 앞에서 했던 말을 다시 조건문 형식으로 반복한다. 동시에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가 제시하게 될 해결책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있다.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 율법은 인간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지켜질 수 없다. 율법을 행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죄 아래 매인 자신의 모습만 발견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의 의지로 도달될 수 없는 지고선(Summum Bonum)이다. 율법은 바울이 원치 않는 바를 행할 때마다 그 자신을 정죄한다. 이때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뉘니데'(*'그러면 이제는')는 3:21의 '이제는'과 같지만 본 절에서는 어떤 주제의 전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면'
또는 '그런즉'을 의미하는 '운'(*)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Barmby).
따라서 15절과 16절에 이어지는 논리의 진전이 본 절에서 제시되는데, 15절에서는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한다는 것을, 16절에서는 이처럼 원치 않는 것을 행할지라도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서술하고 나서 본 절에서는 더욱 분석적이고 세밀하게 이 사실을 말하고자 '그러면 이제는'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한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바울은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행하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죄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비록 죄가 자기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다. 즉 바울은 죄가 기회를 탈 수 있는 불의의 병기로 자기 몸을 죄에게 드렸던 점에 있어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리고 본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려는 자아와 그 자아를 이기고 나타나는 죄를 구분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비록 자기 속에 죄가 실제로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어도 자신의 실체는 이미 의롭다 인정받은 의인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죄를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다.
7:20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 일반적으로 바울은 '법'이란 단어를 율법에 대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본 절에서는 그 뜻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1) 혹자는 이 '법'을 다음에 언급되고 있는 세 가지 법, 곧 하나님의 법(22절), 마음의 법(23절), 죄의 법(23절)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alvin).
2) 혹자는 이 '법'이 '하나님의 법'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urray).
3) 또한 이 주장을 뒷바침하는 해석을 유도하기 위해 '법'이란 단어 앞에 수단을 가리키는 전치사를 써서 '법에 의해서'라는 의미로 의역하는 학자도 있다(Erasmus).
그러나 머레이(Murray)의 주장은 큰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22절과 23절에서 하나님의 법과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닌 마음의 법만 강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대조되고 있는 '죄의 법'도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절의 '법'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우리 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립의 원리를 의미한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19절에서 바울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신의 모순된 행위에 대해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그러한 모순된 행위가 발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 이유는 자신 속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바울은 악을 외부적인 어떤 요인이 아니라 사람 내부에 존재하는 실체(實體)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악은 인간 내부에서 잠잠히 있지 않고 항상 인간의 모든 지체를 지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Hendriksen).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NIV]롬 7:24
What a wretched man I am!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of death?
wretch [retʃ]n.
① 가엾은 사람, 비참한 사람.
곤고한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탈라이포로스'(*)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비슷하게 '심한 고난을 겪는 사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 절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실감나게 표현하여 '비참한 사람'(wretched man, KJV, NIV, RSV)으로 번역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혹자는 바울이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한 것은 절망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심각한 고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Lenski). 그러나 이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지금 바울의 탄식은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지만 항상 실패한 자신의 형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전혀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절망감과 비참함을 탄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고통'이나 '고민' 정도로 '탈라이포로스'를 해석하게 된다면 탄식하는 바울의 심정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바울은 24절의 탄식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라고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본 구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즉 바울은 그토록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구속을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3:21-6:23이 교리적 차원에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준다면 본절은 교리를 현실적인 삶에 적용함에 있어서 자신이 겪은 갈등을 통한 예수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앞에서 계속 진술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고 있지만 본 절은 의미상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즉 같은 표현이 앞에서는(20-23절) 탄식으로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본 절은 진정한 해방의 선포를 위한 내용이다. 즉 이는 탄식이면서도 몸의 구속 곧 진정한 구원을 기다릴 준비를 갖게 하는 내용인 것이다(8:23). 이처럼 본 구절은 앞에서 진술했던 내용을 비참한 현실적 삶을 통해 여과(濾過)시켜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진 보다 깊은 비밀로 이끌어 가도록 전환시키는 분수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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