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경해석

로마서 12장 - 15장 본문해석

白鏡 2007. 5. 13. 09:49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공동번역]롬 12: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표준새번역]롬 12:1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현대인의성경]롬 12: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며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KJV]롬 12:1

I beseech you therefore,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hat ye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sacrifice, holy, acceptable unto God, [which is] your reasonable service.


[NKJV]롬 12:1

I beseech you therefore, brethren, by the mercies of God, that you present your bodies a living sacrifice, holy,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reasonable service.


[NIV]롬 12:1

Therefore, I urge you, brothers, in view of God's mercy, to offer your bodies as living sacrifices, holy and pleasing to God--this is your spiritual act of worship.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란 하나님께 전 인격적으로 우리의 몸을, 생애 전체를 드리는 것이다. 즉 우리의 생애를 통해 계속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이다.

'산 제사'의 '산'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산'(*)은 현재 분사로 '지금  살아있는'이란 뜻을 포함한다. 이 말은 구약적인 제사, 즉 짐승을 죽여 피를  흘림으로써  드리는 제사와 대조된다. 또한 당시에 이교 사회(異敎社會)에서 성행했던, 몸을 부정(不淨)한 일에 악용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즉 '산 제사'는 구약 시대의 동물 제사처럼 다른 존재로써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드리라는 것이며 또한 지역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제사로서 살아 움직이며 생활하는 자체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다.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것이다(약 2:22).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이 부분은 앞에 나온 권면을 설명하고  확증(確證)하는 의미에서 쓰여졌다. '영적 예배'의 '영적'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형용사 '로기켄'(*)인데   '로기코스'(*)에서 유래되어 '합당한'(reasonable, KJV), '합리적인'(rational)의 뜻을 가졌다.  '영적'(spirtual,  NIV)인 것을 확실히 표현하는 헬라어 '프뉴마티켄'(* )을 사용하지 않고 '로기켄'을 사용한 것은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행동들을 염두에 두었거나(Calvin), 하나님이 요청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 즉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예배를 강하게 표현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혹자는 이를 '합당한'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따라서 이를 이스라엘 성전 예배의 외형적 의식과 대조하여 '영적' 예배라고 번역하는 것도  좋은  번역이다(Hendriksen,  Bruce,  ARV, RSV, NIV).

'예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라트레이아'(*)는 구약의 제사를 지칭하기도 했는데, 본절에서는 단순히 제사 행위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삶으로서의 예배를 의미한다. 즉, 삶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주께 두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므로 이를 '섬김'(service)으로 번역한 번역본도 있다(KJV).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세대 - '세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온'(*)은 '세계', '세상'을 의미

하는 '코스모스'(*)와 비슷한 의미를 가졌는데, 일반적으로  '코스모스'가

공간적이고 현상적인 세상을 의미하는데 반해 '아이온'은 시간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 세대'(*아이온 후토스)란 용어는 바울이 여러 차례에 걸쳐 사용했다(고전 1:20;2:6, 8;3:18, 19;5:10;7:31;고후 4:4;갈 1:4).

유대교 종말론에서는 시간을 '현 세대'(present age)와 '올 세대'(age to come)로  구분하는데 바울도 이와 같이 종말을 기점으로 크게 둘로 나누어 사용하였고 바울이 사용한 '이 세대'라는 말 속에는 대부분 이러한 유대교적 종말론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 세대'가 시대 구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 혹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악한 세대'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적대 세력을 의미할 뿐 아니라 '이 세대'의 삶의 방식과 가치 기준 등 시대 정신도 포괄한다.

   '변화를 받아' - 의 헬라어   '메타모르푸스데'(*)는 현재 수동태 명령형이다. 곧 이 말은 자신이 아닌 타자(他者)에 의한 변화 즉 우리의 인격 내부에 변화를 일으키는 성령에 의해 계속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NIV]롬 12:3

For by the grace given me I say to every one of you: Do not think of yourself more highly than you ought, but rather think of yourself with sober judgment, in accordance with the measure of faith God has given you.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  '마땅히 생각할 바를 생각한다' 함은 '자기 자신의 처지나 조건에 맞는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그 이상'이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파라'(*)는 '분에 넘치는 생각을 하다', '부풀은 생각을 하다',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다'(BGD)라는 뜻을 가졌다. 칼빈(Calvin)은 '휘페르프로네오'를 '지혜의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휘페르프로네인 파라'(*)는 그 뜻을 밝혀 번역하자면 '그 이상의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품지 말고 생각의 한계를 가지라'는 것이 된다. 여기서 분에 넘치는 생각이란 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설명하는 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을 뛰어넘는 생각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자신의 능력과 소명(召命)으로 감당(堪當)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스스로 짊어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

   믿음의 분량 - 이 표현은 믿음이 물질처럼 측정되는 양적인 것이라기보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기능들이 있어 각자 주어진 직분과 은사의 한계와 특성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다(고전 12:4-31). 그러므로 본문의 '믿음'은 구원의 수단인 진리를 믿는다는 말이 아닌, '자신이 받은 영적 은사의 성격을 알고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브루스(Bruce)는 이를 '영적 능력'이라고 했다.

   지혜롭게 생각하라 -헬라 철학에서 지혜를 나타내는 단어인 '소프로쉬네'(*)는 '겸손'(謙遜)과 '자제'(自制)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분에 넘치는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건전하고 겸손한 생각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대로 은사를 주었다는 것은 각자의 직분과 역할이 다르다는 뜻이며 동시에 자신이 받지 아니한 직분의 영역은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제한을 의식하고 그가 교회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에 관한 그의  열망을  규제해야  한다(Godet).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NIV]롬 12:6

We have different gifts, according to the grace given us. If a man's gift is prophesying, let him use it in proportion to his faith.


   '예언'은 주로 선지자들에 의해 행해졌는데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기관이었고 계시의 내용은 여호와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출 4:12; 7:1,2; 렘 23:16,18, 22, 28). 한편 성경의 기록이 끝난 시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되었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사도들에게서 완성되었으며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완성된 이후에는 새로운 계시를 위한 예언자도 필요없게 되었다. 신약 시대에 와서 예언은 경고와 권면, 교훈과 판단, 그 마음의 비밀을 나타내며(고전 14:3, 24, 25), 영감을 받아  하는 것으로 나온다(벧후 1:21).    믿음의 분수대로 - '분수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카타 텐 아날로기안'(*)인데 '아날로기아'(*)는 수학 용어로 '바른 관계' 혹은 '조화, 비례'(proportion)라는 뜻을 가졌다.

위의 문구에 대해서는 정반대되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1) '믿음의  분수대로'를 3절에 나오는 ‘믿음의 분량대로’와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대로 예언하는 것’이라는 해석(Bruce, Barmby, Gaffin)과

2) '아날로기아'를 '유비'(類比)(analogy)라고 직역하여 본 절의 '믿음'은 '교회가 객관적으로 가지고 있는 계시 체계로서의 믿음이나 규범'을 의미한다고 하여 예언은 교회가 정해놓은 규범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Kasemann, Schlier, Ortkeuper, Weiss 등).


* 위의 두 가지 해석 중 하나를 고른다면 아래에 열거되는 여러 가지 직분에대해 권면하는 내용을 종합해 볼 때 2번의 해석이 보다 정확한 해석인 것 같다.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섬기는 일이면 - '섬기는 일'은 매우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한 가지로 정하기는 어렵다. 이의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종종 비신자에게 말씀을 전하는 직분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행 6:4).  그러나 본구절의 '섬기는 일'은 그 행사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필요한 '집사의 직분'에 제한된 것 같다.

   가르치는 자 - 이에 예언하는 것과 구별되며 섬기는 것과도 다르다. 예언은 계시와 관계되어 있는 반면에 가르침은  지식과  관련하여  지혜와  지식의 말씀으로써(고전12:8;14:6) 하나님의 계획을 조화롭게 나타내는 것이다(Godet).

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NIV]롬 12:8

if it is encouraging, let him encourage; if it is contributing to the needs of others, let him give generously; if it is leadership, let him govern diligently; if it is showing mercy, let him do it cheerfully.


   권위(權慰)하는 자 - '권위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오'(* )는 '권면하다'(고전 4:16;16:12;고후 10:1;12:18), '요청하다', '위로하다'(고후1:4; 7:6, 7;살전 3:7)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과 명백하게 다른 말로서 문맥을 살펴볼 때 형제를 위로하고 권면한다는 뜻이 지배적이다(행15:31;딤전 4:13).

   구제하는 자 - 구제에 대해서는 (1)교회의 재물을 공적으로 재분배하는 것과 (2)공적인 재산이 아닌 개인의 재산을 나눠주는 것 두가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형식을 취해 구제를 하느냐를 따지지 않고 다만 구제의 원리를 따라 즉  성실함으로 하는 것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다.

   성실함으로 - '성실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플로테티'(*)는 '단순함', '순전함', '섞이지 않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Dunn). 따라서 '성실함'은

감추어진 목적이나 뜻이 없는 순수한 마음을 말하며(행 5:2) 동시에 관대한  마음으로 후히 주는 것을 일컫는다(고후 8:2;9:11, 13). 새번역, 공동번역, 표준신약전서는 '순수한 마음'으로,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후하게'로 번역했다. 또한 영역 성경 흠정역은 '순수함으로', RSV, NASB는 '관대하게', NEB는 '마음을 다해'로 번역했다.

   다스리는 자 - '다스리는'의 헬라어 '프로이스테미'(*)는 '선두에 서다', '통치하다', '지도하다'의 뜻이 있다. 혹자는 '다스리는  자'를  '감독과  장로'로  보기도  하며(Calvin, Gifford, Murray, Lenski) 혹자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로  보기도  한다(Godet, Barmby). 여기서는 문맥을 볼 때 교회에서 교인들을 지도하고 통솔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에 대한 표현이다(Harrison).

   부지런함으로 - '부지런함'을 나타내는 헬라어 '스푸데'(*)는 '부지런함' (12:11), '간절함'(고후7:11,12; 8:7,8,16) '급히', '빨리'(마6:25; 눅1:39) 등으로 번역되었고, 대체로 '종교적인 열심'을 뜻한다(BGD). '다스리는 자'는  맡겨진 일에 열의를 가지고 세월을 아끼며 충성해야 한다(고전4:2; 엡 5:15-17).

   긍휼을 베푸는 자 - '긍휼을 베푸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에오'(*)가

인간이 베푼 자비를 나타낸 경우는 바울 서신 중 본문에만 유일하다.  다른  곳에서는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킨다(9:15, 16, 18;11:30-32;고전 7:25;고후 4:1;빌  2:27;딤전 1:13, 16). 본 절의 '긍휼'은 일반적 의미의 '긍휼'이다. 즉 병든 자와 환난 중에 있는 자, 무력한 자, 노인들을 돌보는 것이다.

   즐거움으로 - 고통받는 곳에 도움을 주며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어두운 곳에 즐거움으로 나아가는 그들은 위로와 용기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궂은 일이란 마지못하여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자세로 직무를 수행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실함으로', '부지런함으로', '즐거움으로'는 하나님께 받은 은사들을 가지고 남을 섬길 때 취해야 할 마음 자세와 그 태도를 말한 것이다.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NIV]롬 12:13

Share with God's people who are in need. Practice hospitality.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쓸 것'에 해당되는 헬라어 '크레이아이스'(*)는 '쓸 것'이나 '궁핍'을 뜻한다. 

‘공급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네오'(*)는  물질적이며  재정적인 도움의 의미를 띤 '주다',  '몫을  기부하다'(15:27;빌  4:15),  또는  '참예하다'(빌4:14;벧전 4:13), '함께 하다'(갈 6:6)의 뜻을 가진다. 성도들에게 서로 어려운  성도의 필요와 궁핍을 도와줄 뿐 아니라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라는 권면이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식민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고 토지를 몰수하는 등 많은 재정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래서 일부 귀족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따라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성도들은 신앙에 대한 박해도 감수해야 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성도간의 곤경(困境)을 도우며 동참하는 것은 서로에게 용기를 주며 위안과 격려가 되는 것이다.

   손 대접하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롸세니안'(*)은 '필'(*)과 '크세노스'(*)의 합성어이다. '필'은  '사랑하는',  '좋아하는'의 뜻이며 '크세노스'는 '손님', '이방인', '객'을 뜻한다. 따라서 '필롸세니아'는 '손님이나 이방인, 즉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으로 손님을 환대함을 일컫는다.  애굽에서 '객'으로 있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생각하면서 '손 대접'하기를 강조하곤 했다. 또한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심했으므로 이곳 저곳  나그네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행하는 자들(바울과 그의 동료들)과 핍박으로 도망하는 자들, 돈 때문에 심부름 다니는 자들은 곳곳에서 신자들에게 대접을 잘 받았다.

신자들은 한 가족이면서(10절) 모두 나그네이므로(히 11:13), 서로를 손님으로 여기고 합심하여 서로를 돌본 것이다.


12:14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이는 모든 사람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절은 신자들이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평화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을 교훈한다.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진노하심에 맡기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테 토폰 테 오르게'(*)를 직역하면 '진노의 자리를 주라'이다. 신약성경에서 '진노'가 수식어 없이 나올 때는 대개 '하나님의 진노'로 본다.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 공정하게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치나치게 냉혹하지 않다. 또한 심판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고 악인을 심판하는 주권은 하나님께만 속한다. 따라서 사람이 원수를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은 공정성(公正性)면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 바울이 자주 그러했듯이 본 구절에서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구약성경의 본문 신 32:35에는 "보수는 내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로 되어 있다. 신명기의 문맥에 비추어 보면, 적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능욕하며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본절은 70인역(LXX) 잠 25:21,22(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을 거의 정확하게 인용한 것이다.



이는 17절의 진술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서술하는 것이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 원수가 궁핍하며 곤경에 처했을 때 선행과 친절을 베풀라는 것이다. 실제로 원수를 먹이고 마시우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행위이며 궁극적인 마시움과 먹임은 생수의 근원,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요 6:35).

   숯불 - 해석이 다양한데 '숯불'은

1) '회개의 표'(Klassen), 2)'마음의 불'(Liddon), 3) '회개와 부끄러움의 가책으로 타는 듯한 고통'(Cranfiedl, Hendriksen, Harrison), 4) '은혜', 즉 궁극적으로 은혜를 가져오는 '후회와 부끄러움에서 오는 고통'(Godet) 등으로 해석한다.

대체로 숯불을 쌓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복수 방법이다. 은혜를 베풀므로써 원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죄악에서 돌이키게  되어 서로에게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NIV]롬 13:1

Everyone must submit himself to the governing authorities, for there is no authority except that which God has established. The authorities that exist have been established by God.


   위에 있는 권세들 - '위에 있는 권세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대체로는 국가의 정치적 권세, 인간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로마의 권력(權力)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권세는...모든 권세는 - 전자는 대표 단수형이고 후자는 복수형이다. 따라서 전자는 세상에 인간적 질서를 세우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일반 원칙임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개개의 구체적인 권력이 다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모든 사람들이 세상의 정치 권력에 대해 굴복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 따라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는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도 복종해야 한다.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원리이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보편화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적용시키려고 하거나, 신앙인과 국가 권력과의 관계를 규정(規定)짓는 말로 확립하고자 할 때는 논란이 생길 수 있다.

만약 어떤 권세가 악을 징벌하고 선을 장려하며, 선한 양심에 반(反)하는 방식으로 그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권세가 '사랑과 정의'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율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행사되고 불의를 조장하며 악을 도모한다면 그 때에는 그 권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

여기서 '모든 권세에 복종하라'고 한 바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바울은 후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며 전자의 가능성 즉 이상적인 국가 권력과 그것의 집행에 대해서만 원칙적인 언급을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국가의 권세에 대해서 (실제로 는 로마의 권력) 그와 같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법치주의에 근거한 로마의 권력이 그의 선교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이 작용했을 수 있다(행 28:16-28).

(2) 모든 국가의 권력이 하나님의 결정에 의한다는 것은 구약 성경적 배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라는  애굽의 왕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악명높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로를 왕좌에 오르게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 구약의 증거이고 또한 바울이 취한 신앙이었다(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이런 의미에서 모든 국가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라는 안목으로 헤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권력 그 자체의 정당성 보다는 모든 권력 위에서 결정권을 가지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바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하나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유대교 또는 유대주의와의 관계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를 싫어했고 그들로부터 자기들의 나라를 독립시키는 것을 소원했으며 더 나아가 반(反) 로마적인 행동도 불사했다(마 22:16, 17;막  12:14;눅 20:21, 22;요 8:33;행 5:36, 37). 이런 사정을 로마 권력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로마의 권력자들이 기독교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권력에 복종하라고 가르침으로써 불필요한 경계와 오해를 불식(拂拭)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4) 기독교 자체에서 생겨난 문제로 열광주의자에 관한 것이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시민권 사상과 그리스도의 왕 되심에 대한 열광 때문에 지상의 권력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가졌다. 이런 신앙은 그 자체로도 문제려니와 로마인들에게도 좋지 않은 반작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배경에 두고 볼 때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한 바울의 진술은 열광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라고 볼 수 있다.


13: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 여기에 대한 논리는 매우 간단하다. 즉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므로 그 권세를 거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니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선한 사자들로서 선과 악을 구분하여 상과 벌을 준다면(3, 4절) 이 말은 수긍할 수 있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브루스(F.F. Bruce)가 제기한 질문처럼 만일 가이사가 자기 권세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영역을 주장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어떠한 권력이나 위정자가 하나님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 가령 가이사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부여해준 권세의 범위를 넘어 하나님의 자리에서 경배받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이런  경우 우리는, 즉 사람과 하나님이 대립되는 경우, 그리고 반드시 양자 택일을 해야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선택해야 한다(행 4: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5:29 베드로와 사도 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만약 그렇지 않고 이 본문이 시간과 공간, 조건을 초월하여 적용되는 불변의

원리라면 이것은 공의와 정의에 반(反)하는 각종 전제 정치 체재와 독재체재를 정당화해주는 구실을 할 수 있게 된다.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 한편 본문에서 언급하는 '심판'은 더이상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명료하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가령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받게 될 궁극적인 심판을 뜻하는지 아니면 지상의 권력에 의한 형벌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3, 4절에 나타난 관원에 대한 언급과 '두려움의 동기'를 생각해 볼 때 후자의 가능성이 많다. 또한 사람이 지상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면 그에 상응하는 법적 제재 및 보복적인 조치가 뒤따르는 것이 상례이다.


한편 여기서 권세를 거스려 '심판'을 자취하는자는 정당한 신앙적  이유를 떠나서 권세자들에 대한 그릇된 이해 속에서 하나님이 세운 권위에 반항하여 불순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노를 인하여만...양심을 인하여 - 본문의 '노를 인하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to avoid God's Wrath)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RSV). 권세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므로 권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뒤따른다고 볼 수 있고 국가 권력은 이를 대행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 바울은 '양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행23:1;24:16; 고후1:12;4:2 ; 딤전1:5) 여기서의 양심은 분명히 하나님 말씀의 법에 근거한 양심이다.

즉 이 양심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고 악에 대해서는 죄의식을 느끼며 또한 하나님께 대해서는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는 것이다.

결국 본문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권세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자명한 당위성(當爲性)을 갖는 것이라고 할진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도 권세에 굴복해야 하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과 충성을 위해서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양심을 인하여' 즉 '양심을 따르기 위해서'(공동번역)라는 표현은 기독교인이 지상의 권력에 대하여 지녀야 할 태도의 기준이 융통성 있다는 것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해석하게 한다.

따라서 어떤 지상의 권력이 '권선징악'에 합당하게 그 권위를 행사한다면 마땅히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 권력에 복종해야 하겠지만 혹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양심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칼을 휘두른다면(4절)  지상의  권력에 의한 핍박을 받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행 4:19,20).

또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감이므로 모든 제도에 대해 순종함에 있어서  주를 위한다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벧전 2:13).


13: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NIV]롬 13:6

This is also why you pay taxes, for the authorities are God's servants, who give their full time to governing.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  '공세'(*포론)는 피정복민이 지배 국가에 바치는 '조공'(朝貢)을 의미하며  '국세'(*텔로스)는 국가에 내는 세금을 가리킨다. 6절에서는 독자들이 세금을

바쳐야 하는 근거와 세금을 부과하는 정당성을 묘사한 것이고 본 절에서는 마땅히 납세를 해야 할 것임을 언급한다. 만약 당시의 모든 성도들이 다 세금내는 일을 잘 준수하였다면 바울이 본 절을 말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당시에 세금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이들이 세상의 일상적인 질서, 현세의 정치 질서를 부정하는 열광주의자들이었을 것이라고 본다(Kasemann). 따라서 바울은 본 절을 통해 그들에게 현세의 질서는 하나님에 의한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이 질서 안에 머물러 있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 여기서 두려움과 존경은 실제적으로 권력 또는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내면적인 태도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권력에 대해서 절대적인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秩序)에 순종하는 의미에서 정당한 두려움과 존경을 품어야 한다.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첫째는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2) 둘째는 사랑이란 성도들이 지불해야 하는 빚으로서 '다 갚음'이 없는 영원한 부채라는 것이다.

한편 '아무에게든지'라는 표현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대상이 '성도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다  이루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켄'(*)은 현재완료형이다. 이는 사랑하는 순간 율법을 이룬 것임을 말해준다. 여기서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율법인 십계명의 조항을 들어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인 것인가를 말해주려고 한다.

여기서는 '...을 하지 말라'하는 금령(禁令)이 '사랑'이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규범으로 대치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본문은 사랑의 소극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성도들은 이런 의미에서의 사랑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이런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사랑도 강조되어야 한다. 사랑은 능동적인 것이고 따라서 모종의 행동을 필연적으로 유발시키지만 그것이 결코 이웃을 해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NIV]롬 13:11

And do this, understanding the present time. The hour has come for you to wake up from your slumber, because our salvation is nearer now than when we first believed.



   이 시기를 알거니와 - 본문의 '시기'(*카이로스)는 연대기적으로  흐르는 '시간'(*크로노스)이 아니라 '계절'(season)과 같이 어떤 특성을 가진 개념의 시간이다. 여기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카이론'(* '그 시기를')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주의 재림으로 오게 될 역사의 종말을 그 시기의 성격이나 현상들을 통해 깨닫는다는 것이다.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NIV]롬 13:12

The night is nearly over; the day is almost here. So let us put aside the deeds of darkness and put on the armor of light.


   낮이 '가까왔으니'(*엥기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와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 선포를 한 시점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다(*엥기켄)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해석이 더욱 타당하다.

한편 '밤'이 현세상이라면 '낮'은 구원이 있는 천국을 가리킨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신천 신지(新天新地)가 가까왔음을 말해주는데 이 종말의 가까움에 관한 바울의 표현에 대해 독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날'이 임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1) 바울의 '가까움'에 대한  강조를 인간들이 계산하는 연대기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예언적 전망'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3:8)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2) 바울의 '가까움'에 대한 강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는 결론으로 향하고 있다.

이는 현재적 경건의 삶을 촉구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미 참 빛이 왔기 때문에 낮의 세력이 성도들에게 임하였으나 실제로는 밤이다. 즉 성도들은 여전히 악한 세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눅 16:8). 따라서 지금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죄의 세력에 대한 전투적인 삶이다.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표준새번역]롬 14:1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NIV]롬 14:1

Accept him whose faith is weak, without passing judgment on disputable matters.


disputable [dispjúːtəbəl] a.

논의할[의문의] 여지가 있는; 진위가 의심스러운, 확실치 않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톤 데 아스데눈타테 피스테이) - 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접속사 '데'(*'한편')는 12:1-15:13에 이르기까지의 대 문단 내의 새로운 소 단락으로서 새로이 주제가 전환됨을 표시해 준다.


* '믿음이 연약한 자'란 말이 나타내는 여러 가지 의미

(1) 구원의 근본 원리로서의 '믿음'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

다시 말해서 불리한 환경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지 못한 행위등을 가리킬 때 (4: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3)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할 자유를 지각(知覺)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 절의 경우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떤 날을 예배일로 지켜야 되는지에 관한 율법사항들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즉 교회 내부의 유대적 요소를 지키기를 주장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런 자들은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할 자유를 지각(知覺)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Calvin, Harrison).

   너희가 받되(*프로슬람바네스데) - 이 단어는 '받아 들이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친절하게 대하다'를 가리키는 '프로슬람바노'(*)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너희들이  받아  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의 대상이 되는 '너희들'은 대체적으로 '강한 자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강한 자들은 음식물에 관한 이전의 구약성경의 규례를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거부하고 또한 어떤 특정 음식을 피하는 일에서 자유로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즉, 자신들의 동아리 안에 그들을 받아 들이고 동시에 그들을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교제하며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들로서 따뜻하게 인정해야 했다. 또한 이 단어는 공동체 전체 안에서의 공식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교제에서 형제로서의 용납을 의미한다(Kasemann). 그런 의미에서 '프로슬람바노'는 행 18:27과 28:2에서도 같은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 속에서 우러 나오는 환영을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

(welcome;RSV, LB).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바울은 여기서 연약한 자를 받을  때 특별히 주의할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는 성향이 있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약한 자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생각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된 강한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연약한 형제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으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열등감이나 결함 혹은 색다름을 느끼지 않도록 그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베푸는 일뿐이다. 여기서 '비판'을 가리키는 '디아크리세이스'는 '다툼', '구분', '판단', '결정', '논쟁'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며 '의심'을 가리키는 '디알로기스몬'(* )은 '추론', '생각', '의견', '거리낌', '주저함'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디아크리세이스'는 '비판', 혹은 '판단'이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고  '디알로기스몬'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거리낌'인  듯하다(Cranfield). 즉 약한 형제가 꺼려하는 일들을 비판 내지는 판단함으로써 그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 조건을 도입한 것이다.  아울러  이 구절은 강한 자들이 누리는 내적 자유에 대한 외적 표현을 약한 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Sanday and Headlam).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음식물에 관한 금기(禁忌)가 바울 당시에는 흔히 있었는데 그 이유로는 유대적 전통(레 11:1-47)도 있었고 생명있는 것을 꺼린다는 당시의 통념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다. 물론 고대에는 식물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이 아직 발전되지 않았다. 또한 금욕 생활을 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음식을 절제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시대적 경향들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조하는 자도  있

었고 그렇지 않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바울의 기본 입장은 믿는 자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 하였다 (딤전4:3,4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


한편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음식물을 채소로 제한한다. 여기서 '채소를 먹느

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라카나 에스디에이'(*)로서 육식과 정반대되는 채소만 먹는다는 뜻이다. 즉, 채소 외의 다른 것을 먹지 아니한다는 것이다(창 9:3;잠 15:17;Godet).

그들이 음식물에 대해 이 같은 태도를 취한 데에는

(1) 의도적으로 부정한 음식을 피한다는 종교적 이유(레 11장),

(2) 고기를 먹지 않으면 보다 건강하게 된다는 건강상의 이유,

(3) 그리고 살아있는 것을 먹기를 꺼려하는 의식적인 이유 등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연약한 자들의 이 같은 자기 제한(먹거나 안 먹거나 하는  문

제)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신앙의 분량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12:3).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업신여기지 말고 - 바울은 믿음이 강한자와 약한 자가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위험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먼저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에 대해서 '업신여기지 말아야'(* 메 여수데네이토)할 것을 명령한다. 여기서 이 용어는 ''업신여김', '멸시함'(contempt, NEB) '경멸함', '얕봄'(despise, KJV)의 의미로 쓰여졌다.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소심한 태도를 멸시하는 눈초리로 대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단절되고 말 것이다(Godet).

   판단하지 말라 -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는 강한  자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라'(*\메 크리네토)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를 언급하면서 '정죄'(*카타크리시스)라는 표현보다 '판단'(*크리네인)이란 단어를 쓴 것은 주로 강한 자들의 행위를 비판함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Lenski). 음식을 채소로만 제한하는 연약한 자들은 모든 음식을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믿음이 강한 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그들을 성급하게 판단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 이 말씀은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양쪽  다 언급한 것으로 특별히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좀 더 강조점을 둔  것이다(Godet). 강한 자나 연약한 자는 결코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바울은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자든 연약한 자든 구별치 않고 양쪽 모두 자신과의 교제 관계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容納)하셨던 것이다(Robertson).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 사이에 서로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에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 조건 없이 그들 모두를  용납하셨던  하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Calvin).


14: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본절에서는 날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다루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일반적인 성향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종교적 의무와 관련하여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인류 사회가 길일(吉日)과 흉일(凶日)을 구분하여 날들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에 복음이  전하여졌을 때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분명히 있고, 비록 복음이 전해진 사회에서도  성도의  자유 문제와 연관지어서(갈 4:9ff.;골 2:16) 안식일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 '혹은...혹은...'(* 호스멘...호스 데...)은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지시 대명사이다(Robertson). 본 구절은 사람들이 날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성향을 말하고 있는데 어떤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다른 날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 헬라어 본문에는 '같게'(alike)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모든 역본들(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KJV, RSV, NASB, NIV,  NEB)에서는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는 것을 감안하여 의미상 '같게'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모든 날을 같게 여긴다는 것은 모든 날들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Bruce). 이에 바울의 가르침대로 따른 자도 있었지만 종교적 양심으로 인하여 따르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시키면서 '날'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 이는 다른 사람이나 종교적인 규례로부터 영향을 받지 말고 주체적인 신앙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모든 날이 주의 것이라고 가르치고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자들은 이러한 자유함을 육체의 기회로 삼거나(갈 5:13), 또 어떤 이들은 이로 인해  걸림돌이 되었고(고전 8:9), 어떤 이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고 하는 것은 신앙은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결단할 것을 중요하게 여겨 무엇보다도 그 관계가 우선되어야지 다른  사람과의  결단이 그보다 우선되거나 중요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바울은 앞에서 음식 문제와 종교적으로 날짜를 지키는 문제 등 구체적으로 로마 교회 성도들의 두 가지 생활 영역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언급하였다(1-6절).

바울은 교회 생활 영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도들이 취해야 할 생활 원리들을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구분해서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성도들이 취해야 할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첫 번 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헤아우토'(*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현세의  연락(宴樂)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취하는 '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바울의 신앙 고백이며(갈 2:20)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 이후 바울의 일관된 삶의 원리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불신자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욕심으로 점철(點綴)된 역사였다. 이러한 불신자의 삶의 세계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값으로 사신 바(고전 6:19, 20)되었고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기 때문이다(Calvin).

성도의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두 번 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데이스 헤아우토 아포드네스케이'(* )로 성도의 삶은 죽음도 자신에 의하여 주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예속된 것임을 나타낸다(Olshausen).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바울은 본절에서  좀더  본질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내적인 삶의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도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Tholuck).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생(生)과 사(死)에 있어서 궁극적인 표준이 되신다(Hendriksen). 이 말씀은 앞절 '자기를 위하여  사는'(*                ,

헤아우토 제)과 대조되어 '투 퀴리우'(*                 , '주의 것')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린 값으로 산 것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도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거나 자신을 스스로 주장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전 6:19, 20)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왜 음식과 절기의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생사(生死)의 문제까지 끌어올려 말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Lenski).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일상의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께 대한 믿음과 청지기적 사명으로 부터 출발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여야 한다(고전 10:31).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는 진정한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 뿐 이시다는 의미이다.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기록되었으되(*게그랖타이 가르) - 이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은 혼합형으로서 사 45:23과 49:18을 결합시킨 것이다.


사 45:23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사 49:18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로 장식을 삼아 몸에 차며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이 인용문은 앞 절(10절)에서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를 엄하게 책망하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상기시킨 교훈에 대해 구약성경으로 인증(認證)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Hendriksen).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조 에고, 레게이 퀴리오스) - 이 말은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민14:28; 사49:18; 렘22:24,46; 겔 5:11;14:16;16:48;17:16;18:3;20:13), 반드시 성취될 중차대한 진리를 선언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주께서 중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요 3:3, 5, 11;5:19, 24,25)라는  규칙적인 관용구를 사용했던 것과 흡사하다.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 사 45:23의 문자적 인용이다.

다만 '여소몰로게세타이'(*자백하리라')와 '파사 글롯사'(*모든 혀')이 두 단어 순서가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준 이 예언의 말씀은(사 45:23) 여기서 구약성경의 원래의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

즉  한 분이신 지고(至高)한 하나님의 최종적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최후 심판시에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무릎꿇고 인정할 것이다(사 45:21).

예컨대 남을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행위는(10절)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심판의 영역을 침해한 것이다. 따라서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우상 숭배의 올무에 빠지는 행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1:21-25).

그리고 '자백하다'(*여소몰로게오)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70인역(LXX)에서 '인정하다', '자백하다', '찬양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15:9;마 11:25;눅 10:21;Dunn).

이는 모든 사람이 최후에는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자백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내용에 대해 모든 인류가 주께 찬양하며  경배하고  복종하게 됨을 나타낸다.

즉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판단하는 이방인들의 회심(悔心)을 암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 행위인 구원과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이 자기들이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방인들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의 회심이 이스라엘과 성경에 의해서 선포된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순종임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 안에서 서로 받을 것을 촉구한 것이다. 아울러 사 45:23의 인용문이 빌 2:10, 11에서는 부활하시고 승귀(昇歸)하신  그

리스도의 신분과 역할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자백'을 말할 때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하나님께 자백하리로다', 즉 하나님의 심판에 적용되어  사용되었다

는 사실을 볼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주권과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 사이에서 균형과 조

화를 이루려고 하는 자신의 통상적인 습관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이것은 특별히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이다(Murray, Cranfield, Godet). 사람의 행동이 형제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특히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다(Cranfield, Godet, Murray). 예컨대 바울은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즉 바울은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할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부딪힐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콤마'(*)는 글자 그대로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지게까지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stumbling block; KJV, RSV). 그리고 '거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론'(* )은 어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마련된  장애물 또는 덫(obstacle;NIV)을 뜻한다(Meyer, Murray).


즉 이 용어는 죄로 끌어 들이기  위해 유혹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묘사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의 십자가 지는 것을 만류하려 했을 때 '스칸달론'을 베드로에게 사용했었다(마 16:23). 그리고 이 두 용어는(프로스콤마, 스칸달론) 의도적으로 형제를 꾀어 그에게 죄가 되는 것을 행하도록 유혹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경고로서 사용된 것이라 하겠다. 비록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동기가 한 형제를 '연약한 자'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순수한 열망에 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본절에서 믿음이 강한 성도들에게 촉구하는 것은

(1) 그들이 다른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것(2) 다른 형제들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의 훈계는 강한 자들의 어떤 행동이 다른 성도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도 있고 근심되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강한 자들이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그 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일을 한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 ?'를 늘 생각하여 공동체의 건덕을 위해 사려깊은 행동을 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Harrison).


14: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표준새번역]롬 14:20

음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


[현대인의성경]롬 14:20

음식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망쳐 놓지 마십시오. 음식은 다 좋은 것이지만 어떤 음식을 먹어서 다른 사람을 죄 짓게 한다면 그것은 나쁜 것입니다.

 

[NIV]롬 14:20

Do not destroy the work of God for the sake of food. All food is clean, but it is wrong for a man to eat anything that causes someone else to stumble.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바울은 비본질적인 음식물에 대한 이견(異見) 때문에 본질적인 하나님의 사업(일)을 파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세우라고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업'(*토 에르곤 투 데우)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

(1) 혹자는 하나님이 세우고 계신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Sanday, Barrett, Kasemann).

(2) 구원사건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았다(Michel).

(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연약한 형제 즉 하나님이 갓 창조하기 시작한 사람 속에서 일으키는 구원 사역을 의미한다(Robertson, Murray).


여기서 (1)의  견해도 무난한 해석이라고 생각되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3)의 견해인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에 비추어 볼 때 13절 이하에서 계속해서 강한 자에게 교훈을 주면서 연약한 자가 근심케 되지 않기를 그리고 그로 인해 망케 하지 말라고 권고하기 때문이며(15절) 나아가 하나님이 불러 구원하신 한 영혼이 장성(長成)하여 굳세게 서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주된 목표이기 때문이다(Carnfield, Barmby).

   만물이 다 정하되(* 판타 멘 카다라)  - 14절을 반복한 교훈으로 강한 사람들의 슬로건처럼 보이는 이  말을(막 7:19; 행10:15; 고전 8:4-8) 바울은 먼저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음식물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깨끗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14절의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라는 말처럼 한정적 의미의 뜻이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 바울은 만물이 다 깨끗함을  인정하였지만 거기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음식물 자체는 그릇된 것이 없지만 만일 음식물을 먹는 습관이나 마음의 자세가 어떤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먹을지라도 나쁘다는 것이다(Bruce).

그러면 여기서 '거리낌으로 먹는'(*프로스콤마토스  에스디온티) 행위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된 견해가 있다.

(1) 약한 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압력을 받아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고기를  먹는 행위를  말한다(Kasemann, Chrysostom).

(2) 형제의 연약함을 보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고기를 먹음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강한 자들의 무절제한 신앙 행위를 가리킨다(Calvin, Hodge).


여기서 원어, 개역한글 성경, [KJV], [ASV]등의 해석으로 보면 (1)의 견해가 타당하고, 그 이외의 모든 한글 성경 및 [NIV]의 번역을 보면 (2)의 견해가 타당하다.

그러나 14장의 전체적인 내용 및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21절 내용의 맥락으로 볼 때는 (2)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 같다.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현대인의성경]롬 14:22

이런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대로 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NIV]롬 14:22

So whatever you believe about these things keep between yourself and God.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condemn himself by what he approves.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 이 구절은 일반적인 것으로 강한 자와 연약한 자 모두에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Robertson, Cranfield)  십중팔구 주로 강한 자들에게 주는 권고이다(Murray, Harrison, Calvin).  왜냐하면  자기의 확신에 따라 은밀히 행동할 것을 경고받은 자는 다름 아닌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15,20, 21절).

이는 자신의 신앙의 확신과 자유를 즐기기 위해서 그것을 외적으로 함부로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며 오히려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隱密)한 일로서 자신의 내적 삶에서만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자의 자유권이 공공연하게 행사된다면 이는 연약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므로 이러한 자유권의 행사는 가능한 한 삼가야 하기 때문이다(Harrison).


즉 믿음의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그 믿음의 자유를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 구절은 앞 내용과 계속되는 것으로서 강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선언이다(Murray).

그런데 이 문장을 자신이 행하는 일의 정당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다는 일반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양심이 무딘 그리스도인들도 복되다는 진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Cranfield).

여기서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도키마제이'(*)로  자신을  '시험하다', '검토하다', '분석하다'(*도키마조)의 현재 능동형이다. 그리고 '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크리논'(*) 역시 '정죄하다',  '심판하다'(*크리노)의 현재 능동형이다.

따라서 이 선언은 자신의 신앙 행위를 스스로 면밀히 검토하여 자신의 신앙 양심에 가책(呵責)이 없다면 즉 자기가 확신하여 행동한 바에 대하여 전혀 갈등이 없는 상태를 소유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선언이다(Calvin, Godet).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 이 구절은 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교훈으로서 앞 절(22절)에 묘사된 강한 그리스도인과 대조를 이룬다(Murray).강한 형제가 가진 그 특별한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따라서 자기 행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심정으로 고기를 먹는다면 정죄(定罪)를 받는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 이 구절은 앞의 내용이 왜 그런가를  명확히 제시한다. 즉 의심하고 먹는 자가 정죄된 이유는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말해 그의 믿음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허락한다는 완벽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확신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위선적인 행동을 한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갈2:11-14). 그는 확실히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고 따라서 바울의 책망을 들었을 때 항변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양심이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행동한 것이 필연적으로 정죄받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의 의미는 본절 후반절에 나오는 믿음의 의미와 같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 이는 본장의 결론적인 선언이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의  믿음을  뜻한다(Godet).

(2) 선한 양심같은 그 무엇을 뜻한다(Sanday and Headlam).

(3) 어떤 특별한 행위에 대해, 말씀의 원리에서 깨달은 마음의 확신을 말한다(Cavlin, Murray).


위의 견해 중 세번째가 가장 무난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장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믿음(1, 2, 22, 23절)과 어울리는 유일한 해석이 (3)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3)의 견해는 실제적으로 부분적인 면에서 (1)과 (2)의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Robertson).  


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표준새번역]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공동번역]롬 15:3

그리스도께서도 당신이 좋으실 대로 하시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을 내가 대신 다 받았습니다" 라는 성서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NIV]롬 15:3

For even Christ did not please himself but, as it is written: "The insults of those who insult you have fallen on me."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 헬라어 원문에는 접속사 '왜냐하면'(*가르)을 사용하여 앞 절의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여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성도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경험하셨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혹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며 모든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살 것이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다(요 8:29).

그는 비록 많은 사람의 반대를 불러  일으켜  자신에게 죽음이 초래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요 2:17)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중단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셨다.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이것은 시 69:9(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의 인용이다. 시 69편은 고난의 시로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리스도를  박해한 자들을 보응할 것에 대한 예언이다(F.F. Bruce).

이 인용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순종의 결과로 비난과 모욕을 받아 죽음을 당하시리라는 것이다.

이렇듯 바울은 시 69:9을 인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뜨거운 마음을 품고 그것을 실행하다 보면 사람들의 비난과 반대에 부딪혀 오해와 중상을 받게 되지만 이 때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끝까지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15: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표준새번역]롬 15: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15:8-9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표준새번역]롬 15:8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시지 않고 모두 받아주신 이유와 목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래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당하는 것으로서(갈2:7-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이며 인(seal)으로 받게 한 것이다. 이처럼 이방인과 구별되어 선택받은 선민의 상징으로 실시되어온 할례는 유대인의 약속과 특권의  표이다(John Murray).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할례의 수종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할례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태어나셨고 또 친히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계약인 할례의 법에까지 순종하셨을 뿐 아니라 언약을 맺은 계약 백성 중의 하나가 되셔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수종자' 곧 '봉사자'가 되셨다는 뜻이다. 특히 '수종자'(*디아코논)란 말이  가리키는 의미는 '종' 또는 '섬기는 자'란 뜻이다(막 10:45;눅 22:27).

그리스도는 종으로서 낮게 되시기까지 하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창12:1-3;17:1-8)을 친히 수행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역은 당시 유대인에게 국한된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분명 그것은 전인류를 위한 구속의 사역이었다.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입증하기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효과 및 목적을 나타내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즉 아브라함에게 한 자손을 허락하셔서 그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오게 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리라(창 12:1-3)는 약속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견고케 된 것이다.

바울이 이 말을 언급한 것은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경시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우선권을 주셨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를 가진다. 즉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근원 역사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E.F.  Harrison).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목적을 상기시켜 구원이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이방인까지 포함함을(9절) 가르친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진행 순서상 이스라엘이 먼저일 뿐이지 결코 이방인을 제외시킨 것이 아님을 알게 하므로써 유대인 신자들로 하여금 이방인 신자들을  멸시치 못하게 한 것이다(J. Calvin).


15:9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이 구절은 시 18:49 (
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을 인용한 것으로 다윗이 주변 이방인들을 정복한 후 그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이다. 이것은 유대인인 바울 자신이 이방인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고 그로 인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1:8).


15:10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이 두번째 인용문은 신 32:43(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의 모세 노래의 마지막 절 내용으로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15:11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세번째 찬송시는 시117:1(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의 인용 구절로서 이방인들이 회심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Godet). 이로 인해 모든 열방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송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15:12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NIV]롬 15:12

And again, Isaiah says, "The Root of Jesse will spring up, one who will arise to rule over the nations; the Gentiles will hope in him."


[현대인의성경]롬 15:12

또 이사야도 "이새의 후손이 나타나 모든 민족을 다스릴 것이니 이방인들이

그에게 희망을 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사 11:10(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말씀의 인용이다.


'이새의 뿌리'(*해 리자 투 옛사이)는 왕적 메시야를 가리키는 칭호로서(사 11:1-5;계 5:5;22:16) 곧 그리스도를 지칭한다(Dunn). 성경은 다윗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가 날 것을 예언하였고(사11:1,10)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로서 그리스도의 육적계보를 형성했다(삼상16:11- 13;17:12).


15: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공동번역]롬 15:15

다만 내가 이 편지에서 가끔 지나칠 정도로 강조해서 말한 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은총으로 주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표준새번역]롬 15:15

그러나 내가 어떤 부분에서 매우 담대하게 쓴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현대인의성경]롬 15:15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몇 가지 점을 상기시키려고 이것을 아주 담대하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담대해진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NIV]롬 15:15

I have written you quite boldly on some points, as if to remind you of them again, because of the grace God gave me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에파나밈네스콘)는 잘 쓰지 않은 용어로 신약성경에서 본 절에만 나온다. 그 뜻은 '어떤 교리를 반복한다'는 의미이다. 즉 그들이 알지 못한 어떤 새로운 것을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회상시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은 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라고 했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1) 복음의 원리와 명령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행함에 부족함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더 굳건히 세우기 위해서다.

물론 성숙한 신앙적 면모를 갖춘 로마 교회였지만 온전함에 이른 것이 아니었기에 바울은 다시 한 번 진리를 일깨워 주어 로마 교회를 튼튼하게 세우려고 하였을 것이다.

(2) 이미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는 수신자들의 신앙의 질을 존중해 주는 예의 바른 태도이다(Dunn).

(3) 또한 여기서 가르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구태여 '생각나게 하려고'란 용어를 쓴 것은 바울의 신앙 인격의 겸손한 표현법이다(Hendriksen).

이는 형제를 권면할 때에 상대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모범을 보여준다.

   더욱 담대히(*톨메로테론) - 이 말은 비교적인 의미가 내포된 부사로서 바울 사도의 다른 서신보다도 본서를 '더욱 담대한 마음으로' 썼음을 나타낸다(12:3;14장).

바울은 자신이 로마 교회를 세우지 않았고 또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정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겨 주심을 생각할 때 그들을 권면할 자격을 찾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

   대강(*아포 메루스) - 이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1) '부분적으로' 혹은 '어떤 곳에는'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Meyer).

(2)  '다소' 또는 '어느 정도'라고 해석될 수 있다(Murray, Godet).

여기서 우리는 두번째 해석을  취한다 해도 크게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첫번째 견해를 취함이 좀더 적절한 해석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더욱 담대히'란 말은 (1)번의 해석과 연결시킬 때 비교적인 의미가 선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어느곳에서는 내가 더 대담하게 썼다'고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느 곳에서'(부분적으로)란 6:12,19; 8:9; 12:3; 13:3,13, 14; 14:3,4,10,13,15,20 등을 들 수 있다(Meyer).

위와 같은 구절들에서 바울은 더욱 담대한 권면을 하고 있다.


15:16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표준새번역]롬 15:16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성경]롬 15:16

그것은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 이것은 신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비유적 표현으로서 아마도 사 66:20(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로부터 발전된 개념일 가능성이 높다(Murray).


바울은 여기서 '이방인'(*톤 에드논)과 '제물'(*헤 프로스포라)을 동격으로 취급하여 복음에 의하여 얻어진 이방인을 사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즉 영적인 희생 제물이라고 말하고 있다(Godet, Meyer). '제물'이란  제사 의식에서 마지막으로 바쳐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비유적인 표현에서 우리는 복음 전파자의 사역의 목표를 보게 된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단순히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순종케 함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물이 되도록 그들의 영혼을 성결케 해야 한다는 사명인 것이다. 이런 뜻에서 사도직의 기능을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함으로 묘사했고, 사역의 대상인 이방인을 구약의  제사에서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로  비유하여  나타낸  것이다(Calvin).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하심이라 - 당시 복음을 통해 회개한 이방인 신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 불결하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신자들이 있었기에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고 깨끗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하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Blaiklock).


15:18-19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표준새번역]롬 15:18-19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룩하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적과 이적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이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


[NIV]롬 15:19

by the power of signs and miracles, through the power of the Spirit. So from Jerusalem all the way around to Illyricum, I have fully proclaimed the gospel of Christ.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쓰신 도구, 즉 방편과 원리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1) '말과 일이며'(*로고 카이 에르고). 이것을 혹자는 그의 설교와 수고, 또는 전도와 생활이라고 말한다(눅24:19; 행7:22; 고후10:11, Robertson).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말'(word)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한 사도 바울의 모든 노력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대개 그의 가르침과 설교(복음 증거)를 말한다.

그리고 '일'(deed)은 복음을 위한 그의 행적과 고난 즉 실천적 행실이 있는 삶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를 통해 나타나는 이런 것들을 거룩한 도구로 쓰셔서 구원 사역을 이루셨다(Lenski).

(2)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엔 뒤나메 이 세메이온 카이 테라톤).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을 향한 효과적인 전도 사역을 위하여 바울로 하여금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행 13:7-12).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행 2:22)과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나타났다(행 5:12). 

여기서 '표적'(*세메이온)영적인 의미로서 인간들의 눈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를 의미한다(signs, KJV, RSV). 즉 영적으로 볼 수 없는 실재를 눈 앞에 나타내준 증표인 것이다. 그리고 '기사'(*테라톤)는 놀라운 일을 뜻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즉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을  말한다(miracles, NIV).

이로 보건대 표적과 기사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자임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임을  증거한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그 복음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역사상에 현실로 임했음을 일깨워 주는 표이다.

(3) '성령의 능력으로'(*엔 뒤나메이 프뉴마 토스). 이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가) 본절의 결론적인 어구로서 사도의 사역이 성령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했음을 나타내 준다(Calvin).

  (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도에게 주신 능력이다. 따라서 이 어구는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 것 외에는'이란 구절과 연결된다(Meyer).

  (다) 사도를 충만케 한 거룩한 능력이다(Godet).

  (라) 사도의 복음 전파를 열매 맺게 한 실질적인 능력이다(Murray).

이를 종합해 보건대 '성령의 능력'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서 사도를  통해  나타내신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을 가능하게 한 장본인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복음 전파의 열매가 맺혀질 수 없다. 거룩한 성령께서 모든 방편들을 들어 도구로 쓰실 때 하나님 나라의 열매가 있을 것이니 모든 사역자들은 능력의 근원인 성령을 의지해야 할 것임을 암시한다.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  본절의 의미는

'나는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순종케 하기 위해서 나를 통해 말과 일, 표적과 기사의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이다(Meyer, Godet).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서 소아시아와 지중해 북부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전도 여행을 하였다(행 13-21장), 그가 복음전도를 시작한 것은 다메섹과 아라비아 지방에서부터였으며(행 9:19, 20), 본격적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안디옥에서였다(행 11:25, 26;13:1-3).

그런데 어째서 그의 전도 사역의 출발점을 예루살렘으로 말했는가 ?

여기에 대해서 혹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전도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였다고 한다(F.F. Bruce).

또한 혹자는 복음 전도의 출발점과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곳을 언급했다고 한다(Lenski).

후자가 좀더 타당한 의견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행 1:8에서처럼 복음은 예루살렘으로 시작해서 땅끝까지 전파될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루리곤'(Illyricum)은 아드리아 해의 동쪽 연안, 마게도냐에 근접해 있는 로마의 속령으로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에 해당한다. 공식 명칭은 일루리아(Illyria)로 바울은 3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 일루리곤 지역을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행 20:1, 2).

아무튼 사도는 여러 해에 걸친 자신의 사역의 결과를 언급하는데서 자기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나 회심자의 수효, 또는 이러한 사역에 뒤따른 고난 등에 관한 설명을 생략하고 단지 자기가 수고한 경로를 표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인용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Harrison).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 '편만하게 전하다'의 헬라어 '페플레로케나이'(*)는 '플레로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부족한 것으로 보충하고 완결짓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직역하면 '복음을  채웠노라',  '복음 전하는 일을 완성했노라'(NEB)로 번역할 수 있다. 또한 복음을  모든  곳에  전파하여 '완전히 밝히 드러내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Godet). 칼빈(Calvin)은 이것을 '바울이 부족된 것을 보충하면서 복음 전파를 넓게 퍼뜨렸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하여 바울의 전도 활동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그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큰 도시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다음 그 지역의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그 교회를 맡겨 그들로 하여금 그 주변 지방들을 보다 강력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복음화시키도록 한 듯이다.


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NIV]롬 15:20

It has always been my ambition to preach the gospel where Christ was not known, so that I would not be building on someone else's foundation.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의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 지금까지  동양에서의 자신의 활동이 거둔 성공에 대해서 언급하였다(19절). 그리고 이제 본절에서는 서양에서의 미래 사역과 로마 방문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기 위해 그가 항상 자기  사역의  지침으로 삼아온 원칙을 상기시키고 있다(Godet).

이러한 고백은 이미 다른 전도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확고한 선교  정책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닥치는 희생과 고난이 아무리 많더라도 복음을 위한 길잡이가 될 책임을 맡겠다는 그의 소망을 표현해 주고 있다(Harrison).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갖고 있는 바울이(1:8, 14, 15;행 1:8) 여기서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한다는 자신의 선교 정책을 말한 것은 단순히 사도직의 구별의식이나 우월 의식에서 한 말이 아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역의 독특한 특징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할 신성한 일을 자기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주장하지 않고  다른  사역자들의 전도 활동과 열매를 존중한다는 의사 표현이다. 즉 이미 복음이 전파된 곳에 또 가서 전하는 이중적 일을 하지 아니하여 하루라도 빨리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고자 한 열망에서, 바울은 그러한 선교 원칙을 취한 것이다. 바울의 이런 선교 원칙은

그 결과 얻어지는 공적을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기독교 선교의 경제성을 위해서였다. 아직도 미개척지가 많은데 한 곳에 사역자들이 모이는 것은 기독교  전체의 공동 사역(team ministry)이란 관점에서 볼 때 비효율적이므로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고통을 무릅쓰겠다는 순교적 자세를 바울은 항상 갖고 있었던 것이다.


15:21 기록된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본절은 사 52:15(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의 70인역(LXX)의 문자적 인용으로서 앞절(20절)에서 말한  바울의 선교 정책이 자기 고집이나 자랑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이방인을 위한 전도 사역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유명한 이사야의 '종의 노래' 즉 메시야의 자기 비하(빌 2:7, 8)와 고난과 승귀(빌 2:9-11)가 완벽하게 응결되어 있는 사 52:13-12의 내용으로서 그 종이  많은 민족과 왕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


15: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 '이지방'(*토이스 클리마시 투토이스)은 복수이므로 '지방들'을 말하며 바울의 현재 선교하는 지역들을 의미한다. 즉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까지 지중해 동부 지역의 도시들을 가리키며 대체적으로 에베소, 고린도, 데살로니아, 빌립보, 다메섹 등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곳을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19절). 이제 더 이상 그 지역에서는 복음을 전할 새로운 곳이 없었기 때문에 좀더 새로운 지역에 눈을 돌리고자 하였다.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  '여러 해 전부터'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 폴론 에톤'(*)은 '상당히 오래 전의 해부터'라고 직역할 수 있다(Robertson). 바울의 서바나와 로마 방문 계획은 갑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계획된 것이었다.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대개 로마 교회의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바울의 서바나에 대한 전도 계획은 그가 지중해 동부 지역에 전도 사역을  치중하였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서바나는 서쪽 변방으로  땅끝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곳에 복음을 전파하기에 앞서 그가 로마에 들르기로 작정했던 것은 로마가 당시 세계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바나 선교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로마 교회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선교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서만은 아님을 1:11-13에서 보여준다. 즉 선교 계획에 동참하게 하기 전에 저들의  믿

음을 확인하고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저희를 견고케 하며, 영적인 사귐을 통해 피차 유익을 받고 안위케 하려는 목적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위에서 '원'(*에피포디안)이란 '간절한 열망'으로서 본 절에서는 서바나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하지 않고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라 했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15:31 나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NIV]롬 15:31

Pray that I may be rescued from the unbelievers in Judea and that my service in Jerusalem may be acceptable to the saints there,


[표준새번역]롬 15:31

내가 유대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화를 입지 않도록, 그리고 또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쁜 선물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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