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장 해석>
11장 요약 |
01-10 : 남녀의 차이 -> 기도나 예언 시 남자는 그대로, 여자는 머리 위에 무엇이든 쓰고 하라 1)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영광이니,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된다, 반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 2)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습니다 3)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4)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그 머리에 권위의 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11-12 : 남녀의 동등성 1)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2)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3-15 : 남녀의 차이 : 긴머리의 의미 16-34 : 권면 1) 파당에 대한 나무람 2) 만찬 시 서로 먼저 먹으려는 문제에 대해 나무람 3) 최후의 만찬 시 예수님이 하신 말씀 4) 성만찬의 의미와 마음가짐 5) 여러분이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십시오.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어야 할 것입니다 6) 모이는 일로 심판받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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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본절을 10장에 속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2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 즉 교회의 예배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바울은 10장에서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와 우상의 제물을 먹고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으며 그 권면의 모델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즉 바울은 10장의 경고와 권면에 대한 결론으로 본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1:2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대로 그 유전을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개역성경 본문에는 생략되었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이제'(*데)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절에서부터 새로운 주제를 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Godet, Meyer).
유전 - '유전'(*파라도세이스)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전으로 전해내려온 가르침으로서, 관습과 교훈은 물론 교리를 포함한다(갈 1 : 14; 골2 : 8 ; 살후 2:15;3:6).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유전'은 교리보다는 구전(口傳)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전해준 교회의 관습을 의미한다
(Godet, Meyer). 왜냐하면 이후의 본문들이 여자가 공예배 때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를 칭찬하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경고와 질책의 말을 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과 교훈을 잘 지킨 데 대해 칭찬의 말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깊은 상처없이 자신의 권면을 받아들일 수 일도록 하였다. 이것은 바울 서신의 영감성과 신적 권위를 증거하며 아울러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목희자로서의 바울의 세심한 볘려를 잘 보여준다.
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바울은 교회에서 공예배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그 논증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세 단계의 질서이다.
본절에서 '머리'(* 케팔레)는 '권위'를 의미하며, '유기체적인 복종'을 암시한다(Edwards, Morris, Meyer). 그리고 각 질서는 연합(union)에 의한 관계성을 나타내는데, 그 관계성은 교회의 질서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첫째 질서는 그리스도와 남자의 관계인데, 그리스도는 믿음을 통한 연합에 의해서 남자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그리스도와 남자의 연합 관계의 근거이다. \
둘째 질서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인데, 남자는 결혼이라는 연합을 통해서 여자의 머리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결혼 사상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 즉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랑과 복종'의 관계로 설명되고 있다(엡 5:22;골 3:18, 19).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며, 아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속이 남편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차이가 없다 할지라도(갈 3 : 28), 지상의 다른 관계들 즉 주인과 종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복음의 섭리 아래 에서도 여자의 복종의 위치는 지속된다(Godet, Meyer).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존재 자체의 우열이 아니라 사랑과 화합과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 질서에 있어서 남녀 관계 (창 3 :16)는 지금도 존속(存續)하나 두 개체는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인격체이다. 그러나 남녀간의 성(性)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는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눅20:34-36).
셋째 질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인데, 하나님은 자신의 부성(Fatherhood)과 그리스도의 아들됨(Sonship)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신인(神人)이며 중보자(요 14:28;고전 3:23;15:24ff.)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머리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하셨다(요5:19; 고전3:23;15:28).
특히 본절에서는 세 가지 질서 중 그리스도와 남자와의 관계가 제일 먼저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가능케 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서로의 관계를 형성시키는 요체가 되기 때문이다.
11:6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찌니라
당시 기존 관습에서 여자가 머리가 짧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여자가 짧은 머리를 하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1) 애통이나 슬픔을 표시할 때이다(신 21:12).
(2) 조신(操身)하지 않거나 간음의 죄를 범했을 때이다. 그래서 매춘부는 짧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본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 짧은 머리는 여자의 수치였다. 반면에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 사이에서 긴 머리는 여자다운 우아한 장식으로 여겨졌으며(Meyer), 여자의 권위와 명예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바울이 당시의 기존 관습을 인정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한 나라의 관습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을 때 그 관습이 인정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본절에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 써야 하고, 남자가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창조 질서에서 찾고 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하셨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이 땅을 다스리는 주권을 주셨다(창 1 : 26-28).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形狀)'이라 함은 여러의미를 갖지만 그 중에 하나는 자연에 대한 사람의 '주권'을 포함한다(Edwards, Godet). 사람은 모든 피조물 중의 절정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다(시 8편). 또한 남자가 '하나님의 영광'이라 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남자는 창조자이며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위엄을 세상에 드러내며 그를 존귀케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처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적 지위를 소유하고, 창조주를 세상에 밝히 드러냄으로 존귀케 하는 존재인 남자가 '순종의 표'인 수건을 쓴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벗어남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며 '마땅히'라는 말을 사용한다. '마땅히'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레이'(*)는 '의무가 있다', '해야만 한다'는 뜻을 갖는다(ought, NIV).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 본절은 여자가 당시의 습관대로 머리에 수건을 써야할 이유를 말하고 있다. 여자가 수건을 쓰는 것은 자신의 정절과 순결, 그리고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랑과 헌신을 통해서 남자를 존귀케 하며 또한 자신을 성별(聖別)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창 1:26-28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바울은 여자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혹자는 여자가 남자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말한다(De Wette).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남자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8, 9절) 결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다(Edwards. Godet, Meyer).
11:8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본절은 여자가 남자의 영광이라는 논증에 대한 근거로서, 여자의 기원을 말한다. 아담의 갈비뼈를 통한 여자의 창조를 암시한다(창 2:21).
11:9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 본절은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을 진술하고 있다. 이 진술을 통해서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씀으로 자신의 순결과 사랑의 복종을 표하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함을 시사한다. 창 2 : 20에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또한 창 2 : 18에는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되어 있다. 물론 이 말씀들은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성(從屬性)이나 여자에 대한 남성 우위론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혼자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주권을 발휘할 수 없다(창 1 : 28). 그 주권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과 복종의 관계에 있을 때 온전하게 행사될 수 있는 것이다.
11: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 '이러므로'는 본절이 8, 9절을 전제로 이제까지 논증한 것에 대한 결론임을 나타낸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창조 때에 함께 일하였으며(욥 38:7), 죄인들의 회개와 개종을 기뻐하며(눅 15:7, 10) 성도들을 보호하기도 한다(시 138:1;엡 3:10;히12:22).
또한 천사들은 사람들을 섬겨서(히 1 : 14) 성도들의 삶과 신앙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실현되도록 한다.
그런데 본절에서 '천사들을 인하여'(*디아 루스 앙겔루스)는 해석이 다양하다.
(1)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지켜보게 하기 위해서 이교도가 보낸 스파이로 생각한다(Storr, Flatt).
(2) 교회의 예언자로 해석한다(Beza).
(3) 가장 신실(信實)한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본다(Clement).
(4) 악한 천사로서(창 6:2) 예배 때 수건을 쓰지 않은 여자를 보고 색욕을 일으킨다고 본다(Tertullian).
(5) 선한 천사로서, 예배 때 함께 참석해서 지켜보는 것으로 해석한다(Hodge, Morris, Meyer, Ruckert). 이런 해석들 가운데 가장 타당한 것은 마지막 견해이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선한 천사들이 예배를 지켜보기 때문에 창조 질서에 어긋나지 않도록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것을 강 조하고있다.
'권세 아래 있는 표'는 헬라어로 '엑수시아'(*)로서, 본문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Grosheide).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 '엑수시아'가 되는 이유는 당시 헬라의 여자가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은 자신을 매춘부로 취급하는 것으로 여자로서의 권위와 존엄성을 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여자가 자신의 머리에 이런 권세있는 표식을 함으로, 창조 때에 함께 사역하고 성도들과 함께 현존하여 예배를 지켜보는 천사들에게 창조 질서에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주며, 천사들을 예우(禮遇)함과 동시에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세울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하는 것이다.
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가르'(*'왜냐하면')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여자와 남자가 하나이며, 상호 의존적인 관계라는 사실의 근거를 제시한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 '남자에게서'(*에크 투 안드로스)에서
'에크'는 '...에서 밖으로'라는 의미로, 사물의 기원과 근원을 표시한다.
본문은 여자의 기원이 남자임을 말한다. 이것은 8절의 반복으로서,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되었음을 상기시킨다(창 2 : 21).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 '말미암아'는 헬라어 '디아'(*)로서 본절은 여자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 사람의 '일반적인 출생 과정'을 말하고 있다(Morris).
이처럼 여자가 남자에게서(에크) 태어났고, 남자가 여자로 말미암아(디아) 태어났다고 하는 구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과정과 질서를 바울이 염두에 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설사 바울이 그것을 염두에 두었다 할지라도 본절에서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서로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여기서 '...에게서' 역시 '에크'(*)라는 의미로서 기원과 원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창조 질서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다른 과정 속에서 창조되었다 할지라도, 분명한 사실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 두 존재의 기원은 결국 하나님이다(창 1, 2장).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며, 동등하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
11:13-15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11: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찌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 - '변론 하려는'(*필로네이코스)은 '사랑하는'(*필로스)과 '싸움'(*네이코스)의 합성어로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기기 위해서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바울이 이 말을 언급하는 것은 헬라인들의 국민적 특성인 변론이 무익하며 잘못된 습관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 - 단순히 '모든 교회'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라는 것을 부가하여 수식하는 것은 모든 교회들의 거룩성과 존귀함을 나타낸다.이는 헬라인들이 교회의 관습에 대해서 경솔하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것과 대조되는 것으로 교회에 대한 존경을 강조한다.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 '규례'(規例)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 변론하는 것이다(Calvin, De Wette, Edwards, Meyer).
(2)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것이다(Bengel, Godet, Maier).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전자의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변론하는 것이 헬라인들의 관습(custom)이라고 하나(Meyer), 그것은 무익한 습관(habit)에 불과한 것이다(Godet). 더욱이 이제까지 바울이 공예배 때에 여자가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의 정당성에 대해 논증해 왔기 때문에 본절
은 그런 논증의 결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1: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내가 명하는 이 일에 - '이 일'(*투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 (1) 2-16절에서 언급한 여자가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한 논증 전체를 가리킨다(Grosheide).
(2) 바울이 다음 절에 이어서 명령하는 성만찬(聖晩餐)에 대한 것을 가리킨다(Godet).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바울은 16절에서 이미 여자가 공예배시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완전한 결론을 맺었다. 따라서 '투토'를 16절 이전의 내용에 연결시킨다는 것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이어서 논할 성만찬에 대한 것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타당. 이러한 입장에 따라 다수의 영역본들은 본절을 '다음의 명령에서'(in the following directives, NIV) 혹은 '이어지는 교훈에서'(in the following instructions, RSV)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저희의 모임이...해로움이라 - 본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하지 않은 이유를 드러낸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임은 편당(偏黨)을 이루어서(19절)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22절) 주의 만찬에 불경하게 참예하였기 때문에 유익이 되지 못하였다.
11: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대강 믿노니 - 바울은 들었던 분쟁에 관한 소문들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 소문들의 진위(眞僞)를 가려볼 때 분쟁의 사실들이 분명하기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소문의 진위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다.
11: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 본절은 교회 내에 편당이 존재하는 목적을 긍정적으로 나타낸다. 교회 내에 존재하는 견해의 차이와 파벌은 때때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하지만, 그런 위기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진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되며, 그 위기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11: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그런즉 - '그런즉'(*운)은 앞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는 것으로 앞절과의 연관성을 시사한다. 따라서 앞절의 편당은 주의 만찬에서 비롯된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우크 에스틴 퀴리아콘 데이프논 파게인) - 본문은 세 가지로 해석된다.
(1) "너희는 주의 만찬을 먹을 의도가 없이 모였다는 해석이 있다(Alford). 그러나 29, 30절은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먹기 위해서 함께 모였다"는 것을 암시하므로 이 견해는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2) "너는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는 해석이 있다(Meyer).
이 해석은 '에스틴'(*'...이다')에 부정사(infinitive)가 뒤따라 올 때 가능하다.
(3) "이것은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해석이 있다(De Wette, Maier). NIV에서도 "너희가 먹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다"(it is not Lord's Supper you eat)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세 견해 중 첫째 견해는 본문상의 내증(內證)에 위배되기에 타당치 않지만 나머지 두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당시 주의 만찬은 '애찬'(love-feast)과 '성만찬'(Eucharist)이 결합된 형태였던 바, 교인들은 집에서 형편에 따라 먹을 것을 싸가지고 교회에 모여서 공동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나누었다(행 2:46;고후 8:14). 이런 애찬 후에 성만찬이 행해졌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애찬에서부터 교제를 나누지 않고 먼저 먹고 취함으로(21절) 애찬과 성만찬을 일반 식사로 전락시켜 버렸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만찬이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한편 '주의'(* 퀴리아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만찬을 제정(制定)하고, 만찬에 초대하며 주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 '이나'(*에)는 '그리고'(and)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or)을 의미한다(Godet, Grosheide, Meyer).
그것은 떡을 먹거나 잔을 마시는 두 가지 행위 중에 어느 하나라도 합당치 않게 행하면 범죄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당시의 성만찬은 두 가지를 동시에 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식사 동안에 떡을 먹고 그 후에 포도주를 마셨기 때문에, 떡을 합당하게 먹는다
할지라도 잔을 합당치 않게 마실 경우도 있다. 반면에 카톨릭은 본절의 '에'를 근거로 해서 둘 중의 하나만을 행하고도 성만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Godet).
'합당치 않게'(*아낙시오스)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1) 회개하지 않은 악한 양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다(Olshausen, Theodoret).
(2)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참여하는 것이다(Billroth, Chrysostom).
(3) 주어진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Luther).
(4) 자기 성찰(self-examination))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Bengel).
(5)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기념하지도 않고, 그를 경외하지도 않으며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참여하는 것이다(Flatt).
(6) 죄인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기억함과 감사함이 없이 참여하는 것이다(Godet).
이런 견해들 중 (5)와 (6)의 견해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도들간의 교제로 생각지 않고 단지 헬라인의 관습처럼 즐거운 연회로 행하였기 때문이다.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개역성경에는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데'는 앞절보다 진보된 내용을 다루려고 하는 것을 암시한다. 즉 성만찬을 합당하게 참여하기 원한다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 '살피고'(*도키마제토)는 예수의 인격에 관한 자신의 마음가짐을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Godet). 그래서 본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감사함으로 기념하며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지에 대해서 스스로 살펴야 함을 의미한다.
11: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개역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은 앞절에서 밝힌 내용, 즉 자기 자신을 살피고 먹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 '분변치'(*디아크리논)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혹자는 물질적인 떡과 주의 몸을 구별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한다(Beza,Grosheide, Hofmann).
(2) 혹자는 떡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라 주장한다(Godet).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타내는 성별된 떡과 포도주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며, 성도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감사하며 동참하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성만찬의 가치와 의미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Grosheide).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마'(*)는 '심판'을 의미한다(Judgment, NIV).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심판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한 심판을 의미할 경우에는 관사 '토'(*)가 부가된다(Godet, Meyer). 더욱이 다음 구절들에서, 바울이 합당치 못한 성만찬의 참여에 대한 결과로서 일시적인 심판을 생각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30, 31절). 그러나 회개와 개종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일시적인 징계는 영원한 심판에 대한 전조(前兆)이다(32절).
11: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
'약한자'(*아스데네이스), '병든자'(*아르로스토이), '잠자는자'(*코이몬타이)를 이해함에 있어서 혹자는 영적인 측면으로만 해석한다(Eichhorn, Krause, Morus).
그러나 영적인 차 에서라면 '약한 자'나 '병든자'는 의미상 같은 것이기에 꼭 그렇게만 해석되지 않으며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나타내는 용어이다(Edwards). 따라서 오히려 본절은 성만찬에 합당치 못하게 참여함이 영적 병약함과 죽음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연약함과 죽음까지도 초래하게 됨을 시사한다.
11:31,2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본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징계하시는 목적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그 징계는 영원한 심판을 막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영원한 심판의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이다(Edwards).
한편 바울은 앞절과 본절에서 세 가지 용어를 통해
세단계의 '판단'에 대해 논증한다(Godet).
첫 단계는 '디에크리노멘'(*)으로서(31절)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자신을 판단하는것이다.
둘째 단계는, '크리노메노이'(*'판단을 받는 것')로서(32절)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하여금 회개케 하고 세상과 함께 정죄(情罪)받지 않게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다.
셋째 단계는, '카타크리도멘'(*'죄정함을 받은')으로서(32절) 마지막 심판 때에 영원한 심판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11:33,34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찌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서로 기다리라 - '기다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데케스데'(* )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환영하다'(to welcome) 혹은 '용납하다'(to receive).
(2) '기다리다'(to wait).
혹자는전자로 해석해서 '만찬에 서로 용납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Hofmann, Ruchert).그러나 본절에서는 후자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Edwards, Godet). 왜냐하면 본절은 21절의 '프롤람바네이'(* '취함이라')와 대조되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 본절은 22절과 연관성을 지닌다. 그것은 어떠한 형편의 사람이든지 간에 먹고 마시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갖고 성만찬에 참여하려면 집에 가서 먹으라는 의미이다.
이는 너희의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허기를 메우려고 성만찬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 이유는 잘못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29-32절) 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만찬의 목적을 분명히 이해하고 참여할 것을 권고한다.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 '그 남은 것'(* 타로이파)은 성만찬 외에 다른 문제들에 대한 교훈을 말하는 것이 아리라, 성만찬에 대해서 지금 말하지 못한 세부적인 사항을 의미한다(Godet, Grosheide). 본절은 성만찬의 규례에 대한 설명을 맺으며 바울이 부언하는 내용이다. '귀정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탁소마이'(*)는 '정돈하다'라는 의미하며(Edwards,Hodge) 아울러 사도 바울의 권위를 암시한다. 바울은 사도로서 모든 규례를 제정하고 정비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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