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경해석

갈라디아서 해석

白鏡 2006. 12. 5. 17:18
  (First Revision : Feb 14th, 2007 - '양선'"충성" 편)

 

<갈라디아서 구문해석>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인간적인 기원이나 수단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처럼 자신의 사도권을 편지의 서두에서 강조하는 것은 당시 바울이 예수의 열두 제자들 중에 하나가 아니었다는 이유를 들어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거짓 교사들로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을 심하게미혹(迷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바울은 실제로 예수의 열 한 사도들처럼 예수의 지상 사역을 목격하거나 맛디아처럼 공식적으로 선출되지 않았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였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소명을 받았으므로 조금도 사도의 자격에 부족한 것이 없었다(행 9:1-17;26:14-18).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은 '알라'(*'그러나')로 시작되고 있어 바울의 사도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사도권의 기원을 언급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함께 언급하였다. 이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신 분이심을 전제하였음을 보여준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기원(起源)이 부활하신 주님에 있음을 밝힘으로써 더욱 그의 논지를 분명히 한다.

주의 부활은 당시 초대 교회성도들의 신앙의 근거요 '다메섹의 경험'(행 9:1-18)을 통해서 회심한 바울 자신의 신앙의 근거였다(Longenecker).


   사도된 바울 - '아포스톨로스'(*'사도')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이는 사도 바울 자신만이 유일한 사도인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예수의 열두제자들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도'라는 칭호는 사용되었다. 원래  '아포스톨로스'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개인이나 단체의 권익을 옹호하는 대표자를 의미했으나 예수께서 오신 이후에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Boice). 한편 초대 교회는 사도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행1:21-26).

(1)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과 부활하신 주를 목격하고

(2) 그리스도에 의해 복음 사역자로 택함을 받은 자가 그것이다.


1: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 - 바울은 보통 그의 서신서의 서두에서 인사말을 할 때에  동역자들의 이름을 밝히지만(고전 1:1;고후 1:1;빌 1:1;골 1:1 등), 단지  '형제들'이라고 표현한 경우도 종종 있다(살전 1:4). 여기서 '형제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1) 혹자는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의  무리라고 한다(Lenski).

(2) 혹자는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 중에 있는 선교단 전체를 의미한다고 한다(R.E. Howard).

(3) 혹자는 바울을 지지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4) 혹자는 이 편지가 수리아 안디옥에서  남쪽 갈라디아에 보내 는 것이라고 보고 '형제들'이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Longenecker).

(5) 혹자는 이 편지가 고린도에서 북쪽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라면 고린도에 선교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을 통틀어 가리킨다고  본다(Hendricksen).

위의 견해들 중(4),(5)번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 '부르신 이'는 3절에 나오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구속 사역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며(엡 1:3-5;벧전 1:2) 또한 계획하신 대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분이시다(고전 1:9). 바울은  이처럼 당신의 자녀를 부르시는 분이 삼위 중에 제일 위격인 성부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15절;롬 8:30;9:24;고전 7:15, 19;살전 2:12 등).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시는 것은 명백한 계획으로 되었고 그 계획은 완전하며  하나님의 의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갖는다.


  이같이 속히 떠나 - '이같이'(* 후토스)라는 말속에는 바울의 깊은 탄식과 안타까움이 있으며 '속히'(*타케오스)라는 표현 속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복음을 좇은 것도 이상한데 상상외로 빠르게 복음을 떠나는 모습들을 보았을 때 더욱 의아해 하고 안타까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아 교인들 중 유대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거룩한 삶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진리를 버리고 구원에서 떠나는 자들이 되었을 것이다.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 '다른'(*알로)은 6절에 사용된 '다른'(*헤테론)과  차이가 있다. 

즉 '알로'는 많은 것들이 있는 가운데 다른 것을 지칭하고 '헤테론'은 단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가리킨다(TDNT). 

이렇게 볼 때 본 절에 '헤테론' 대신 '알로'가 사용된 것은 복음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강조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6절의 '다른 복음'은 '또 하나의 복음'이 아니라 왜곡된 복음을 의미한다(Cole).

   너희를 요란케 하여 - 헬라어 '타랏손테스'(*)는  문자적으로 '소란케 하는 자들'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행17:8에서 바울을 시기하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켰던 일에 사용되기도

했다. 거짓 교사들이 교회를 소란케 하는내용은 (1) 복음을 변질시키며 (2) 교회의 질서를 혼란시키는 것이다.


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현대인의성경]갈 1:14

나는 같은 나이 또래의 그 어떤 유대인들보다 유대교를 신봉하는 데 앞장섰으며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데도 누구 못지않게 열심이었습니다.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 '택정하시고'의 헬라어 '아포리사스'(*)는 '어떤 경계로부터 떨어지게 한다'는 뜻으로서 어떤 특정한 직분이나 사역에 관련

하여 성별(性別)됨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2:12;행 19:9).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부르심이 '어미의 태로부터' 된 것임을 고백하고 있다(사 49:1;램 1:5).

(사49:1)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바울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과 예정을 선지자나 사도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 된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있다(롬 9:11).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이방인의 사도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오직'(*알라)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또한 구태여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16절)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아라비아'는 매우 광범위한 지역이기 때문에 바울이 갔던 장소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사실 다메섹도 아라비아에 속한 곳이므로 다메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으로 갔으리라 추측된다(Cole, Huxtable).

혹자는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것을 상기하여 이곳을  시내산 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ightfoot). 그러나 이 견해도 명확한 근거가  없다. 

의미상 '아라비아'는 예루살렘과 상관없는 장소이며 또한 바울 자신이 개인적으로 예수의 계시를 체험하고 이해한 장소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그의  삶과 가치관이 변화되었지만 자신이 경험한 계시를 체계화시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준비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 나가 기도하신 것과 유사하다.

바울은 광야에서 혈육과 분리되고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영향도 받지 않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 즉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사역을 위하여 준비하는 기간을 가졌다.


다메섹:Domascus(지명) 


(qc,M,r]D", Domascus)


(1) 다메섹이란 수리아의 성읍(창15:2)으로서 지금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의 히브리식 발음이다.

(2) 본래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아람의 수도로서 다윗이 정복(삼하8:5-6)하고
(3)
다윗 죽은 후 다시 수리아 왕조의 수도가 됨(왕상11:23-25).
(4) 주전 732년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다가, 주전 64년부터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5) 바울다메섹에 도망했을 때는 아레다 4세 총독이 지배했던 때(고후11: 32).
이곳에서 있었던
바울의 회심은 유명하다.

(6) 유다와 아나니아의 집(행 9:10) 그리고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내려왔다고 하는

성벽(고후 11:33,행 9:25)은 현재의 다메섹에서도 볼 수 있다.

(7) 동문 성벽을 끼고 돌면 바울의 문이라는 곳이 있는데 바울이 이 문에 매달려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다마스커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240Km나 떨어져 있었지만 오래 전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어온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주후 66년 네로 황제의 대 박해 시에 다마스커스에서 학살당한 유대인의 숫자만 1만5백 명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사울이 이 먼 도시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사도행전 8장 1절이 밝힌 바, 스데반의 순교로 촉발된 대 핍박으로 인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진 사람들 중에 다마스커스를 행선지로 삼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울은 그들을 색출하여 예루살렘으로 연행해오기 위해 자진하여 대제사장의 공인을 받은 뒤 일행을 거느리고 다마스커스를 향하고 있었다.



1:18,19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 본 구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1) 바울이 회심하고나서 삼 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즉 문맥상 바울이 자신의 독특한 회심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회심에 역점을  두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Boice,  Huxtable,Lenski).

(2)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온 때로부터 삼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게바를 만나기 전에 상당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3년이란 기간을 문제 삼아 본문의 기록이 행9장에 나타난 바울의 행적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가가 행 9장에서 바울의 행적에 대하여 기록할 때 '아라비아로 간것'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의 침묵이 바울의 아라비아 행을 부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는 못된다.
누가는 단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아니한 기간에 대하여 침묵한 것뿐이며 그 반면에 바울은 본서에서 게바를 만나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再定立)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는것이다.

   게바를 심방하려고 - '심방하려고'의 헬라어 '히스토레오'(*)는 영어의 '히스토리'(history, '역사')의 어원이 되는 말로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의미이다. NEB는 이를 '게바와 가까워지려고'(to get know)라고 번역하였다.

본 구절은 행9:26-30에 기록된 사건으로 바울은 바나바에 의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된 이후에 베드로를 찾아갔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면서 베드로와의 만남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다.

(1) 2절에서 언급한 자신을 지지하는 '형제' 가운데 베드로가 포함되었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2)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문이 사적인 방문이며 어떤 인간적인 권위의 지지를 얻으려는 방문이 아니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양자가 조심스럽게 적용되어야 하겠으나 문맥상 후자를 택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주께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형제 야고보 - 바울이 만난 야고보가 세베대의 아들이면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마 10:2)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가 아니라 예수의 친형제 야고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예수의 선교 초기에 그의 형제들과 친족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친 자로 여겼다(막 3:21;요 7:5).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그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었으며(행 1:14)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되었다(2:9,12; 행12:17;21:18 등).

어떤 학자는 바울이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느냐 또는 인정하지 않느냐에 관심을 가지지만(Cole),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사도 개념으로 이해할 때 지도자인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바울이 왜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외에 야고보만을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바울은 예수에 대한 보다 넓고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하여 수제자를 택했으며 또한 예수의 친형제를 택한 것 같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에게도 너그러웠으며 온유한 인격을 소유하였으므로 바울에게도 친절하게 예수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을 것이다.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NIV]갈 1:19

I saw none of the other apostles--only James, the Lord's brother.


여기서 개역한글에는 ‘보지 못하였노라’로 번역하여 마치 만나고 싶었으나 만날 수 없었다는 의미를 풍기나 모든 영어성경에는

‘saw none of ---' 즉 자신의 의지로 만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어 이 부분은 [표준새번역]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표준새번역]갈 1:19

그러나 나는 주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사도 가운데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1:21-22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 바울은 본 절에서 자신의 연대기적인  행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를 들러 길리기아 지방으로(행 9:30) 갔다가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하기를 바라는 바나바의 요청에 의해 수리아지방으로 갔다(행 11:25,26).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의 동남부 연안지대로서 바울의 고향인 다소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수리아는 팔레스틴 북부 지역으로 수도인 안디옥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바울이 이 두 지역을 언급하는 것은

(1)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먼 곳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며 

(2) 또한  예수를 만난 이후에 복음을 위해서 열심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증거 


   유대에...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

[NIV]갈 1:22

I was personally unknown to the churches of Judea that are in Christ.


'얼굴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프로소포'(*)는 '개인적으로'라는 의미이다(Longenecker). 행 8장에 나타난 박해로 인해 유대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어떤 인물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에 국한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변방(邊方)에 있던 유대인의 교회는 바울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Cole).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 바울이 13절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는데 본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고 표현한 것은 유대교의 회당과  구분 짓기 위함인 것 같다(Cole).


2;1 십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1) 첫번째 방문은 그가 회심한지 삼년 후에 베드로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행 9:26),

(2) 두번째 방문은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으며(행 11:29,30),

(3) 세번째 방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러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행 15:1 이하).


본절에 나타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이 이차 방문인지 삼차 방문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갈라진다.      

먼저 두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Bruce, Calvin)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행 15장의 세번째 방문은 공적  회의에 참석한 것이지만 2절에 의하면 바울은 개인적으로 예루살렘 지도자를 만났으므로 세번째 방문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2) 행 15장에는 디도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으나 본 절에는 디도와 바나바가 동행(同行)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본 구절의 방문은 세번째 방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3) 본절의 '다시'를 두번째  방문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견해는, 만일 1:18에 기록된 방문이 첫 번 째 방문이라면 문맥상 본 구절의 방문이 두번째 방문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진다.


다음으로 세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Berkhof,

Eerdman, Findlay, Robertson).

(1) 행15장과 본장의 주제가 동일하다는 것인데,  두 곳 모두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할례'를 다루고 있다.

(2) 행15장에서  지도자들 간의 연합을(행 15:8,9) 강조하고 있는데 본장에서도 동일하게 연합을 서술하고 있다(9절).

(3) 행 15장이나 본장이 모두 유대주의자들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견해들 가운데 본 절이 말하는 바울의 방문이 세번째 방문이라는 것이 더욱 타당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루살렘 공의회의 연대를 A.D. 49년경으로 보고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연대를 추정하면 1차는 A.D.35년,  2차는 A.D.46년(행11:30;12:25), 3차 방문은 A.D.49년에 이루어졌다. 여기서 만일 본장의 방문을 2차 방문과 연결시킨다면 바울의 1차 방문은 A.D. 46년에서 14년 전인 A.D.32년이 되며 또한 그가 회심한 시기는 그보다 3년 전인 A.D. 29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때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이어야  하므로 불가능하다.

(2) 두 번 째 방문을 주장하는 자들은 디도에 대한 언급이 행15장에 없다는 이유로 세 번 째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디도에 대한 기록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누락되어 있다.

(3) 바울이 두 번 째 방문을 생략한 것은 무슨 속임수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다루는 본장에서 다른 주제 즉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문제를 취급한 두 번 째 방문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4) '다시'(*팔린)는 두 번 째를 뜻하기도 하지만 요 18:27에서는 베드로의 세 번 째 부인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두 번째'를 의미하는 헬라어 '듀테론'(*)을 쓰지 않고 '팔린'을 사용한 것은 단지 방문의 반복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바나바

(1) 레위 지파 출신의 유대인으로

(2) 구브로에서 태어나

(3) 바울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으로서 이방인들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4)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파송되었다(행 11:22).

(5) 그의 본명은 요셉이었으나 사도들은 그를 '권위자', '권위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나바'로 불렀다(행 4:36).

(6)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로서(행 11:24) 초대 교회의 헌신적인 지도자였다.

(7) 그는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하고 바울의 체험을 변호하며 함께 사역하였으나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마가의 동행 문제로 바울과  결별(訣別)하게 되었다(행 15:36-41).


   디도 - 그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으로서 고린도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목회자이다(고후 8;23;12:18). 본 절에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등장하는 그는 바울이 '나의 참 아들 디도'라고 말할 만큼 바울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기록은 그가 로마에서 달마디아로 갔다는 것이다(딤후 4:10).


2: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 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계시를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아포칼립신'(*)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어떠한 인간적인 동기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님을 확실히 보여준다.  한편 행 13장에서는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이방인을 위해 파송되는 과정이 안디옥 교회의 결정임을 보여준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결정 배후(背後)에 하나님의 계시하심이 있음을 확신하였을 것이다(Hendriksen)

   달음질하는 것 - 바울은 개종 이후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당시의 운동 경기를 염두에 두어 묘사하였다. 

그의  달음질은 향방 없는 것이 아니라(고전9:26) 분명하고 확고한 목표를 향한 것이었다.

그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도자들을 사사로이 만나는 면밀한 계획을 갖기도 하였으며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NIV]갈 2:3-4

Yet not even Titus, who was with me, was compelled to be circumcised, even though he was a Greek.

This matter arose because some false brothers had infiltrated our ranks to spy on the freedom we have in Christ Jesus and to make us slaves.


[표준새번역]갈 2:3

나와 함께 있던 디도는 그리스 사람이지만 할례를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 때문에 할례를 강요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려고 몰래 끼어 든 자들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거행하도록  명령하셨다(창17:10-14).

그러나 세월이 경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의  언약적인  의미보다는 종족적이며 문화적인 우월감의 상징으로서 외적인 할례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고 급기야는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교회 안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함께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주장하여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할례를 강조했다.

한편  '억지로...아니하였으니'의 헬라어 '우데...에낭 카스데'(*)는 할례를 주장하는 강한 압력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는 바울의 굳건한 의지를 나타낸다.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회유(懷柔)에 말려들어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한 상황에서 바울이 할례 받지 않은 디도를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디도가 갈라디아 교회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거짓  형제'의  헬라어  '프슈다델푸스'(*)는 '프슈데스'(*)와  '아델포스'(*)의 합성어이다. '프슈데스'는 '거짓 사도'(고후 11:13), '거짓 선지자'(벧후 2:1)등에서 처럼 '거짓'이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본절에서 '파레이사크투스'(*,'가만히 들어온')와 함께 이 말을 사용하여 은밀하고 은근하게 복음을 훼손시키는 거짓 교사들의 교활한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바울이 '거짓 형제'라고 한 것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들은 최소한 내부에서 믿음을 배반한 사도들이나 성도들은 아닐 것이다(Lenski). 아마 '거짓 형제'는

(1)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며 모세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자들이거나

(2) 공의회의 결과가 갈라디아와 안디옥 교회에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 15:30) 계속해서 교인들을 미혹하는 유대주의자들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케 된 성도들을 다시 율법 아래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여 열심은 있으나 실제로는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였다 (후 11:26;벧후 2:1).  이러한 갈라디아 교회의 형편 가운데서 디도가 할례 받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자유 얻은 자로 하여금 자유를 잃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2: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 바울은 세 번에 걸쳐 '호이 도쿤데스'(*'유력한 자들')를 사용하여(2절)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 예루살렘의 사도를 지칭하였다(9절).  이러한 호칭 후에 곧바로 하나님은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언급하는 것을 보면 바울이 이 호칭을 풍자적 의미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Cole).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과 동시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전혀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2: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 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여기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는 구체적인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킨다(롬 4:9; 엡 2:11등).

아마도 유대주의자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서로 다른 것이 있다고 주장한 것 같다(Lenski).

그러나 바울은 사역 상 서로 다른 책임이 있을 뿐 어디까지나 복음의 내용은  동일(同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2: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기둥같이 여기는 - '기둥'(*스튈로이)이라는 표현은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탈무드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이스라엘의 세 '기둥'(*암무딤)이라 하였고 이스라엘의 계약 공동체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그들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Longenecker).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여 바울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기둥'에 비유한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가는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들이었다. 바울은 유대주의 자들을 향해 의도적으로 히브리적 개념을 도입해 논리를 펴나가면서 세 사도가 갖는 비중(比重)을 강조하였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 이 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지도자적 입장에 서 있었던 사실에 역점을 둔 것이다(행 15장).

먼저 야고보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바울은 1:19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냥 '야고보'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본장의 전체 맥락이 예루살렘 공의회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이었다.

바울이 다른 두 사도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이름을 먼저 기록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의장으로서의 야고보를 설명하기 위함인 것 같다(Boice).

그러나 다른 사도들의 이름이 뒤에 나왔다고 해서 예루살렘 교회 속에서 이들의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 모두 아홉 번에 결쳐 베드로를  언급하는데  일곱번은 '게바'라고  불렀으며(14절;1:18;고전 1:12;3:22;9:5;15:5) 두 번은 '베드로'로 칭하였다(7,8절). 특히 유대주의자들과 논의할 때 게바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베드로와 자신의 관계를 오해없이 설명하려 한 것 같다(Huxtable).


끝으로 요한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였다는 기록은 성경에서 본 절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여러 곳에서 함께 등장하며 또한 사역하였다(행 3:1;4:13;8:14 등)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덱시아스 에도칸  코이노니아스'(*)는 '교제의 오른손을 주었다' 라고 직역된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우정을 돈독하게 하고 동의한다는 의사 표시였다(Longenecker).


본절에 언급된 다섯 사람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즉 야고보와 게바, 요한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파에 주력하였다.

이 두 그룹은 서로 독자적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역에 협력하였다(행 15:25,26).

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았다는 것은 사적(私的)인 장소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는 의미보다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공식 석상에서 결의한 사항을 실행할 때에 함께 협력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손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Lenski).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NIV]갈 2:11

When Peter came to Antioch, I opposed him to his face, because he was clearly in the wrong.


여기서 베드로의 행위가 명백하게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더욱 뚜렷해진다.

(1)'면책하였노라'의 헬라어  '안테스텐'(*)이 문자적으로 '대항하다', '저항하다' 혹은 '반발하다'라는 의미로 베드로의 행위가 '복음의 진리'를 훼손(毁損)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2) '안텐스텐'의 시제가 부정과거로서 바울이 베드로를 성공적으로 책망했으며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에 대항하지 못하고 굴복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Lenski). 

(3) 더욱이 바울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아니고 공개적으로 면책하며 저지했다는 사실로 베드로의 잘못의 심각성이 더해간다(Hendriksen).


2: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 본 구절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식탁 교제나 성찬을 가리키는 것 같다.

본 절에서 초대교회 당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과의 식사를 꺼린 사실이 나와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유대인들은 레11장에 있는 정함과 부정함에 관한 규례를 철저히 지켜왔고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준수하려 하였다(민 25장,31장).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이방인들이 먹는 음식 중에는 레11장의 정결(精潔) 규례에 위배되는 것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따라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지 않으려 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들을 부연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한 규정들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들은 그 종류가 대단히 많고 다양했는데 초대교회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 못지않게 존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실례로 장로들의 유전에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위생상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고 이방 사람들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 손으로 음식을 먹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마 15;1-20;막  7:1-23). 

위와 같은 이유로 오랫동안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방인에 대한  배타심이 굳어져왔다.

이러한 것은 사마리아인도 인식하고 있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할 때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대답한다(요 4:7-9).


따라서 유대인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뿐 아니라 대단히 죄악된 행동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Hendriksen).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실제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이며 삶이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늘어나는 이방 그리스도인에 대해 몇 가지 제한 사항을 제시하고 다른 어떠한 율법의 행위로도 짐을 지우지 않는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행 15:14-21).


   저희가 오매...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베드로가 이방 그리스도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오자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행동의 동기는 예루살렘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Hendriksen). 또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사랑이나 자기 확신에 의해 나온 행동이 아니라 거짓과 위선의 행동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를 책망했다.


   남은 유대인들도...외식하므로 - 주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중 한 사람이요 공적인 위치에 있었던 베드로가 한 외식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복음의 자유가 첨예(尖銳)하게 대립되고 있는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베드로의 이러한 실수는 단순히 개인적인 외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1) 다른 사람들 심지어 바나바같은 지도자까지도 외식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근거가 되며

(2) 예루살렘  공의회(A.D.49)의 율법 무용론에 대한 결정을 무효화시키는 것이고

(3) 결과적으로는  율법주의에 굴복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 이 말은 바울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로서 그리스도와 성도 간에 누리는 친밀한 개인적 교제를 시사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며 동시에 전부라고 고백하고 있다. 특히 바울  신학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아담  안에서'(롬 5:12-19)라고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아담은 죄와 사망의 옛사람을 대표하지만 그리스도는 자유와 생명의 새 사람을 대표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실현하신 그리스도와 실존적으로 연합하여(롬 8:39;14:7;빌 2:1)  구원받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죄인으로 나타나면 - 본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Hendriksen).

다시 말해서 유대주의자들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음으로 율법을 폐기하는 죄인이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할 경우에 대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회심을  독려하는  문구로  해석한다(Cole).

(2)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는 견해이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 속에 죄악의 본성이 남아 있음을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주의자들이 가진 의식법과 율법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죄인인 것을  시인하는 역설이다(R.E. Howard).

그러니 그가 유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한다고 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정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


본절의 해석은 자신이 계속해서 죄인으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전체의 맥락과 연결시킬 때 후자가 보다 타당할 것 같다.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If I rebuild what I destroyed, I prove that I am a lawbreaker.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 본문은 다분히 베드로가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부터 떠나 다시 유대인의 옛 습관으로 돌아간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2:11). 바울은 다메섹의 체험(행 9:1-7)이후에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아니한 일관된 삶을 살았음을 고백한다. 또한 율법의 공로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결단코 없음을 밝힌다.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 '범법한 자'의 헬라어 '파라바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정의되는 '하마르톨로스'(*'죄인')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파라바텐'은  문자적으로  '배신자', '이단자'를 뜻하며 본 절은 바울 자신이 다시 율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배신(背信) 행위가 된다는 점을 말해준다.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For through the law I died to the law so that I might live for God.


[현대인의성경]갈 2:19

나는 율법에 관한 한 율법 그 자체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 바울은 '나'라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함으로 자신에게 있었던 실제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향하여 '죽는다'는 표현은 모든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하며 더 이상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었나니'의 헬라어 '아폐다논'(*)은 다음 절에 나오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쉬네스타우로마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둘 다 단회적인 것으로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는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역설적으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났다'는 표현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죄악으로부터 밀려오는 좌절감과 실패를 극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은 인간 속에 있는 죄를 더욱 죄 되게 만든다. 율법은  단지  죄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과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기능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언급되는 내용으로(1:4;3:1,13;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초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 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에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 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W.G.Coltman).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본 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나' 대신에 '그리스도'

(2) '율법' 대신에 '믿음'

(3)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 8:4).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I do not set aside the grace of God, for if righteousness could be gained through the law, Christ died for nothing!"

  

   하나님의 은혜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바울 자신이 그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게 된 신비적 연합의 사건이 '하나님의 은혜'로 묘사되고 있다. '은혜'의 헬라어 '카린'(*)은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과 우리로 아들을 믿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NIV]갈 3:3

Are you so foolish? After beginning with the Spirit, are you now trying to attain your goal by human effort?

[현대인의성경]갈 3:3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여러분 자신의 노력으로 완전해지려고 합니까?


3: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NIV]갈 3:4

Have you suffered so much for nothing--if it really was for nothing?


[현대인의성경]갈 3:4

기쁜 소식을 위해 많은 고난을 겪은 여러분이 이제 와서 그것을 버린단

말입니까?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현대인의성경]창 18:18

아브라함은 막강한 나라의 조상이 될 것이며 세상의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현대인의성경]창 22:18

그리고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므로 네 후손을 통해 세상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모두 저주 아래 있다는 바울의 말은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전제하고 있다.

이 말은 '율법을 따르는 자들은 칭의를 받을 수 없다'라는 율법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라기보다는 율법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의 율법을 어기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인간의 완벽할 수 없는 연약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의 율법도 어기지 아니하고 모든 율법을 지킨다면 그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인간의 죄인됨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율법을 따라야 하는 필연적인 의무를 가졌음에도(레 19:2 이하) 불구하고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7:23,24).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단지 정죄와 진노의 기능을 가질 뿐이다(롬 4:15;5:16, 18).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칭의를 설명해 온 바울은 이제보다 긍적적이며 적극적인 시각으로 칭의에 접근한다.

바울이 구약에서 인용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은 구원에 관한 여러 구절들 중에 하나이다.

본 구절은 원래 하박국이 갈대아인의 침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즉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신뢰로 이와 같이 고백하고 있다.

바울과 하박국의 입장이 다른 것은 사실이나 피할 수 없는 위기와 저주 가운데서 믿음으로(롬 1:17) 여호와를 바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Boice).

결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앞에 살고자 하는 자는 오직 '믿음'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바울은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구약을 인용하여(레 18:5) 믿음과 율법이 조화될 수 없는 관계임을 증거한다. 

율법으로 행하려는 자들은 끝까지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율법을 행치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구원하지 아니하는 심판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저주를 깨닫게 될 것이다(딛 3:4, 5).

(레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딛 3: 4,5)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속량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고라센'(*)은 '값을 치르고 사다', '되돌려 사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본절에서 이 말은 율법의 노예가 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가는 십자가의 피였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전(贖錢)의 개념에서 해석되며(출 21:30) 아들을 나무에 달리게 하는 저주(신 21:23)까지 받게 하신 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사 53:6).


(출 21:30)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현대인의성경]갈 3:16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여러 차례 약속하셨는데 여러 사람을

가리켜 '후손들에게'라 하시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후손에게'라고

하셨으니 바로 그리스도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 - 이것은 출 12:40에 근거한 기간이다. 그러나 이 기간은 접근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된다.

(1)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기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히브리어 본문을 기초로 한 번역본들에서 나타나고 있다(Boice).

(2) 아브라함과 모세 사이의 기간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이는 헬라어 사본(LXX)에 근거한 견해이다(Hendriksen).

(3) 아브라함의 언약이 확정된 야곱 때로부터 시내산 율법을 주신 때까지의 기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견해는 (2)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야곱에게 와서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주어지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지났다는 사실이다(Lenski, Howard, Cole).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바울은 다시 한 번 율법과 약속을 대립시킴으로 율법이 약속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것(17절)을 강조한다.

율법과 약속이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이유는 율법이 행함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행함은 구원을 이룰 수 없으며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큰 저주를 초래할 뿐이다.     

한편  '은혜로  주신'의  헬라어  '케카리스타이'(*)는 '카리스'(*'은혜')에서 온 말로 구원이 값없는 은혜임을 보여주며 이 말이 완료형인 것은  구원의 영원  불변성을 나타낸다(Boice).

또한 '유업'(*클레로노미아)이 약속에 의하여 주어졌다는 사실은 구원이 율법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율법은 구원을 이루는 수단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3:19 그런즉 율법이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현대인의성경]갈 3:19

그렇다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약속된 분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율법은 천사들이 전해 준 것을

사람이 받아 공포한 것입니다.


[NIV]갈 3:19

What, then, was the purpose of the law? It was added because of transgressions until the Seed to whom the promise referred had come. The law was put into effect through angels by a mediator.

    

* transgress :(법)을 범하다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 지금까지 율법이 약속을  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증명한 후에 이제 바울은 율법의 목적에 대하여 설명한다. 율법의 목적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한다.

공동 번역 및 현대인의 성경 등은 '범법함을 인하여' 대신에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지 않고 

'파라바시스'(*'범함')를 사용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율법의 목적을 논하면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고 할 때는  '하마르티아'를 사용했고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에서는 '파라바시스'를 사용하였다.


본 절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인간들은 '죄'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죄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율

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죄 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인식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 율법이 주어질 때 천사가 함께 했다는 암시는 신 33:2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스데반은 율법을 천사가 전한 것으로 언급한다(행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바울은 스데반이 따랐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본 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천사가 중보자가 되었다는 사상이 아니라 율법이 누군가에 의하여 즉 최소한 천사와 모세에 의하여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 (Boice).


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표준새번역]갈 3:20

그런데 그 중개자는 한쪽에만 속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NIV]갈 3:20

A mediator, however, does not represent just one party; but God is one.


본 절은  본 서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학자들의 견해도 250-300여개 정도로 너무 많이 있어 하나의 견해를 취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수많은 견해들을 세 가지 부류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중보'(*메시테스)는 일반적인 의미로 앞 절에서 제시한 중보 그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중보를 통해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주어졌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중보를 내세우지 않고 직접 세우셨다는 것이다(15-18절).

(2)'중보'를 모세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문맥에  비추어본  해석으로서

앞에서 줄곧 모세 율법에 관해 언급한데다가 본 절에서는 정관사 '호'(*)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정관사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꼭 한 개인을  지칭한다고 볼 수는 없다(Boice).

(3) '중보'를 그리스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바울이 딤전 2:5에서  '중보'라는 말을 그리스도에  관해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근거한다(Jerome,

Chrysostom, Cole).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에 비추어 보면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위의 여러 견해들이 일치를 보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본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중보에 의하여 전달된 반면 약속은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는 약속의 직접적인 전달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언약 체결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 준다. 또한 그리스도가 중보가 되었든지, 천사나 모세가 중보자가 되었든지 간에 율법이 직접 주어지지 아니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에 바울은 약속이 창15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인 일방성(一方性)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면서 율법보다 약속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현대인의성경]갈 3:21

그러면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은 서로 반대가 된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을 살리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롭게 되는 일이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율법이 약속을 폐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율법과 약속은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율법과 약속이 서로 대립된다면 하나님의 속성이 내부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이 되고 만다. 약속과 율법은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하여 주어졌다.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면,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필요한 요건이 되었다.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NIV]갈 3:22

But the Scripture declares that the whole world is a prisoner of sin, so that what was promised, being given through faith in Jesus Christ, might be given to those who believe.


[현대인의성경]갈 3:22

그러나 성경은 온 세상이 죄의 포로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약속된 것이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NIV]갈 3:23

Before this faith came, we were held prisoners by the law, locked up until faith should be revealed.


[표준새번역]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몽학선생(蒙學先生):Custodian(인명) 


[그] paidagwgov"(paidagogos)

[영] Custodian아이들을 돌보고, 보호 감시하는 사람(갈 3:24,25).

가르치는 교사는 아니었다. 과거 한국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칠만한 선생을 몽학훈장 이라고 했다. 옛 그리스의 양가에서는, 6세에서 16세의 어린이들의 생활을 보호하고, 감시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노예로 하여금 이일을 맡아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학교에 데려 가고 오는 일과 후견인으로서의 시중을 했다. 로마인들은 이것을 로마적으로 수정보완하여 답습했다. 바울은 이 관습을 써서 율법과 그리스도의 구원과의 관계를 설명했다(갈 3:23-25참조).

몽학선생의 임무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아이가 성년에 달하면 임무는 끝나고 신분적으로는 하나의 노예이다. 아이는 성년이 되기까지는 몽학선생의 감독에 복종하지 않으면 않되지만 성년이 되면 몽학선생의 감독을 떠나 본래의 아들인 신분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이 같이 율법은 미숙한 인간의 제어의 역할을 하다가 그리스도를 믿어 성년에 달한 자에게는 쓸데가 없어지는데 일면 그 효과로 말하면 그리스도에 이르게 하는 몽학선생의 일을 다 했다고 할수 있다.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어렸을 동안에는 - '어렸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오피스'(*)는 '말을 못하는 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네오피스'라는 단어를 기독교 진리의  장성한 분량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젖'을 먹어야 하는 연약한 자들을 비유하는데 사용하였다(고전 3:1, 2).

본 절에서는 성년과 대조하여 미성년의 상태를 가리킨다. 유대에서는 만 12세까지를 미성년으로 취급하였는데 이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는 있었으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종과 다를 바가 없었다.


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 로마 시대의 관습법상 미성년자는 14세까지 그의 아버지가 의뢰한 후견인 아래 있었으며 재산권은 25세가 될 때까지 청지기가 대신 관리했다. 그러나 이것은 엄격히 지켜야할 법률 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재량권(載量權)에 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아이들은 매년 3월 17일에 열리는 '리베랄리아'(Liberalia)라는 가족들의 잔치에서  성인이  되었고, 그 아이는 공식적으로 아버지에 의해 인정되는 아들이자 상속자로 받아들여졌다 (Boice).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 언급하는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다는 말은 로마의 관습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바울이 비유한 논리 속에서 우리는 율법의 종 된 상태에서 믿음으로 자유자가 되는 것은 그 작정한 때를 따라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달려있음을 선명하게 알 수있다.

   후견인과 청지기 - 앞에서 바울은 율법을 '파이다고스'에 비유하였고 여기서는 '보호자'(guardians), '어린 아이를 책임지는 자' 등의 뜻을 가진 '후견인'(*에피트로푸스)과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청지기'

(*오이코노무스)에 비유했다. 바울이 몽학선생보다 더 구체적이고 법률적인 지위를 가진 직책들을 비유로 사용한 것은 율법 아래 매인 자들의 종속상태를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다. 비록 유대주의자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은 율법의 청지기와 후견인에게 매인 자들로서 실제적인 권한은 없고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미성년자의 상태에 처한 것과 같았다.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때가 차매 - '때'에 해당하는 '크로노스'(*)는 2절의 '아버지의  정한 때' (*프로데스미아)와 연관이 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작정한 기간이 지났음을 시사한다. 또한 때가 차기 전에 일정한 기간 동안 율법에 매여 있었던 암담한 상태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한편 NIV는 본문을 '시간이 충

만하게 임하였을 때'(When the time had fully come)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함으로 그들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무기력과 곤고함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바울 서신에서 '보내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는 세가지가 있다.

(1) '아포스텔로'(*)특별한 임무를 주어 보낸다고 하는 데에 역점을 주고 있다(요 17:18). '사도'(*아포스톨로스)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2) '펨포'(*)는 하나님이 아들을  보낸다는  의미로  (롬8:3) 아버지께서 성령을 보내신다는 의미로 (요 14:26) 쓰였다. 이는 단지 보낸다고 하는 사실에 역점을 두고 있다.

(3) 본절에서 사용된 '엑사포스텔로'(*)보냄을 받은 사람이 그를 보낸 사람이나 장소, 사회적 지위에 귀속되어 있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있다(눅 1:53; 행 7:12; 11:22).

이에 본절의  '엑사포스텔로'는 아들이 하나님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것과 그를 보낸 실존적 공간 즉 하늘나라를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으로 본다(E, Huxtable).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 본 절에는 바울의 기독론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묘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낸다(빌 2:5, 6: 고 1:15, 16). 반면 본 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즉 '여자에게서'라는 말은 메시야의 계보인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음을 의미하고(롬 1:3) 따라서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3:13).

   율법 아래 나게 하신것 - 본 문장 또한 앞 문장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강조점에 있어서 단지 '사람'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를 가진 '유대인'으로 오셨다는 것이다(Longenecker).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삶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고(마5:17,18) 죽음으로 율법의 진노를 짊어지셨다(3:13; 빌 2:8).


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아들의 명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오데시안'(*)은 '양자됨'이라는 뜻으로서 신약성경에서 바울만이 사용하였다. 바울이 이말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됨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TDNT).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제도와 율법을 순종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NIV]갈 4:6

Because you are sons, God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the Spirit who calls out, "Abba , Father."


[현대인의성경]갈 4:6

여러분이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셔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4:10-11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외식적인 율법주의를 책망하고 있다. 본 절과 유사한 문구는 골 2:16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 이방인 교회 속에는 거짓된 외식적 율법에 의하여 상당한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의식적으로 지켰던 율법의 규례들은 다음과 같다.

(1) '날'(*헤메라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켰던 금식일과 안식일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 하루만 지키는 절기가 포함된다.

(2) '달'(*메나스). 매월 초하루에 지키는 월삭(삼상 20:5, 18; 사 66:23)과 달의 반복적 운행과 관련된 절기들, 즉 정월로서 추수가 시작되는 아빕월(출 13:4),  2월이며  꽃의  계절인  시브월(왕상6:1), 비의 계절인 7월과 8월, 즉 에다님월(왕상 8:2)과 불월(왕상 6:38)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있어서 달에 대한 절기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월력이 달랐으므로 그들의 문화권에서 혼란을 초래했던 것으로 보인다(E. Huxtable).     

(3) '절기'(*카이루스).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  곧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레 23장)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여  추가된 나팔절(레 23:23-25), 수전절(마카비상 4:52-59), 부림절(에 9:24-32) 등을 말한다.  (4) '해'(*에니아우투스). 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레 25:2-7)과 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레 25:8-55)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상에서 언급한 종교적 절기들을 충실히 지킨 사실만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이 율법의 참된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왜곡된 신앙을 소유함으로 더 큰 멍에와 굴레에 빠져 헛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책망한다.


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 이 말은 고린도전서 9장 20-23절 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저들처럼 행동했다는 의미이다


[고전 9:20-23]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나와 같이 되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네스데 호스 에고'(*)는 현재 중간태 명령법으로서 직역하면 '계속 나와 같이  되기를'

이라는 의미이다. 이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몇가지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혹자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사랑과  정직으로 대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내앞에서 솔직하라'는 의미로 본다(Cole).

(2) 혹자는 바울이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의 모든  의식주의(儀式主義)를 폐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된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나와 같은 자유자가 되라'고 했다고 본다(E. Huxtable).

(3) 혹자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입장에 선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내 입장에서 나를 이해하라'고 권면했다고 본다(NEB, Boice).

이상의 세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지만  문맥상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과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지위와 유대인이 갖는  우월감을 초라한 것들로 인식하고 참된 자유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가르치고 있다.


4: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현대인의성경]갈 4:13

여러분도 다 아는 일이지만 내가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의 질병 때문이었습니다. 


[NIV]갈 4:13

As you know, it was because of an illness that I first preached the gospel to you.




바울은 처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때를 구체적으로 회상하고 있다. 본 절의 배경이 되는 행 13:13,14에 의하면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 바보와 버가를 지나 속히 갈라디아 지방으로 올라갔다. 당시 버가는 저지대로서 해안의 습지로 인한 유행병들이 많이 돌았는데 특히 말라리아가 심했다. 바울은 여기서 얻은 유행병으로 인하여 하루 속히 버가를 떠난 것 같다. 그러나 혹자는 바울이 루스드라 지방에서 겪은 육체적 핍박으로 인하여(행 14:19; 딤후 3:11)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갈라디아에 더 오래 머물렀다고 추정한다(Boice).

어쨋든 바울의 계획에 차질을 주었던 그의 질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상당히 '약한 몸으로'(고전 2:3) 갈라디아에서 목회하였음을 알 수 있다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현대인의성경]갈 4:15

그런데 여러분의 그 기쁨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때 여러분이 할 수만

있었다면 눈이라도 뽑아서 나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NIV]갈 4:15

What has happened to all your joy? I can testify that, if you could have done so, you would have torn out your eyes and given them to me.


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현대인의성경]갈 4:16

이제 와서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NIV]갈 4:16

Have I now become your enemy by telling you the truth?


   원수가 되었느냐 - '원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드로스'(*)는 능동적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개역성경에는 번역 되어 있지 않은 소유격 '휘몬'(*너희의')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원수가 되겠느냐는 반어법적 문장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너희와 원수되기 위함인 줄 아느냐'라는 뜻이다. 그런데 원수 관계는 서로 조화될 수 없고 연합할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바울이 본절에서 의도하는 바는 내가 너희와 그토록  감격스러운 기쁨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어찌하여 원수의 관계가 될 수 있겠느냐는  의미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현대인의성경]갈 4:18

여러분이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좋은 일입니다.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NIV]갈 4:20

how I wish I could be with you now and change my tone, because I am perplexed about you!


a,난처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당황한, 복잡한, 골치 아픈


[현대인의성경]갈 4:20

나는 여러분에 대하여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으므로 이제라도

직접 만나 보고 여러분에 대한 내 태도를 바꾸고 싶습니다.


   의심이 있음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루마이'(*)는 '당황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를 뜻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모르므로 당혹스럽다는 표현이며 그들을 직접 만나 그 의문을

풀고 싶다는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다.


4: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두 아들이 있으니 -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도 후처 그두라를 통한 여섯 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창 25:1,2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두 자녀만 언급한 것은 그들의 탄생에 관계된 사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서로 판이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약속과(3:6 -14) 관계된 반면, 다른 하나는 약속과 관계없이 육신을 따라 난 것이다.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 개역성경의 '하가'라는 번역은 '하갈'의 잘못된 표기이다. 헬라어 사본들과 다른 영역본들은  한결같이  '하갈'('*Hagar)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본 절에서 이름과 연관지어 논쟁이 되는  것은 '하갈'을 시내 산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점 때문이다.

수많은 주석가들이 '하갈'이라는 이름의 지명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본 절을 바울이 사용한 우화로 푼다면 그 의미는 보다 쉽게 상징화된다.

시내 산을 하갈 산이라고 불렀든지 '하갈'이라는 말 자체가 시내산을 의미하는 단어인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바울이 본 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갈과 시내 산 및 지상의 예루살렘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 - 이 말은 그 당시에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본부로 삼고 있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누구보다도 순수한 사라의 후손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들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시고 율법을 완성시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함으로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종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종 됨은 이방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 - 이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루는 천상의 새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그곳은 율법에게 종노릇 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적 예루살렘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현재적으로 새 예루살렘의 백성이 되며 성령이 친히 이 일을 증거할  것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다(계 21:2).


4:27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현대인의성경]사 54:1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노래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노래하며 기쁨으로 외쳐라.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여자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다.


   기록된 바 - 바울은 본절에서 사 54:1(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 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는 이  구절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인한 화해를 선포하고 영적인

평화의 상태가 도래할 것을  묘사하면서 '많은 주의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였다.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로 인하여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과 믿음의 자녀들이 핍박자들의 고난을 물리치고 믿음의 자녀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는 것을 증거하고자 한다.

   홀로 사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레무'(*)는 '과부된  자'라 는 뜻으로 남편 잃은 한 고부의 고독하고 불행한 상태를 나타낸다. 본 구절은  이사야서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을 비유하는바 바벨론에 포로 된 유다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의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90세가 넘어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사라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서술한다. 사라에게 주어졌던 약속이란

  ㄱ. 직접적으로는 자손에 대한 것이지만 이는 또한

  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손의 어머니 사라(26절)를  통하여 복음을 주시며 그 복음으로 교회가 크게 확장된다는 계시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핍박한 것같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오켄'(*)은 '핍박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디오코'(*)의 미완료 능동태형이다.

바울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을 계속적인 사실로서 현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핍박의 현실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창 21:9 (창 21:8-10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는 사실을 묘사한 히브리어 '차하크'(*)는 '경멸하며 비웃다',  '희롱하다'의 뜻으로 이스마엘의 시기는 단순한 조소에서 그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바울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라가 하갈을 내쫓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거짓된 이복 형제들 곧  율법주의자들을 멀리하라고 권고한다.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NIV]갈 5:3

Again I declare to every man who lets himself be circumcised that he is obligated to obey the whole law.


[현대인의성경]갈 5:3

내가 다시 말하지만 할례를 받는 모든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5: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NIV]갈 5:7

You were running a good race. Who cut in on you and kept you from obeying the truth?


[현대인의성경]갈 5:7

전에는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을 가로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했습니까?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NIV]갈 5:11

Brothers, if I am still preaching circumcision, why am I still being persecuted? In that case the offense of the cross has been abolished.


R1:  박해 하다, 지근거리다, 괴롭히다    R2: 죄, 위반, 반칙, 공격,

R3 : 폐치하다, 철폐하다(~.a.ble, ~ment)


[공동번역]갈 5:11

형제 여러분, 만일 내가 여전히 할례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면 왜 내가

지금까지 박해를 받겠습니까?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하고있다면 내가 전하는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현대인의성경]갈 5:11

형제 여러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하고 있다면 왜 핍박을 받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거치는 것 - 여기 "거치는 것"이란 말(* )은 넘어지게 하는 돌 같은 '장애물'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이 된다고 하였다.

그들의 메시야상(象)은 이 세상에서 큰 권세와  능력으로 행할 자라고 깊이 믿어 왔다. 그런데 미천하게 사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메시야 자격을 그들은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넘어진다.


5: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NIV]갈 5:12

As for those agitators, I wish they would go the whole way and emasculate themselves!


R1: 선동자   R2: 거세하다


[현대인의성경]갈 5:12

할례를 주장하면서 혼란만 일으키는 사람들은 할례의 대상이 되는 그 지체를

아주 잘라 버리기를 바랍니다.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표준새번역]갈 5:13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신구약 성경에 인간의 행위의 법칙에 관하여 "하라" 혹은 "하지 말라"라고 한 명령들은 모두 다 율법에 속한 말씀이다. 이런 명령들이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온 율법은 이웃 사랑에서 그 완성을 본다.

만일 누가 사랑의 동기 없이 율법을 행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율법을 참되이 행한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만일 누가 사랑을 행하면서 율법을 범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참되이 행한 것이 아니다. 

율법의 실행은 사랑 없는 기계적 동작이 아니며 또한 사랑은 법 없는 무질서(無秩序)가 아니다. 사랑은 법을 초월하나 법을 무시하지 않는다.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희락화평오래 참음

자비양선충성온유절제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NIV]갈 5:22-23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성령의 열매 - 여기 "열매"란 말은 단수명사 되었다. 그것은 신자의 여러가지 덕행(德行)이 성령의 단일하신 역사로 말미암아 여러 방면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모든 덕행을 "열매"라고 한 것은 그것들이 사람의 노력을 위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 - 이 "사랑"은 믿음과 함께 있는 사랑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한다. (고전 13:13)에 말하기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신자의 사랑은 그가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을 믿는데서 반영된 사랑이니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원천으로 하고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요일 4:10-11참조.

(요일 4:10-11)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희락 - "희락"은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희락(喜樂)이 있나니 사랑하는 자도 기쁘고 사랑을 받는 자도 기쁜 법이다.  언제든지 남을 미워하는 자의 얼굴에는 수심과 번민과 고통의 그늘이 있지만 남을 사랑하는 자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속에서부터 솟아난다. 희락의 필요성은 육체의 건강을 위한 의미도 있지만 그 보다도 신앙을 건전하게 하려는 것과 하나님께 감사를 많이 하려는 것이다. 희락이 있어야 신앙이 자라나고 감사가 넘친다.


   화평 - 이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인데

(1) 서로 사과함으로 이루어지며(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 서로 용서함으로 성립된다.(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화평이 이루어지지만 그것도 힘써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히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약3:17-18)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오래 참음 - 이것은 '따가움(안타까움)을 멀리함'이란 뜻이다. 

사람은 대인관계(對人關界)에 있어서 혹은 무엇이 마음대로 안될 때에 그 심령이 따갑게(안타깝게) 되기 쉽다. 이런 때에 이기는 방법은 신앙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림이다. 우리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때에는 침착하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홍해까지 따라 올 떼에 모세는 말하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하였고

모압과 압몬 족속이 큰 무리로 유대에 육박하였을 떼에 여호사밧 왕이 말하기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대하 20:17)고 하였다.

(히 10:36)에 말하기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하였고,

(갈 6:9)에는 말하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다.

  

   자비 - "자비"란 말은 남에게 주는 '친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친절"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친절은 행실로만 아니라 말로도 나타난다. 우리의 말은 중요하다.

(잠 12:18)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良藥)과 같으니라"하였고


(잠15:1)에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하였고


(잠15:4)에는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영시(英詩)에 말하기를 , "노여운 말 한마디가 한 친절한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부지중에 나온 실언(失言)이 앞날을 캄캄하게 만들고 찌르는 가시를 일평생 남겼도다. 그러나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슬펐던 마음에 광명을 주고 동정의 말 한 미디가 한 영혼을 살려 놓고, 기쁨의 말  한마디가 캄캄하던 앞길을 광명하게 만든다. 남의 마음을 섭섭케 만드는 것은 네가 한 말 뿐이 아니다. 네가 말하지 아니하는 그 때에 많은 마음들이 아픈 상처를 받는다. 네가 말했더라면 많은 아픈 마음이 풀어졌으리라. 사림들이 언필칭(言必稱) 공평을  부르짖으며 사람에게 사납게 행한다. 그러나 격분된 말로 의(義)를 말할진대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양선 - "양선"은 자선 행위를 말하는데 성령께서 주신 것이니만큼 질적으로 선하다. 이 세상에는 자선 사업이나 적선(積善)을 말하는 자들이 많고 실행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흔히 순수한 선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 후에 돌아올 대가를 바라는 동기에서 하게 되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선이 아니라 생명 없는 사업 혹은 외식(外飾)에 불과하다. 진정한 자선은 끝 날의 심판 때에 그대로 다 드러낼지라도 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도록 행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마 6:1-4)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충성 - 이것은 진실하게 주님의 당부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어떤 다른 새로운 공의(功義)를 부가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된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그러면, 우리의 "충성"이란 것은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구원의 복음을 그대로 전함이다.     

  충성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자들이다.

   (1) 주님을 두려워하는 약한 자 : 주님께 충성하는 자는 반드시 영웅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겁약한 자라도 주님만을 두려워하게 되면 주님께 충성하는 자가 된다.

   (2) 주님 앞에 진실한 자 - "충성"으로 번역된 말(*)은 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님께서 원하신다.(시51:6).

주님께 사로잡히지 않은 지식인이나 모사는 하나님의 교회에 해를 끼치지만 무식하여도 주님의 복음을 그 대로 진실되게 전하는 자는 주님의 일에 유익하다. 사람이 거짓되게 행하기는 어려워도 진실히 행하기는 쉽다. 거짓되게 행하는 자는 계속적으로 거짓을 꾸미며 또 그렇게 처신하게 된다. 그것은 양심에 괴로움을 주는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히 행하면 양심이 평안하고 그 길도 단순하다.

   (3) 주님을 위한 의로운 생활(혹, 사업)에 변절하지 않는 자 - 그는 언제나 한결같으며 유종의 미(有終之美)가 있다. 누구든지 선미(善美)한 길을 가다가 변하면 그는 썩은 뒤에 교회에 해가 된다. 그러나 썩기 시작할 때에 서둘러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다. 그것은 시급히 회개함이다. 회개는 신자의 부패를 막는 유일한 치료제이다.

인류 역사는 부패로 이어져서 보기도 싫은 역사이다. 그러나 니느웨의 회개

역사는 모든 부패를 막아 역사를 미화(美化) 시켰다. 그 역사는 보기 싫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패했던 적이 없었던 역사보다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되는 역사이다. 우리는 변절로 인한 허물된 인격이 되지 말아야 한다. 교역자들이 처음에는 잘 하다가 점점 잘못한 예(例)가 얼마나 많은가?

혹은 명예심 혹은 물질에 대한 탐심 혹은 시기심 혹은 정욕 혹은 혈기 등으로 잘못되어 타락하고 만다. 

  

 온유 - "온유"란 말은 특히 대적에게 복수하지 않고 부드러운 인격으로 이기는 덕을 가리킨다.

 

   절제 -  "절제"란 말은 '자기 자신을 분잡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죄를 범하지 못하게 자기를 제재함이다. 바울은 자기를 "쳐 복종하게" 한다고 하였는데(고전9:27), 그것이 바울의 자기 제재라고 생각된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율법이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 신앙으로 행하는 자의  행실(사랑으로 행하는 모든 행실)은 율법을 이루는 것뿐이다. 롬 3:31,13:8-10참조. 이 점에 대하여 다음 귀절이 더욱 밝혀준다.


6: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무슨 범죄한 일 - '범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프토마티'(*)는 문자적으로 '넘어지다', '따로 떨어지다'등의 의미로 '타락하다'라는 개념을 포함한다. 한편 바울이 본 절에서 '범법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 '파라바테스'(* )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여기서 취급하고자 하는 범죄가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偶發的)이거나 어떤 유혹에 의하여 부지중에 저질러진 '실수'나 '허물'을 가리킨다.


6:2-3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짐을 서로 지라 - '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타제테'(*)는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관계성을 갖고 돕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동체적 관계는 '알렐론'(*'서로')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본 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다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범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을 뜻한다(Huxtable).

(2) 그리스도인이 삶의 현장에서 겪는 시험이나 인생의 좌절을 뜻한다(Boice).

(3) 죄를 짓도록 유혹하거나 영적으로 억압하려는 세력을 뜻한다. 이 경우 '짐을 서로 지는'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범죄의 유혹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예비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위의 세 견해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한다고 할지라도 지체들의 유기적(有機的)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부적합한 것은 없다. 성도는 이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져야 한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 바울은 동일한 주제 속에서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의 내적 상태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이웃의 무거운 짐들을 함께 나누어지지도 못하면서 의식적인 율법의 구조 속에 빠져 스스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지켰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경고한다. 그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재능이나 역할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만한 상태에 빠져 하나님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무시하고 율법을 자신의 유익과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켰다는 것이다.


6: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바울은 동일한 주제 속에서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의 내적 상태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이웃의 무거운 짐들을 함께 나누어지지도 못하면서 의식적인 율법의 구조 속에 빠져 스스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지켰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경고한다.

그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재능이나 역할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만한 상태에 빠져 하나님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무시하고 율법을 자신의 유익과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켰다는 것이다.



6:4-5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NIV]갈 6:4

Each one should test his own actions. Then he can take pride in himself, without comparing himself to somebody else, for each one should carry his own load.


[현대인의성경]갈 6:4

각자 자기 행위를 살피십시오. 그러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도 자기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번역]갈 6:5

각 사람은 자기 짐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 앞 절이 영적교만에 빠져 자기를 기만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어 적용된 것이라면, 본 절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의식하는 자들은 율법의 종이 되어 인간적인 규범으로 이웃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범죄에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상대적인 의로움에 절대적인 가치를 둠으로써 이웃의 짐을 나누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웃의 짐을 가중시키는 불법을 행하였다. 이처럼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생기는 그릇된 자존심에서 탈피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이다.

한편 본 절의 '살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마제토'(*)는 제련소에서 순금을 정련(精鍊)하는 것처럼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것을 의미한다(test, NIV). 성도들은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살필 때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하여 엄정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갖

게 되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 '스스로 속이는 자들'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상대방의 실수와 견주어 평가했던것 같다(Ridderbos). 그러나 자신의 업적이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는 바울의 자랑

(고후 1:12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자랑이 얼마나 부끄럽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게 된다. 바울은 자신의 눈을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을 시사하며 이로써 성도는 자신의 무익함과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깨닫게 될 것을 보여준다(Boice).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 바울은 본 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의무를 가르친다. 그것은 곧 자신의 짐을 스스로 지는 것이다. 바울은 본 절에서  '짐'을 뜻하는 단어로 '포르티온'(*)을 사용하여 2절에서의 '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로스'(*)와 구별하고 있다. '포르티온'은 '바로스'와 달리 한 사람의 '짐 꾸러미'를 의미한다.

이 '짐 꾸러미'는 본 절에서 하나님이 성도 각자에게 맡기신 직무를 가리킨다 (고전 12:5). 모든 성도는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해야 하며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NIV]갈 6:6

Anyone who receives instruction in the word must share all good things with his instructor.


   가르침을 받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쿠메노스'(*)의 동사형 '카테케오'(*'가르치다')는 원래 '이해하게 하다', '귓가에 울리게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좋지 않은 소리를 귀에 따갑도록 반복해서 알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행 21:21, 24). 혹자는 본 절에  언급된 자들이 유료(有料)교사들의 집단일 것이라고 추측한다(Boice).그러나 본절 '카테쿠메노스'는 어떤 특정한 단체나 조직 속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교훈 아 래 있는 자'들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같다(Boice, Cole).

   말씀을 가르치는 자 -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신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듯이 '가르치는 자'들의 신분도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로서 다른 서신서에서는 '디다스칼로이'(*)라고 표현되었으며 '교사'라고 번역되었다(고전 12:28;엡 4:11). 이들 '교사들'이 본절에 기록된 '가르치는 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지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둘로나뉜다.

(1) 혹자는 이들이 초대 교회 안에서 목회자적인 신분을 가진 자들로서 '디다스칼로이'와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라 한다(Ridderbos). 그러나 본서가 다른 서신들보다 일찍 기록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볼 때 '가르치는 자' 즉 '카테쿤티'(*)가 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임명된 직분자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2) 오히려 본 절에서 '가르치는 자'들은 보다 초기의 직분자들 로서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과 바나바와 디도 같은 사역자들과 교회가 임명한 장로들을(행 14:23) 가리킨다(Huxtable). 이들은 '교사'들과는 달리 한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전도 여행자들을 뜻하는 것 같다. 문맥상 (2)의 견해가 무난하리라 본다.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아니하시나니


[NKJV]갈 6:7

Do not be deceived, God is not mocked;


R1 : 우롱하다, 무시하다


[표준새번역]갈 6: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 '만홀히  여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크테리제타이'(*)는 '바보  취급당하다'(to  be  fooled, NEB)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그릇된 본성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

의 이기적본성에 의하여 저질러진 행위는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등한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본 절에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꿰뚫어 보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공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을 의미한다.

본 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며 할례를 행하는 자들이 오히려 진정한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선행을 무시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교훈하고 있다.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NIV]갈 6:9

Let us not become weary in doing good, for at the proper time we will reap a harvest if we do not give up.


[현대인의성경]갈 6:9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 본 구절은 앞 절에서 추수에 비유한 것 같이 ??수의 때가 지연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Ridderbos). 임박한 종말을 눈앞에 두고는 누구든지 긴장하게  마련이지만 간사한 인간은 이 '지연'으로 인하여 스스로 피곤해 하며 넘어지게 될 것을 경계한 말이다.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큰 글자 - 바울은 이제 본 서신 전체에 대한 결론을  맺는다(11-18).

여기서 '큰 글자(large letters)'의 의미에 대해서는

(1) 결론을 강조하고자 하여 큰 글자로 쓴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어떤 이들은

(2) 바울의 눈이 나빠 작은 글씨는 잘 보이지 않아 크게 쓴다는 것 즉 바울이 오랜 여행 기간 동안의 박해와 노동으로 인하여 적당한 글씨체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호소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Deissmann).      내 손으로 -  윗 절까지는 바울이 구술하여 대필하였으나 지금부터는 본인의 손으로 직접 쓴다는 의미.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 -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율법을 진실하게 지키려는 유대인이라기 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양을 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프로소페사이(* )는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로 '좋은 모양을 낸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로 봐서 그들은 인간적인 겉치레만을 일삼는 자들이며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이다.  본 절의 '육체'는 부패한 인간 본성과 이웃을 경멸하는 종교적  자만

심을 뜻하기도 하며 인간의 신체 중에 할례받은 한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말 로서(Ridderbos) 그들의 자랑이 얼마나 편협되고 초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를 지적한다.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 그들은 할례를 행함에 있어서도 언약적인 관계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모습만을 갖추기 위해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할례는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께서 행하셨던 할례나(눅 2:21) 또한 디모데에게 할례 받게 했던(행 16:3) 바울의 할례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그들은 단지 육신의  유익을  위해 할례를 행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 할례를 요구하는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선생이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는 인정하고 있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피하고 싫어하였다.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1) 십자가는 유대주의자들이 스스로 세워놓은 율법적인 의의를 부인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문제 때문이다(Boice).

(2)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전파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사역과 효력을 증거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할례를 부인해야만 한다. 만약 그 들이 할례를 부인한다면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를 회피하고 할례의 정당성(正當性)을 언급하였을 것이다.


6: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 '할례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템노메노이(*)는 '할례를 행하다'는 뜻을 가진 '페리템노'(*)의 현재 중간태로서 '스스로 할례를 받은' 또는 '할례를  좋아하는'이라는  의미이다.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 '지키지 아니하고'의 헬라어 '우데 퓌랏수신'(*)은 고의적인 율법  파기를 의미한다.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할례를 행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준수를 도외시하는 거짓 무리들에 불과하였다(12절). 그들은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며 자기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 모든 진리들을 마음대로 변질시키는 자들이었다.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 그들은 진리를 따른다거나 율법을 행한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자 했다. 그들은 자아 중심적인 교만에 빠져 육체의 흔적을 신뢰하는 거짓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자신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들의 유익을 찾고자 하는 이기적(利己的)인 사람들이었다.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그도 한때 세상의 영광들을 구하며 인간적인 성공을 바라보며  살았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빌 3:3-6). 그러나 이제 그는 냉철하게 세상과 자신을  구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 생명을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라는 절대적인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아(自我)는 절대로 세상적인 방식을 따라 살아갈 수 없다.

여기서 '세상'(*코스모스)이란 인간들의 자기 주장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불신앙적인 요소와 악의 총체를 의미한다. 바울이 '세상'과 '나'를 배타적인 관계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과 생명의 근거라는 사실을 증거한다(Ridderbos).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 무할례를 강조하지 않는다. 할례와 무할례는 상대적인 요소들로서 절대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5:6;고전 7:19). 바울이 앞 절에서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다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 관심을 돌린 것은 매우 흥미있는 전황이다. 이 말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Ridderbos). '지으심을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며 '피조물'을 뜻하는 '크티스마'(*약 1:18)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특히 '크티시스'는 본 절 에서 '새로'의 헬라어 '카이네'(*)와 함께 쓰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재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을 강조한다(엡 2:10).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은 삶의 동기와 목적도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성도는 현재의 삶 속에 미래에 이루게 될 종말의 삶을 도입하며 살아간다.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 - '이 규례'는 바울이 앞서 말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성령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새 언약 곧 복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이처럼  본 절에서는 본서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자들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참된  이스라엘  족속이 될 수 있다(3:29;4:28, 29). 참된 이스라엘이란 민족적이며 전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복음을 믿어 순종케 된 자들로 구성된 '새이스라엘' 곧 '약속의 자녀'를 말한다(롬 9:7).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나를 괴롭게 말라 - '괴롭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푸스...파레케토'(*)는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의미한다(마  26:10;눅  11:7).

바울이 당한 괴로움은 유대주의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언이라기보다는 갈라디아 고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이다. 따라서 '괴롭게 말라'는 구절은 더 이상 갈라디아 교회 속에서 이단자들에 의하여  미혹(迷惑)되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호소의 성격이 강하다.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흔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티그마타'(*)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국'이나 '소인'을 남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이 '흔적'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일례로 아씨시의 프란시스(Assisi Francis)가 이런 식의 거룩한 흔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본 절에서 '흔적'을 신비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 (Ridderbos, Huxtable, Cole).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을 의미한다.

그것은 (1) 수많은 육체적 고난으로 인하여 실제로 남겨진 박해의 상처들을 뜻하며(고후  11:22-27), (2)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적 의미로서 수많은 고난에 동참하였음과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바울이 소유한 예수의 흔적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얻은 거룩한 증표로서 율법주의자들이 육체의 자랑을 위해 스스로 행한 '육체의 모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다(행 20:24).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모든 형제들에게 거룩한 인사를 함으로 시작했던(1:2) 본 서신은 갈라디아 교회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성령의 약속과 구원을 함축적인 의미로 표현한 것으로서 저들의 구원이 자의적(自意的)인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메타 투 프뉴마토스)라고 표현한 것은 외형적인 모양을 추구하는 율법주의자들의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의 내적인 존재 전체에 영향을 끼치길 기원하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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