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경해석

로마서 9장

白鏡 2007. 3. 19. 14:57
 

9: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 이 표현은 지금부터  진술될 내용의 권위를 보다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바울의 독특한  어법으로서(엡 1장) 이것이 맹세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으로 맹세했던 것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바울은 자기의 말과 계시의 최종적인 권위를 나타낼 필요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갈 1:1, 12).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내 자신이 저주를...끊어질지라도 -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에 있어서 공통된  저주의 의미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멸망당한다는 것이다(Murray).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가 되신 사건도 이러한 의미의 저주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바울은 실제로 자기 동족을 위해 저주를 받기를 원했는가 ?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던 모세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죄를 속(贖)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2)라고 탄원했다. 이때 모세는 자기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열심에서 그런 기도를 했다. 이것은 자기를 정말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연민과 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즉  바울은 모세와 같이 자기 구원을 포기할 만큼 자기 동족을 사랑하고 있음을  로마 교회의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Calvin, Murray, Barmby).


9:6-8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NIV]롬 9:6

It is not as though God's word had failed. For not all who are descended from Israel are Israel.

Nor because they are his descendants are they all Abraham's children. on the contrary, "It is through Isaac that your offspring will be reckoned."

In other words, it is not the natural children who are God's children, but it is the children of the promise who are regarded as Abraham's offspring.



offspring [ɔ́ːfsprìŋ] n.  (pl. ∼(s) )

① 「집합적」 자식, 자녀; 자손, 후예.


reckon [rék-ən] v.

―vt. ① 『∼ +목/ +목+부』 세다(count), 낱낱이 세다(up; over);

② 『+목+(to be)보/ +목+전+명』 (┅로) 보다, 간주하다(consider), 판단[단정]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 본 절에서 사도 바울은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과 약속이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에 성취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3:3-6에서 바울이 취급했던 것이지만, 본장에서는 다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관련하여 보다  자세하게 언급될 필요가 있었다. 즉 이스라엘이 실패했다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구원 섭리 속에는 온 인류에 대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스라엘은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서 모형적 선민으로  선택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혈통적 특권 의식에만 젖어든 채 그 구원  섭리를  잘못 이해하여 자기들의 역사에 그릇되게 적용시켰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 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혈통적인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본 구절의 첫번째 '이스라엘'을 반드시 야곱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모두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 이것은 창 21:12의  70인역(LXX)에서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창21:9-13)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 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 본 구절은 구약의 인용인데, 바울은 구약을  인용함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인용할 때도 있지만(3:4) 자유롭게 인용하기도  하며(3:10-19) 단순한 암시만 하기도 한다(20, 21절). 본절은 70인역의 창 18:10, 14을 자유롭게  취사 선택(取捨選擇)하여 인용하였다(Godet, Robertson, Braiklock, Matthew Henry).

창 18: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9:12-13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 바울은 창 25:23 중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창25:21-23)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바울은 말 1:2, 3을 인용하여 개인들에게 예언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성취되어졌는가를 증명한다.

(말1:1-4)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한편 여기서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을 감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셈어적인 개념을 가진 '미워하였다'(*에미세사)라는 말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S.Jeremias). 따라서 여기서 사용된 '미움'이란 말은 단지 에서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대상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Harrison). 하나님은 에서와 그의  후손들을  자신의 특별 은총으로부터 제외시킴으로써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하도록 작정하신 것이다(말 1:4). 바울은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하나님의 사랑과  미워하심을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또 다른 많은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명분과 기득권을 가진  유대  민족일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섭리로 버려질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 바울은 또 다른 역사적 사건 곧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선택하시고 애굽을 유기하신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선택의 절대 주권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에 대한 이해는 바울이 인용한 출 33:19 당시 상황을 이해한 후에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33:16-19)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은혜를 체험하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악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 점이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애굽을 용서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백성을 용서하셨는가에 대하여 그 근거를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한다(출 33:16,18).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나의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였다.

즉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그 어떠한 외부적인 환경과 조건에도 구애됨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라는 '작정' 외에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J. Calvin). 

그러므로  출33:19의 내용을 인용하여 인간에게 내려지는 구원의 은총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자비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의 축복(구원)을 누릴 수가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는 결코 값주고 살 수 없는 절대적인 은혜인  것이다.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원하는 자로...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 '원하는 자'(*델론토스)와 '달음박질하는 자'(*트레콘토스)는 앞에서 언급된 에서와 야곱뿐만 아니라 모세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트레코' (*'달리다', '경주하다')라는 단어를 긍적적인 의미로서 고대 운동 경기의 승리자를 묘사할 때나(고전 9:24)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자신의 삶을 묘사할 때에 사용하였다(갈 2:2;빌 2:16). 그러나 본

절에서는 보다 사실적인 의미로서 모세의 소원과 민족을 위한 노력들마저도 아무런 칭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였다(Meyer). 아브라함과 모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경주로 구원을 이룰 자는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달음박질조차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 여기서 다시 논리의 전개는 유기(遺棄)의 표본으로 세워진 바로에게로 넘어간다. 바울은 '성경'(* 헤 그라페)을  의인화시킴으로 당시 바로에게 직접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적 의지를 보다 생생하게  상기시키고 있다(Bruce, Harrison).

   내가...너를 세웠으니 -'세웠으니'에 해당하는 '여세게이라'(*)가 70인경에서는 '디아테레오'(*'지키다', '보존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인 '디에테레데스'(*)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능동태 1인칭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예정 의지를 보다 선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특히 70인경과는 달리 '여세게이로'(*'내가 일으키다')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변형시킨 것은 단순히 70인경을 번역하지 않고 보다 원문에 가까운 뜻을 찾기 위함인 것 같다(Bruce).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의 바로를 단순히 존재케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남겨두셨다(Hendriksen.Harrison. Ridderbos). 역사상에 나타난 바로는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점점 더 궁지로 몰아가는 악행을 범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 구원을 더 영광된 것으로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J. Calvin). 하나님은 그를 믿고 섬기는 자들뿐 아니라 그를 대적하는 자들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영광을 위하여 죄를 조성하였다고 판단 할 수는 없다(6:1, 2 주석 참조). 본절의 핵심은 죄를 조성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인간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 능력을 보이고...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다 - 하나님이 바로를 세우신 것은  하반절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이 바로를 왕으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명을 보존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창조주의 권위를 만방에 알리시기 위함이다. '능력'

(*뒤나민)과 '이름'(*오노마)은 서로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눈에 드러나는 이적적(異蹟的)인 기사들은 하나님의 속성 곧 그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Kasemann). 실제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사건은 그 이후에 다른 모든 민족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수 2:10, 11;9:9;삼상 4:8).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NIV]롬 9:18

Therefore God has mercy on whom he wants to have mercy, and he hardens whom he wants to harden.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현대인의성경]롬 9:19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고 나무라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NKJV]롬 9:22

What if God, wanting to show His wrath and to make His power known, endured with much longsuffering the vessels of wrath prepared for destruction,


wrath [ræɵ, rɑːɵ / rɔːɵ] n.

U (시어·문어) 격노, 분노, 신의 노여움; 복수, 천벌; (자연현상 등의) 혹독함, 폭위(暴威)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진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를 논증한다. 죄인의 형벌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바울은 자주 다른 표현으로 기록한다(2:4). 하나님은 죄인의 멸망을 고의적으로 조성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단지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에 관여하신다. 특히 그의 인내심은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시며 또한 회개한 자를 기꺼이 용납하고자 하시는 증거이다(벧후 3:9).


벧8-10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따라서 본절에서 '멸하기로 준비된'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끝내 무시하고 심판에 직면하는 죄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Harrison), '준비된'(*카테르티스메나)이라는 말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멸망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멸망이 준비되었으며 그의 멸망의 때는 무르익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멸망을 준비한 자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설령 그가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죄인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한 행동에 대한 형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Hendriksen).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멸망의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범죄한 죄로 인하여 멸망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Bruce).

그러므로 ‘왜 누구는 택하시고 안 택하시느냐?’ 또 ‘택함을 받지 못한 것은 누구의 책임이냐?’를 하나님께 묻는 것이 잘못된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두가 죄인인 상태에서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오로지 당신의 사랑으로  마음에 합당한 자를 일부 구원하신 것이지 근본적으로 누구는 조금 낫고 누구는 조금  못한데도 불구하고 불평등한 처사를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것이고(엡 2:7) 반면에 멸망당하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본래 죄 값으로 멸망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문제의 근원은 죄인인 인간편에 있음을 보여준다.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 본절은 22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양쪽에 사용된 상징적인 표현들의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동일한 원리로 작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진노의 그릇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지만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富饒)함을 알게 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자 모두를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섭리였으나 그들이 초래한 결과는 전혀 다른 신분을 만들고야  말았다. '긍휼의  그릇'들은 '진노의 그릇'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풍요함을 인하여 구원의 기쁨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를 경험하게 되었다(8:30). 따라서 본절의 '영광'은 개인의 구원에 관계된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민족과 개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죄의 타락으로부터(3:23)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Hendriksen, Barmby).


9:25-6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 바울은 이방이 유효적 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것을 호 2:23을 인용하며 논증한다.


호 2:23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호 2:23은 이방인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고멜의 방탕과 같은 죄와 형벌 속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기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여진것이다.

호세아는 고멜의 방탕 중에 잉태한 네 자녀의 이름 중 두 자녀의 이름을 '로루하마'(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사하지 않을 것)과 '로암미'(내 백성이 아님)라는 상징적 의미로 지음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함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셨다(F.F.Bruce).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바울이 초대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당시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베드로도 벧전 2:10에서 호 2:23을 이방 신자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는데 이와 같은 적용은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원리가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음을 시사한다(Hendriksen).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불러 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3:22).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 본절은 호 1:10의 인용으로 혹자는 앞 절과는 달리 본 절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예언이라고 주장한다(Barmby). 즉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때 이 호세아서의 예언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등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원리가 이방인에게나 유대인들에게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할때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시는 것은 동일한 예언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이지만 본절은 특별히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

직하다(Hendriksen. Harrison). 이방인들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도  보편적인 교회의 일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화되지 않았으며 유대인들도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게 될것이라고 논증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창조자의 영광 속에서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묘사된 반면(22절)  유대인들은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고 묘사돼 있다. 유대인의 구원은 더 이상 민족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야곱의 자손 중에서도 그의 선하신 뜻에 의하여 남겨진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Kasemann).

사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의 글은(사 10:22, 23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당시 이스라엘의 위치 속에서 백성의 보존을 예언한 글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앗수르에  멸망한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들 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그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떠난 이스라엘 유대 민족 중에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한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시사한다(Hendriksen).

따라서 '남은 자'에 대한 이사야서의 예언은 구별된 유대 민족들 중에서도 연단(鍊鍛)의 심판을 통해  그  수효가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Harrison) 또한 하나님의  긍

휼과 신실성을 더 크게 나타내는 구약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예서 더 큰  구

원의 약속을 발견한 것이다.


9:25 내가 불구에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그들을 멸하리라

하시도다 


[NIV]사 10:25

Very soon my anger against you will end and my wrath will be directed to their destruction."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경에서 그 성민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철저히 멸망당한 대표적인 성읍들이다(창 18:20;19:23-28;신 29:23;렘 50:40;암 4:11). 본 절에서 유대인의 멸망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비유한 것은 유대인들이 완악함으로 인하여 심판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완악한 유대 민족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완전히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씨'를 남겨두신 것은 그분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주장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하여 완전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이나 보다 강조점을 두고 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상황 속에 적은 자를 남겨 두셨다는 사상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씨, 곧 '남은 자'(the remnant)들을 남겨두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선민(選民)임을 고사하고 제 2의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 저주받은 민족의 대명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선민이라고 자처하며 구원의 독점성을 주장하던 이스라엘의 적나라한 실상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죄악의 심층부에 자리한 소돔 고모라 사이의 윤리성을 사실상 백지 한 장 차이도 안 되었다.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돋보이는 것이다.


9: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이  '돌'(*페트란)은 시편 118:22에 기록된 '버린 돌'과 사 28:16에 기록된 

'시온의 기초 돌'로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눅 20:17).


시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사 28:1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dismayed. 아니하리로다


dismay [disméi] n.

U 당황, 경악; 낙담.


눅 20:17-18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또한  단2:34절에 기록된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로 이는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시온에 두신 돌은 멸망과 저주를 선포하는 돌이 아니라 구원과 영광을 선포하는 피난처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이 돌을 거침돌로 만듦으로서  스스로 저주와 멸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고전 1:18, 23). 그들은 행위와 그리스도라는 양자 택일의 선택에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으나 십자가는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Harrison). 여기서  바울의 결론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찾으려 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Hendriksen). 믿음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는 자는 피난처이신 시온의 반석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