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6-7장 구문해석>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본문의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케논'은 '빈', '공허한'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한편 본문의 말씀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항이 추론(推論)된다. 하나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영과 육을 더럽게 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에(7:1; 12:20,21)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내용의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 중 일부가 그 가르침에 현혹되어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으리라는 것이다(11:4, Bruce).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 이 구절은
사 49:8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의 인용이다.
사 49:8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이제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혹자는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Lowery),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
(到來)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Harris, Barrett).
바울은 본 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다(Tasker).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 뉜) 바울이 전하는 화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Hughes).
6: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We put no stumbling block in anyone's path, so that our ministry will not be discredited |
stumble1 발부리가 걸리다, (…에) 채어 비틀거리다 《on, over》
discredit1 신용을 떨어뜨리다, 평판을 나쁘게 하다 2 의심하다, 신용하지 않다
ex·em·pla·ry〔, 〕 a. 본이 되는, 모범적인;훌륭한;징계적인;전형적인, 대표적인
여기서 '거리끼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코펜'(*)은 '실족할 계기', '범죄할 기회', '걸려 넘어짐'의 뜻을 갖는다 (stumbling block, NIV).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좋지 않은 평판으로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모범적인 삶(exemplary life)을 살아야한다는데 많은 관심이 있었다.
6:4,5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Rather, as servants of God we commend ourselves in every way: in great endurance; in troubles, hardships and distresses; in beatings, imprisonments and riots; in hard work, sleepless nights and hunger |
* 6장 4절-10절은 4장 8절-12절을 참고할 것
많이 견디는 것 - '견디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네'는 일반적으로 '인내'를 뜻하나 이 말 속에는 시련을 체념적으로 수용하거나 수동적으로 참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의미에서 끝까지 견디어 낸다는 뜻이 있다.
'많이 견디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홉 가지로 열거되는데(4, 5절)
** 이것들은 세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Bruce, Harris).
1) 첫번째로 일반적인 시련들 : 환난과 궁핍과 곤난이 그것이다.
a. 환난 (*들립세신) troubles
본서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로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압박
받는 체험을 말한다(1:4-11).
b. 궁핍(*아낭카이스) hardships
역경이 끊임없이 닥쳐오는 상황에서 겪는 고통을 말한다(행 20:34).
c. 곤란(*스테노코리아이스) distresses
좌절을 강요하는 극한상황을 가리킨다(1:7, 8;4:8).
2) 두번째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육체에 가해지는 핍박들이다
d. 매맞음 beatings
e. 갇힘 imprisonments
f. 요란한 것 riots (폭동, 소동)
2) 세번째로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짊어진 것들
g. 수고로움 hard work - 열성적으로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한 일과
바울이 교회에 재정적 부담을 지우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노동을 했던 것(행 18:3;살전 2:9)을 가리키고
h. 자지 못함 sleepless nights과 I. 먹지 못함 hunger은
영적인 내핍 훈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고 살고 먹고 싶은 상태에서
그러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11:27).
바울이 이런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마주쳐 견디어 나가는 것
이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미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
이 그렇게 했다(5:13).
6:6,7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in purity, understanding, patience and kindness; in the Holy Spirit and in sincere love; in truthful speech and in the power of God; with weapons of righteousness in the right hand and in the left; |
5절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시련들을 견디어 나간 것이 사도의 외적 자질이라면 본절과 7절에 열거되는 항목들은 사도의 직분을 이행하는 동안 줄곧 지향했던 내적인 자질을 말한다.
** 내적인 자질 8가지
a. 깨끗함(*하그노테티) purity,- 영적인 순결 즉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과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실을 가리킨다(살전 2:10).
b. 지식(*그노세이) understanding,- 여기서 '지식'의 의미를 분명히 가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구원에 대한 지식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5:20, Hughes).
c. 오래 참음(*마크로뒤미아) patience - 혹자는 이를 모욕이나 상해(傷害)를 당했을 때 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으로 이해한다(Plummer). 또한 혹자는 본절의 '마크로뒤미아'를 4절의 '휘포모네'(*'견디는것')와 구별하여 '견디는것'은 교회 밖의 대적들로부터 오는 시련에 대한 인내를 가리키며, '오래 참음'은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인내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Hughes). 실제로 바울은 사심 없는 순수한 동기와 목숨을 돌보지 않는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겨나는 오해와 불신, 분란과 열매 맺지 못함 등에 대해 끊임없이 참고 언제나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엡 4:2;골 1:11;딤후 4:2).
d. 자비함(*크레스토테티') kindness-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결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갈 5:22;엡 2:7).
e. 성령의 감화 Holy Spirit - 혹자는 본절의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를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영'으로 이해하나(Barrett) 이는 '감화'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기오'(*)를 동반하므로 타당치 않다. '프뉴마티 하기오'는 그 용법상 '성령'(Holy spirit, NIV)을 의미하며, 여기에 특히 정관사가 없는 것은 '성령의 능력' 또는 '성령의 은사'(NEB)를 암시한다(Hughes, Tasker).
f. 거짓이 없는 사랑 sincere love- 이는 성령의 사역의 최대 열매이다(Bengel). 여기서 '거짓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뉘포크리토'(*)는 부정 접두어 '아'(* )와 '가장하다', '속이다'는 뜻을 가진 '휘포크리토스'(*)가 합성된 단어로 '위선됨이 없이'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g. 진리의 말씀 truthful speech - 복음 곧 화해의 말씀(5:19)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다. 바울은 적대자 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선포하였다(4:2).
h. 하나님의 능력 power of God
바울이 선포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즉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설교와 행위 속에 현시(現視)됨으로써 증명된다(롬 15:19;고전 1:18;2:4,5).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적 정비가 완벽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잘 사용하는 로마 군대의 무장법(롬13:12 엡6:13-17)을 비유로 들고 있다. 여기서 '의의 병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나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의'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고결한 인격,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포괄한다고 본다(Harris, Tasker).
'좌우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덱시온 카이 아리스테론'(*)은 문자적으로 '오른손과 왼손에'라는 의미이다(in the right hand and in the left, NIV). 이는 양손이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어 언제라도 적의 공격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태세가 완비되어 있음을 말한다(Barrett). 이 묘사는 마치 적군의 화전(火箭)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두 겹의 나무에 짐승의 가죽을 덮어서 만든 방패를 한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을 든 로마 병사를 연상케 한다. 바울은 엡 6:16,17에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으로서 공격용으로 '성령의 검'과 방어용으로 '믿음의 방패' 를 갖출 것을 언급하였다.
6: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through glory and dishonor, bad report and good report; genuine, yet regarded as impostors |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 바울은 그의 사도 직무를 수행하면서 존경을 받을때도 있었으나(갈 4:14) 오해와 비방을 받을 때도 많았다(10:10;).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어떠한 난관에 부딪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그의 직책(5:18)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었다.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 본문은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공동번역)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뒤에서 비방(誹謗)하는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사랑하는 태도로 일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결국 교만과 자기 만족으로 이끌뿐이므로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바울은 본절을 통해서 '악한 평판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그를 해칠 수 없고, 좋은 평판이 참되다 할지라도 결코 그를 비뚤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결연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 예수께서도 생전에 미혹하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었다(마27:63; 요7:12).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했을 때, 그의 대적들은 그를 가리켜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고(고전 15:15),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속임수라는 비난을 하였다(12:16-18).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결코 거짓말하는 자가 아님을 하나님 앞에서 강력하게 증거한다(4:2;5:11;11:31).
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known, yet regarded as unknown; dying, and yet we live on; beaten, and yet not killed |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 '무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노우메노이'(*)는 '무시당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바울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바울이 무시당했다는 것은 아마 그의 사도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고전 9:1;15:8, 9).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반(反)하는 자기들의 견해를 주입시키려 하였던 상황이 전개되었었다(10-13장). 그리고 사실상 바울은, 열한 사도들처럼 생전의 예수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외부적 조건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모든 사도직의 유일한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도직은 부여받았다(갈1:1,12,16).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중심 사도로부터도 인정받았고 (갈 2:7,9),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인정받았음이 틀림없다(5:11).
죽는 자 같으나...살고 - 본절은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으로 실제적인 의미와 신학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1) 실제적으로 바울은 죽음의 위협을 여러 번 겪었고(행 14:19;고전 15:30) 거의 죽게 된 상황에까지 이르렀었다(1:8, 9). 또한 그는
2) 예수의 죽음을 그의 몸에 짊어지고 다녔다(4:10-12). 여기에는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5:14, 15;롬 6:1-14;갈 2:20). 본절에서 바울은 그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獻身)된 도구가 되었음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Martin).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징계는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행동에 비유되는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증거로 이해되었다(욥 5:17;시 94:12;119:67;잠 3:11, 12;렘 31:18, 19등).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그와 같이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바리새인으로서 교회를 심히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가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랑의 표시임을 인식하였고 실제의 삶에서 이를 체험하였다(1:9;4:11;고전 11:32).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sorrowful, yet always rejoicing; poor, yet making many rich; having nothing, and yet possessing everything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 적대자들의 사도 시비, 그것에 의해 흔들렸던 일부의 고린도 교인들, 그리고 전체적인 이스라엘의 불신앙 등은 바울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늘 기뻐하였고(2:3;7:4;롬 12:12;고전 16:17)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리하도록 가르쳤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특징이다(Barrett).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경제적인 가난의 상태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가난이다(Collange).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귀한 지식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부요한 자라고 생각하였다(빌3:8). 그러므로 바울이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바울이 '아무것도 없는 자'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1) 하나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한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이 세대'가 진행되는 동안만 쓸모 있고, 다가오는 '새로운세대'에는 전혀 가치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세대'를 얻었으므로 사실은 모든 것을 소유한 자였다(고전 3:21,22).
(2)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고전 3:23)라는 의미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에 오직 주 예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을 믿고 살아간다(Barrett).
한편 본절의 내용은 영적인 것에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초점을 맞춘 철저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 사도의 자화상(自畵像)을 보여준다.
바울은 실로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던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자였다.
6:11-13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We have spoken freely to you, Corinthians, and opened wide our hearts to you. We are not withholding our affection from you, but you are withholding yours from us. As a fair exchange--I speak as to my children--open wide your hearts also.
|
우리의 입이 열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
(공동번역)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 (open mind)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정직하게 숨김없이 말하였고 그들을 향하여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어떠한 비밀도 없었다.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것이니라 -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공동번역)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그의 영적 자녀들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Hughes, Tasker).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Plummer).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자존심이나 권위를 내세워 옹졸해지는 법이 없듯이 바울 자신도 단순히 가르치는 자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자로서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6:14-15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What harmony is there between Christ and Belial? What does a believer have in common with an unbeliever? |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13절)이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을까 ? 갑자기 서신의 주제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과의 관계에서, 고린도 교인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본절의 '믿지 않는 자'(*아피스토이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바울의 적대자들을 가리킨다(Rensberger, Collange). 이 견해를 주장
하는 자들은 근거로서 본서의 주제는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2) 문자 그대로 불신자들을 가리킨다(Filson, Barrett).
(3) 믿음의 순수성을 해치는 세상과의 타협을 가리킨다(Hughes).
(1), (2), (3)의 견해가 모두 일면 타당성을 지니나, '아피스토이스'의 어의상, 그리고 전후 문맥상 (2)와 (3)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
한편 성도들의 순결을 요구하는 본문은
신 22:10의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Do not plow with an ox and a donkey yoked together와 레 19:19의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하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라는 구약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의 '멍에'는 믿음의 순수성을 저해하는
불신자와의 결혼(고전 7:39), 우상숭배(고전 10:14), 도덕적 타락(고전 6:8),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11:4)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 신앙과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 성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 '불법'(*아노미아)은 불신자와 적그
리스도의 특징이다(롬 6:19;살후 2:3, 7).
반면에 ‘의’(*디카이오쉬네)는 신자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의 '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칭의의 차원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Martin, Collange).
벨리알 - 야알'(*)의 음역으로 본래는 '무가치함', '악함'을 뜻하는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말은 매우 나쁜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1) 개인에게 적용될 때는 불량하거나, 방탕하고, 거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고(삿 19:22;삼상 10:27)
(2)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될 때는
ㄱ. '악심을 품은 허위 선전'을 뜻하는 '벨리알의 말'(신15:9; 시41:8; 101:3)
ㄴ. ‘거짓 증언자'를 뜻하는 '벨리알의 증인'(잠 19:28)
ㄷ. '음모를 꾸미는 자'를 의미하는 '벨리알의 충고자'(나 1:11) 등으로 적용되었다.
(3) 이 말이 사해 사본에서는 '악마의 왕'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단'을 가리킨다고 본다(Robertson, Barrett).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 '믿지 않는자'(*아피스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킬 때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이다(14절).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가 서로 상종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근본적으로 병립할 수 없으며, 운명을 같이 할 수가 없다(2:16).
6:17-18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 본문은 이사야가 그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은 떠나 그곳의 이교주의와 단절하라고 권고한 사 52:11(너희는 떠날찌어다 떠날찌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찌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찌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의 인용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기 위해서는 백성으로서의 순결성이 선행적으로 요구된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려면 음행, 토색, 우상숭배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고전 5:1-13).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본 구절 앞에 '그러면'(*카이)이 있다. 이는 앞의 조건이 충족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영접한다는 의미가 된다.
7:4 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
담대한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르레시아'(*)는 '모든 것을 거침없이 자유롭게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어떤 비밀도 없이 다 말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 바울은 14절에서 디도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기 전에 디도에게 교인들을 자랑하였었다.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 좋은 소식을 들었으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이길 것이라는 그의 확신(13:8)에 근거한 것이었다. 물론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재회한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좋은 소식을 들은(5-16절) 후에 더욱더 그들에 대한 자신의 자랑이 헛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겪은 일들을 회고하면서 앞절에서 언급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이유를 계속 설명하고 있다. 본절의 '육체'(*사륵스)는 신학적인 의미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Bruce). 바울은 12:7에서 '육체에 가시'를 언급했던 바, 여기서 자신의 신체적 연약함을 나타내고 있다.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 바울은 마게도냐에 도착한 후 그들이 신자든 불신자든간에 많은 적대자들로부터 줄곧 박해를 받는 역경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바울은 심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분쟁에 말린 고린도 교인들을 치유(治癒)하기 위해 디도를 파견했던 바, 고린도 교인들이 디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염려요, 부차적으로는 예정된 시점에 디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야기 되었던 염려에서 비롯되었다(Plummer, Martin).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
기뻐함은...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의 준엄한 편지는 잠시 동안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근심을, 바울에게는 후회를 가져다 주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바울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바, 근심에서 회개로 후회에서 기쁨으로의 반전(反轉)은 바울이 쓴 편지 자체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개입 때문이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렇게 여러분이 마음 아파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일이니 결국 여러분이 우리로 해서 손해 본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공동번역)의 뜻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근심이 회개로 이어졌을 때 그것을 단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러기에 때로 하나님께서는 근심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신다.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세상 근심 - 바울은 두 종류의 근심과 그 각각의 결과들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설명하면서 앞절 내용과 연결하여 계속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의 판단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여 자기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돌이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근심이다. 그리하여
혹자는 이 근심을 죄에 대한 근심이요,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린 행위에 대한 근심이=라고 하여 '신령한 근심'이라고 정의하였다(M. Henry).
이에 비해 '세상근심'은 분노하고 원한을 품으며 자기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근심이다. 이 근심의 결과는 낙담하고 좌절에 빠져 자기 파괴적인 상황으로 발전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종류의 근심에 대한 성경의 전형적인 실례는 두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에서와 다윗이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고 나중에 후회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그에게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는 없었다(히 12:16,17). 그러나 자기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다윗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았다(시 51:1-19).
둘째는 가롯 유다와 베드로이다.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기 전에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끝까지 타락하였던(마 26:24) 반면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 통곡하며 회개하였다(마 26:75).
고린도 교인들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회개하였으며 거짓 사도들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였다. 이렇게 바울의 사랑('준엄한 편지')에 응답한 그들은 결과적으로 '영적 사망'을 낳는 죄의 길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Martin).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겪은 근심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임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증명해 보이고 있다.
구체적 증거들은 다음의 7가지로 정리된다.
1) 간절하게 하며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그 심각성을 진지하게 의식하고 그것들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심을 갖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2) 변명하게 하며 - 이에 대해서는 대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인정하고 그들의 입장에 대해 탄원(歎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3) 분하게 하며 - 이것은 바울을 공격하여 그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대자들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이 의분을 느끼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과거에 고린도 교인들은 이들에게 동조하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행위를 방임하였었다.
4) 두렵게 하며 - 이것은 바울을 다시 볼 면목이 없는 것, 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낸다.
5) 사모하게 하여 - 7절에서처럼, 복음을 심어준 바울을 진정한 사도로 받아들이며 예 전처럼 신뢰와 사랑의 관계로 회복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나타낸다.
6) 열심있게 하며 - 이는 회개와 성결의 실천을 위한 열심 그리고 바울을 섬기려는 열심을 의미한다.
7) 벌하게 하였는가 -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공격한 자들을 공의에 입각하며 처벌하였음을 말해준다.
깨끗함을 나타내었으니라 - At every point you have proved yourselves to be innocent in this matter. (NIV)
본문의 의미가 고린도 교인들의 본래적인 무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 있던 잘못이 용서된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7: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
불의 행한 자...불의 당한 자 - 여기서 논점이 되는 것은 바울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과 가해자의 구체적인 범죄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불의를 행한 자와 그가 저지른 불의는 고전 5:1이하에 기록된 고린도 교회 내의 음행 사건, 즉 아비의 아내를 취한 패륜아 사건이었다고 보는 견해이다(Farrar). 이럴 경우 불의를 당한 자는 아들에게 아내를 빼앗긴 아비가 될 것이다.
(2) 불의를 행한 자는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이며 이들이 저지른 불의한 행위는 바울의 사도직에 도전하고 그의 명예를 훼손시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Fallon, Martin). 이 경우 피해자는 바울이다.
전자의 견해는 2:5을 볼 때 다소 타당성이 적어진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찌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
왜냐하면 2:5에 의하면 피해자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전개되는 상황에 더 잘 부합된다. 문제는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외부에서 온 거짓 교사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내세우며(3:1) 바울의 권위를 무시하는 언동을 하고 그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를 했을때 생겼을 것이고, 그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기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그의 편을 들지도 않고 그 적대자들을 제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회개해야하고 해명해야했던 이유가 된다(9-11절).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준엄한 편지'를 보낸 목적이 드러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준엄한 편지'를 보냈던 것이고 혹시나 고린도 교인들이 그 편지에 대하여 오해하거나 근심하지 않을까 걱정하였었다.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곧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쳤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이 '준엄한 편지'를 쓴 것은 불의한 자들이나 직접적 피해자인 바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서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성도들간의 교제를 회복토록하기 위함이며, 아울러 바울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열정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7:16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I am glad I can have complete confidence in you. |
(표준새번역)
나는 여러분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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