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경해석

고린도후서 3,4장 해석

白鏡 2006. 8. 16. 09:26
 

<고린도후서 3,4장 구문해석>

(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천거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 너희에게 맡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 천거서 - 이것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일종의 소개장으로 어떤 사람의 직분과 권한에 대한 위임장 또는 신임장 역할을 하였다(행 9:2;18:27; 고전16:3,10). 바울의 적대자들은 이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으나 바울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울이 이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위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것이기 때문이다(행  26:12-18). 여하튼 바울의 적대자들은 바울이 추천서를 가지지 못한 거짓 사도라고 악선전을 하고 다녔음에 틀림없다. 바울은 이 추천서 자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도 필요에 따라서는 추천서를 이용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8:16-24; 롬16:1,2; 고전16:3,10,11).

(롬16:1,2)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칭찬과 승인과 위임보다 하나님의 승인이 훨씬 더  우위에 있고 또한 한통의 추천서보다는 사도 자신의 깨끗한 양심과 성도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에 사도로서의 그의 진정성(眞正性)이 확인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바울은 어디서 추천서를 얻어다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주거나 그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3:2)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바라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편지에 비유함으로 해서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가졌다고 자랑하는 추천서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서로 대조시키고 있다.

(1) 적대자들이 지니고 있는 추천서는 파피루스 종이에 쓰여진 것이나 바울의 것은 마음에 쓰여진 것이다.

(2) 적대자들의 추천서는 잉크로 쓰여진 것이나 바울의 것은 하나님의 영(靈)으로 쓰여진 것이다(3절).

(3) 적대자들이 가진 추천서는 종이에 쓰여진 것이므로 몇몇 제한된 사람에게만 보여질 수 있으나 바울의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이다.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돌비...심비 - 여기서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의 ‘돌비’와 ‘심비’를 대비시킴으로써 바울의 적대자들은 하나님께서 돌판에 써 모세에게 수여한 옛 계명(출 24:12) 에 매여 있는 반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심령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 즉 새 계명을 새겨 넣은 것을 강조하고 있다.


(3: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Such confidence as this is ours through Christ before God.

여기서 ‘이같은 확신’이 가리키는 내용이 앞에서 나온 내용인지 아니면 다음에 이어질 5절을 가리키는 것인지 애매하게 번역되어 있으나 영어성경은 확실하게 앞에 나온 내용임을 가리키고 있고 문맥으로 보아도 그것이 타당한 것 같다. 또한 이 절을 보다 쉽게 뜻 풀이를 하면 “이러한 확신은 그리스도께서 나의 심령 속에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정도로 하면 되겠고 본문은 바울이 결코 자화자찬하거나 현상적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서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

(자격있다)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

Not that we are competent in ourselves to claim anything for ourselves,

but our competence(능력) comes from God.


* 5절과 6절에 나오는 ‘만족’이라는 단어 대신 ‘능력, 자격, 합당한‘ 등으로 대치하면 의미가 확실해 진다.


바울은 자신의 확신이 자기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고 있듯이 자기를 통해 일어난 모든 능력의 원천(源泉)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있다.


(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합당케) 하셨으니 의문(옛 언약)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새 언약)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He has made us competent as ministers of a new covenant(언약)--not

of the letter but of the Spirit; for the letter kills, but the Spirit gives life.


저가 - 만족케 하셨으니 :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 언약의 일꾼되기에 조금도 손색없이 하시고”


의문(儀文)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 '의문'(*그람마)은 본래 알파벳의 '문자'(letter)를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점차 `기록된 것' 즉 '문서'나 '책'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되었다. 이는 앞서 3절에서 나온 ‘돌비에 쓴 것’ (tablets of stone, on which the letter of the law was

originally written) 즉 '옛 언약'과 일치한다.

한편 '영'(*프뉴마)은 썩어질 육과 대비되는 `영혼', 혹은 '생명'을 뜻하며 같은 3절에서 나온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the writing of the law "with

the Spirit of the living God ....on the talets of human heart)과 일치하며 새 언약 즉 복음을 가리킨다.

결국 바울은 본문에서 '의문'과 '영'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통해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

(1) 적응 대상에 있어서. 옛 언약은 육적 이스라엘(출 19:5, 6)에 적용됨로써  민족적 한계를 갖는 반면,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됨으로써 민족적 한계를 넘어선다.

(2) 언약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옛 언약은 하나님께 대해 순종을 맹세하고 피의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성립된 반면, 새 언약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심으로써 성립되었다.

(3) 언약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서. 옛 언약은 행함으로 하나 새 언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한다(롬 10:9, 10;히 10:39).

(4)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언약의 결과에 있어서 옛 언약은 죽음을 낳지만 새 언약은 생명을 낳는다. 따라서 옛 언약에 대해 새 언약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시간적인 차이를 넘어 완전한 질적 차이를 가진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엣 언약 즉 율법을 들이대었을 때는 그 앞에 살아남을 인간이 하나도 없는데 반해 새 언약은 오로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므로 아무리 부족하고 못난 인간이라도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3:7)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의문의 직분...없어질 영광 - 바울의 논의의 주제가 언약에 관한 것에서 직분에  관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 본절에 묘사되고 있는 장면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석판을 수여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오는 출34:29-35의 장면이다. 그 논점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할 율법을 선포하는 직분을 부여 받은 모세도 그 직분으로 인한 영광 때문에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영혼을 살리는 복음을 전파할 직분을 가진 바울의 영광은 더할 나위 없이 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돌에 새긴 것' 즉 '율법'이 본래는 선한 것이었고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으나 사람들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설명(롬 7:10-12)이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의문'은 곧 죽게 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도 그런 정도의 전이해(前理解)는 되어 있었던 듯하다. 한편 본절의 '없어질 영광'은 바울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에 관한 유대교의 전승(Targum ongelos)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유대교의 전승에서는 모세의 얼굴의 광채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반박하면서 그 광채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잠정적인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Martin).


(3:12)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것 같이 아니하노라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 본절은 7절부터 시작된 바 출 34:29-35에 관한  바울의 미드라쉬(Midrash)적인 해석의 연속이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모세가 왜  얼굴에 수건을 썼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모세의 얼굴에 있던 광채가 사라졌을 때 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져 그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Harris).

(2)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Hughes).

(3) 구속사의 비밀을 깨달은 모세는 자기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일시적인 것임을 알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현혹되어 거기에 영원한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랬을 것이다. 이 가운데 첫번째와 세번째 견해일 가능성이 많다. 이중에서 첫번째 견해가 타당하다고 볼 경우, 모세의 떳떳치 못함과 바울 자신의 떳떳함을 비교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는데 바울이 그것을 말하려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바울이

모세가 하였던 것처럼 얼굴에 수건을 쓰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즉 모세는 그의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까봐 얼굴에 수건을 썼지만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영광이 영원한 것이므로 사람들의 오해를 두려워할 필요없이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4)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But their minds were made dull,

     dull : <머리가> 둔한, 우둔한(stupid);멍청한

완고하여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 모세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의 영광 즉 율법의 영광이 곧 사라질 한시적(限時的)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둔함에 기인하는 것이었고 이 우둔함으로 인해 그들의 눈에는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수건이 씌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수건'(*칼륌마)은 유대인의 영적 무지와 오해, 예수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불신앙, 사랑이 상실된 편견과 엄격한 율법주의적 편견등을 상징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 유대인들의 눈을 감싸고 있어 그들로 하여금 영적 맹아 상태에 머물게 하는 그 수건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벗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실(마 5:17) 하나님의 은혜와 참된 영적 자유를 인간에게 가져오셨기 때문이다.


(3: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돌아가면'(*에피스트렙세)은 '돌이키다', '회개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어 회심의 의미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누구라도 언제든지 회심하고 주께 돌아오면 마음의 수건이 벗겨져 영적 무지와 오해, 불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없어지게 되며(롬 10:4) 새로운 언약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의 시대가 열려지게 된다.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주는 영이시니 - 본절은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는 6절 내용과 연관하여 바로 이해될 수 있다.즉 바울은 '의문'과 '영', '옛 언약'과 '새언약', '율법'과 `복음'을 대조하면서 후자(後者)의 우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Rather, we have renounced secret and shameful ways; we do not use

deception, nor do we distort the word of God. on the contrary, by

setting forth the truth plainly we commend ourselves to every man's

conscience in the sight of God.


본 절은 바울과 적대자들 사이의 논쟁적 상황에서 바울이 그들과의 차이를 나타내는 내용이다. 뒤집어 읽으면 그들은 이렇지 않다는 말이다.


숨은 부끄러움의 일 - 본문의 뜻은 '드러내지 못할 창피스러운 일'(공동번역)이다. '버리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아페이파메다'(*)는 부정과거로서 이미 버렸음을 의미한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와 논쟁하는 자들이 그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여기서 그 부끄러운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더러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하면서 자신들은 은밀한 곳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적대자들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 영문으로 번역하면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추천한다”





(4:3-4)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표준새번역)

우리의 복음이 가려 있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4:11)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산자'라는 표현은 죽음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만약 성도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 넘기워진다면 그것은 곧 그의 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는 증거이다.

그것은 죽을 육체가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 한다 (고전15:35-49). 여기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모습으로 그날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육체적 생존'이 주의 재림에 확실히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주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재림에의 확실한 참여를 보장한다.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본절에서 바울은 '죽음 가운데서의 생명'이라는 논지를 1:6, 7에서 언급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받는 고난'과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 곧 바울이 당하는 고난이 심할수록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더 좋은 영적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이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께서 만인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감내하셨던 것처럼 바울 자신의 고난과 시련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유익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골 1:24).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4:13)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

이 문구는 시 116:10(내가 믿는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I believed; therefore I said, "I am greatly afflicted.)의  인용이다.

시편 기자는 절망적인 질병과 그에 수반되는 낙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헤아리며(시 116:1-11)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가장 적절하게 헌신할 수 있을까를 고려하였다(시 116:12-19). 바울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여서도 복음을 굳게 믿었고 항상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믿는바 복음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Harris).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 시편 기자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


(4:15)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All this is

for your benefit, so that the grace that is reaching more and more

people may cause thanksgiving to overflow to the glory of God.


(표준새번역)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 '그러므로'라는 표현은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앞에서 제시되었음을 암시한다. 바울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 언약을 전하는 고귀한 직분을 받았기 때문이다(1절).

둘째,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리라는 소망 때문이다(14절).

셋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혼을 윤택(潤澤)케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15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 여기서 '겉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제한된 육체를 가진 이 세대의 인간을 가리킨다. 이에 대조되는 '속사람'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영적 실존을 가리키는데(5:17;엡 2:5;골 3:9, 10;벧전 1:3) '겉사람'이 낡아져가는 것은 이 세대의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생성 소멸의 원리이다. 그러나 '속사람'이 도리어 새로워지는 것은 중생한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식이 새로워지며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엡 4:15;골 3:10). 이 '새로워짐'은 종말론적 재림의 때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이미 현재화되어 있다. 바울은 이것을  '날마다  새롭도다'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본문은 바울 자신에게도 적절하게 적용되는 바, 그의 육체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고난들(1:7-9;4:8-11)과 세월의 흐름으로 하여 점점 쇠약해지지만 그의 영적 실존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So we fix our eyes not

on what is seen, but on what is unseen.

여기서 '돌아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코페오'는 '주목하다', '소망하다'의 뜻이다.

 

*參考文獻 : 개역한글성경, 표준새번역, 톰슨주석성경, NIV,

               The NIV Study Bible, 성경주석 Web s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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