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경해석

고린도전서 9장 해석

白鏡 2006. 9. 17. 09:25
 

    <고린도전서 9장 구문해석>  

9:1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 여기서의 '자유'는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사람으로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영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사도가 아니냐 -

 1) 사도인 바울이 사도로서 자신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Godet).

2)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하였다.

   즉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것과

   고린도인들이 자신의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9: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9:3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 '이것'이 의미하는 것

     이앞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고 뒷 구절을 지시할 수도 있다.

   1) 혹자는 이를 뒷절에 연결시켜 바울이 자신의 언행을 본으로 보이면서 그리스

도인의 자유를 언급하는 가운데 자기사도권을 변호하는 것이라 한다(Grosheide).

   2) 그러나 뒷절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권이 입증된 후에 말할 수 있는 사실들을 열거한 것이므로 앞 구절에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Morris).


 *'힐문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크리누신'(*)은 '엄밀히 조사하다', '심문하다'의 뜻이며

*'발명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로기아'(*)는  '답변하다'의 뜻으로서 둘 다 법률 용어이다.

즉 바울은 그의 반대자들이 심문하듯이  자신의 사도권을 따진다면 앞에서 말한 내용들, 곧 자신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목격하였으며, 이방인인 고린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회심시킨 뚜렷한 사도됨의 증거들을 법정에서 증인이 되어 증명하듯이 단호하게 답변하겠다는 것이다.


9:4-5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 바나바를 의식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6절). 혹은 '우리' 속에 실라와 디모데를 포함시켰는지도 모른다.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 '권'(權)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수시안'(* )은 '권리'(right, NIV)를 뜻한다. 이는 바울이 고리도 교인들로부터 생계에 필요한 물질적 원조를 받을 권리가 있었음을 뜻한다(고전 9:9-11).

  다른 사도들 - 사도행전에서는 사도가 예수의 열 두 제자와 바울과 한 두 사람이 더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행 14:4,14).? 본절에서도 사도의 범위가 사도행전의 언급보다 그리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의 형제들 -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전처(前妻)에게서부터 태어난 예수의  형들도 포함한다는 것이다(Lightfoot).

(2) 예수님의 사촌 형제 즉 마리아의 동생과 남편 알패오의 소생일 가능성도 있다(마 10:3).

(3) 가장 분명한 것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들들로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  네  사람들이다(마  12:46;13:55;행1:14;갈 1:19).

   게바 -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구분하여 '게바' 곧 '베드로'를 따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탁월한 사도이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드러진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탁월한 사도였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 내에 '게바파'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1:12). 또한 본절은 베드로가 아내가 있는 자임을 추측케 한다(막 1:30).

   

  '자매된 아내'. believing wife

  '데리고 다닐': 당시의 사도들이 아내를 대동시키면서 도움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본절의 의미>

2세기 말엽,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나 4세기 로마 교회의 부제(副祭)였던 암브로시에스터(Ambrosiaster)에 의하면 요한과 바울을 제외하고 모든 사도들에게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한 사도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딸린 식솔까지 교회로부터 공궤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도 역시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할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9: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일하지 아니할 권 - 본절은 사도들이 교회로부터 그들의 생계비를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한 기술을 한가지씩 익히는 관습이 있었다. 더욱이 철저한 유대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은 모두 스스로 생계비를 벌었는데 바울 역시 그리하였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천하게 생각하였으므로,  혹자는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이러한 삶의 방식을 매우 특이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한다(Grosheide).



9:7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바울은 이러한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자신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피력한다.


9: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사람의 예대로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안드로폰'(*)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습(人習)이나 생각에 따라'의 의미이다. 즉 사람의 피습을 따른다 할지라도 일한 대가를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보다 더 결정적인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제시하였다.

   율법도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모스'(* )는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인 모세 오경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바울은 인간적인 생각과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이 서로 일치함을 제시하였다.


9:9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곡식을 밟아 떠는 소 - 본절에서 인용된 구절은 신명기 25:4이다.(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찌니라)

'떠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알로온타'(*)로서 '할론'(* '둥근  모습')에서

파생된 말이다.


**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소를 이용하여 곡식을 터는 방아를 돌리거나, 혹은 일정한 반경(半徑) 안에 있는 곡식을 소로 하여금 발로 밟아 떨게 하였다.  혹자는 이 때 이집트나 다른 이방 지역에서는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그 입에 망을 씌웠다고 한다(Lenski).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것을 금(禁)하였다. 

소가 일을 할동안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들과 자연에게까지 관심과 사랑을 베푸시는 모습을 가르쳐 준다(욥 38:41;시 147:9; 마 6:26;눅 12:24).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소들을 염려하시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마리 새에게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신다(마 6:26). 바울의 의도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에 대하여는 가축도 율법에 의해  보장을  받는데 하물며 인간들이 일한 것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은 더욱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9:10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전혀 - 이 단어를 '전혀'(altogether, KJV), 혹은 '전적으로'(entirely,RSV)로  번역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9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은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혀'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토스'(*)는 '확실히'(assuredly,  certainly)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Hodge, Goert).

   소망을 가지고 -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이 문자적인 뜻으로는 일하는 소에게 먹을 양식을 주라는 것이지만 내면적인 뜻은 인간을 위한 것으로서  밭갈고 씨뿌리는 자들이 결실을 거두어 들이는 소망을 갖고 일함을  보여주는 것 이라고 해석하였다.


9: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10절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일한 대가로 그에 상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으로  결론을 맺었다. 이제 본절에서는 앞 구절의 비유들에 빗대어 바울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신령한 것'(* 타 프뉴마티카),  곧 한없이  고귀한 영적인 씨앗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뿌렸으므로 그들에게 '육신의  것'(*타 사르키카) 즉 세상에 속한 것으로 영적인 것과 비교할 때 지극히 미미한 것을 요구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9:12 다른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 베드로와 아볼로 등 다른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생계비를 보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혹자는 이러한 이유로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낮은 등급의 사도이기 때문이라는 오해를 하게 했을 것이라고 한다(Morris).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처음 세운 자로서 자신이 그 어떠한 사람들보다 더욱 물질적인 권리를 요구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범사에 참는 것은 - '참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고멘'(* )은  '스테게'(*'지붕')에서 유래된 말로서 '덮다', '감추다', '참다'의 뜻을  갖는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만이 이 말을 사용한다.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모든 것을 참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온갖 종류의 곤궁함을 인내로써 참았다.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 바울은 복음이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권한을  행사하려는 자들과 복음 전파를 통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에 의해 잘못 전달될 소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9: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 본절에서 바울은 구약에서  언급된 제사 의식과 이방 제사의 실례를 들어, 신약의 교회가 복음 사역자들에게 물질을 공급할 의무가 있음을 보여준다.


9: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이와같이 주께서도 -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에 관하여 규정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의 보수에 대해 똑같은 규정을 허락하셨다.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이것은 마 10:10이나 눅 10:7에서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을 바울이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마 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눅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9: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죽을지언정... - 바울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짐을 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에 있었을 때 겪은 여러가지  생생한 경험들의 기억으로 격한 감정이 되어 정상적인 방법으로 글을 잇지 못하고 파격구문을 사용했다.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 바울은 아무런 보상없이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자신을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고 또한 혹자의 말대로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축적했다(Hodge). 따라서 물질적인 공급 없이 교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은 그가 전한 복음의 순수성을 입증하는 것이었으며 바울의 자랑이요 영광이었다.


9:16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부득불 할일임이라 -사도 바울이 선교  사역을  감당한 것은 그 일을 통해서 갖게 되는 즐거움과 보람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사명이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일이었고(행 26:16-18;갈 1 : 1 ; 빌 1:16) 그가  부득불(不得不)하지않으면 안되는 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화(禍)가 있을 것임이로라 - 바울은 소명(召命)에 있어서 다른 사도들과 큰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12사도들은 자발적인 믿음으로 그들의 소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완악한 불신앙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의 소명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강압적인 역사였다(행 9: 5,Godet).


9: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 바울이 자발적인 선택으로 복음을  전파한다면, 그것은 자랑할 만한 것이요 그에 대한 상이 있을 것이다. '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도스'(*)는 '보상'(reward, KJV, NIV)을 뜻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로부터 강압적으로 복음 전도의 소명을  부여 받았으므로 거기에 대해 어떠한 자랑거리나 보상이 있을 수 없다. 그는 단순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행 26:16).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안 페피스튜마이'(*)의  문자적인  뜻은 '나는 청지기직을  부여받았다'이다.

여기의 '청지기'(steward)는 '자유인'('freeman)과 상반되는 말로서, 청지기들은 노예 계급에 속했었다(눅 12:42,43).

 

1.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2.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노예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고 하여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때  엄한 처벌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본절은 바울이 그의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나는 노예로서 일을 수행할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입장을 견지(堅持)하였음을 보여준다(Godet).

바울이 자신의 사명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것임이 분명하다(눅 17 : 10).


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다쓰지 아니하는 것이로라 - '다 쓰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카타크레사스다

이'(*)는 '남용하다'나 '오용하다'의 뜻이  아니라  '남김없이 소모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부정은 부분 부정이 아니라 전체 부정으로 '일체 사용하지 않다'의 뜻이 된다(Lenski).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잡혀(빌 3:12) 그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롬 1:1)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민족이나 종교, 국가, 사상, 인습, 유대교의 율법주의 등 그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었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 이것은 곧 완전한 자기 포기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져도 좋다는 뜨거운 사랑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11:24, 25;롬 9:3).


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유대민과 같이 된 것은 - 바울은 먼저 유대인을 언급했다. 그는 베냐민  출신

으로 육체적으로는 완벽한 유대인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관습과 명예를 포기하였으며 진정한 유대인, 곧 영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자들이라는 확신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대인처럼 행동하여 자기의 동역자이며 제자였던 디모데에게 유대인의 상징인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행 16:3) 예루살렘에서는 결례(缺禮)를 행하였다(행 21 : 17-29).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율법 아래있는 자 같이 - '율법 아래 있는 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유대인'을 뜻하는 다른 표현 이다(Thomas).

(2)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로서 모세의 율법을 받아들인 자들이다

(Hodge, Godet).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매여 있는 자'에 초점이 있으므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 여기서 '약한 자'(* 아스데네이스)란 복음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약한 양심의 소유자들로서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상태에 처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전 8: 9; 살전 5 : 14).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 '여러 사람'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10:32) 유대인, 헬라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인 가운데 약한 자들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Edwards). 바울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그들의 다양한 모양대로 '여러 모양'이 된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 앞 구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들을 가리킨다.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 본 구절의 문자적인 뜻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복음을 공유하는 자가 되고자'이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소유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 같이 공유하고 싶다는 말로써 전도에 대한  의지

를 표명한 것이다.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절제와 노력이 필요함을 권면하기 위하여 운동 경기를 비유로 들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매  2년마다 열렸던 '이스미안 경기'(Isthmian games)가 올림피안 경기(Olympian games),  피티안 경기(Pythian games), 네미안 경기(Nemean games)와 함께 그리스 사대 경기 중 하나이다. 이스미안 경기에는 주로 격투기, 경마 등이 진행되었다.

   

*** '운동장'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오'(*)는  606.75피트(feet)로 약 200m 길이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이  경기장,  곧  '스타디움'(Stadium)으로 뜻이 굳어졌다. 그 이유는 당시 그리이스 도시들에 있는 경기장들이 한 스타디오(약 200m)로 규격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고린도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이스미안  경기'에서는 승자에게 월계수나 솔잎, 또는 어린 파슬리(parsley) 잎을 엮어 만든  화환(wreath)을 머리에 씌워 주었으며 올림피안 경기에서는 우승자에게 야생 감나무 잎으로 엮은 화환을 씌워 주었다.


9: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싸우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퓌크튜오'(* )는 '퓌그메'(*

'주먹')와 '퓌크테스'(* '권투 선수')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것은  '권투시합'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에서 달리기 경주에서 권투 시합으로 비유를 바꾸어 표현의 폭을 넓히고 있다.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 이것은 권투 선수들이 시합을 하기 전에 상대방 없이 혼자서 연습하는 것을 표현한 말로 전문 용어로 '스키 아마키아'(*'싸움')라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싸움이 상대방이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대적(對敵)이 있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 같다.


9:27 내가 내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내가 내 몸을 - '쳐'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포피아죠'(*)는 '히포'(*'...아래')와 '옵스'(* '눈')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눈 아래 부위를 친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매우 사실적인 표현으로서 당시 권투  선수들이 상대방의 얼굴 부위를 공격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권투 시합을 연상하면서 자신의 싸울 대상이 자기 몸이 라는 것을 보여준다. 

'몸'에 해당하는 '소마'(*)는 고린도전, 후서에서 '영'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는 세속적이고도 육체적인 욕구를 제어하여 그리스도를 섬기기  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복종하게  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라고고'(*)는 '둘로스'(* '종', '노예')와 '아고'(* '데려오다', '끌고 오다')의 합성어로서전쟁에서 승자가 패자를 종으로 끌고 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패배시킨 후 이제는 온전히 복종시켜 종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바울은 그의 육체적인 본성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죄의 성향과 욕망까지 복종시키려고  하였다

(Hodge).

   남에게 전파한 후에 - '전파한'의 헬라어 '케뤽사스'(*)는 헬라어 '케뤽스'(* '전달자')에서 유래하였다. 운동 경기에서 '케뤽스'의 임무는 경기규칙을 설명하고 선수들을 소집시키며 나팔을 불어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일 등을  하였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달자인 '케뤽스'에 비유하였다.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 '버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스'(*)는 '도키마조'(*'조사하다', '시험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불합격 자'의 뜻을 갖는다. 또한 이 단어는 옛날 화폐로 사용된 주화의 무게를 달아서 제 무게를 지닌 주파와 그렇지 못한 불량 주화를 가려내는 것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다.


*바울이 버림받는다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두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

(1) '구원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는다'는 의미이다(Lenski, Godet).

(2)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Morris).

위의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한 듯하다. 바울은 자신이 구원 얻은 자로서 주님을 마땅히 섬기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신앙- 성경해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전서 11장 해석  (0) 2006.09.25
고린도전서 10장 해석  (0) 2006.09.25
고린도후서 8-9장 구문해석  (0) 2006.09.13
고린도후서 6-7장 요약  (0) 2006.08.28
고린도후서 6-7장 해석  (0) 2006.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