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Revision : August 13th, 2006)
<고린도후서 10-13장 구문해석>
(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I, Paul, who am "timid" when face to face with you, but "bold" when away!
(겁많은,소심한) (대담한)
(10:4-5)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The weapons we fight with are not the weapons of the world. on the contrary, they have divine power to demolish strongholds. We demolish arguments and every pretension that sets itself up against the knowledge of God, and we take captive every thought to make it obedient to Christ.
이 절은 영어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 뜻이 더 잘 통한다. 즉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요 견고한 진을 파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강력함이라
모든 논쟁과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까지 대적하는 모든 주장을 파하고 또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본문에서 '이론'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스무스'(*)는 하나님과 분리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도모(圖謀), 사고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특히 본문에서 이 말은 '허황된 이론'이나 '궤변'을 뜻한다. 이럴 경우 바울이 지금 공격의 초점으로 삼는 자들은 고린도 교인들이라기 보다는 외부에서 침입한 거짓 사도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0:5)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 여기서 '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에마'(*)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고(빌 4:7),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는데(2:11;3:14;11:3)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이를 공동번역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계략'으로 번역하여, '어떠한 계략이든지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라고 해석했다.
* 본절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하나님의 무기를 가지고 임하는 싸움의 최종적 목적은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사도적 권위로써 적대자들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따르려는 바울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 함은 육체(세상)의 병기를 가지고(4절) 육체(세상)의 방식으로(3절) 싸우는 자들이 상대를 완전히 파탄(破綻)시키는 것과 달리 선한 목적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 - 여기서 '너희'는 고린도 교인들 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본 구절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대리자인 바울에게 복종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모든 복종치 않는 것 - 이 말에 해당되는 자들은 외부에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이나 끝까지 이들에게 동조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 무엇에 대한 불복종인가?
1)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맺어진 선교 영역에 대한 약속
(갈 2:1-9)에 대한 불복종(Barrett).
2)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에 대한 불복종.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바울이 본절의 진술을 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이 짐작할 수 있다.
일단의 거짓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합의된 바 있는 선교 영역의 구분을 무시하고 바울의 선교지인 고린도에 침입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언동을 하였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시키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고린도교인들이 이들에게 동조하였을 것이며,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인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찐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You are looking only on the surface of things. If anyone is confident that he belongs to Christ, he should consider again that we belong to Christ just as much as he.
외모만 보는도다 -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여러분은 사실을 똑바로 보십시오'로 의역했다. 즉 본문은 바울의 의모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바울의 적대자들에 대한 근시안적 판단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외모'는 외형적인 것으로(5:12) 천거서(3:1), 수사학적 언변(11:6), 권위에 찬 태도(11:20), 환상을 보는 것과 같은 신비적 체험(12:1-7)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Harris).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외부적인 징표(徵表)들에 쉽게 현혹되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그러한 외부적인 요소들에 현혹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 본 구절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빈디쉬(Windisch)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구체적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네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1) 단순히 그리스도인 됨을 의미.
(2) 실존했던 인물로서의 예수와의 특별한 관계
(3) 사도적 신분
(4) 천적(天的)인 그리스도와의 신비주의적이고 영지주의적인 관계를 가리킬 수 있다.
이 가운데 첫 번 째 견해를 따라 절의 요지를 파악하면, 바울의 적대자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자부한다면, 우리도(물론 바울을 가리킨다) 그에 뒤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된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바울의 적대자가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확신에 찬 선전을 했다면 그것은 은연중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에 대해 적대자들이 논한 적이 없다. 따라서 첫번째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신비주의적인
연합에 대한 것도 아니기에 네 번 째 견해도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특수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고 결과적으로 사도의 권위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고린도에 들어온 적대자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했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이야말로 권위 있는 사도라는 것을 과시했으며 그에 비해 바울은 권위있는 사도가 아니라고 말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암시를 주었을 것이다.
(10:9-10)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I do not want to seem to be trying to frighten you with my letters.
For some say, "His letters are weighty and forceful, but in person he is unimpressive and his speaking amounts to nothing."
나는 편지로써 당신들을 겁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가 만나서 이야기 할 때는 박력도 없고 말솜씨도 시원찮으면서 편지를 쓰기만 하면 심히 무게 잡는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편지를 쓸 때 힘있게 쓴 것 만큼이나 만나서 행할 때에도 힘있고 담대하다는 사실을 필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10: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가 되려고 하거나, 그들과 견주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척도로 하여 자기를 재고, 자기를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표준새번역)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없노라 -
본문에서 바울은 적대자들을 가리켜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찬(自讚)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아마 자기들을 내세우기 위한 추천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적대자들은 추천서의 권위에 의존하여 자기들이 진정한 사도임을 과시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지만 바울은 스스로를 추천하지도 않고 추천서에 의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3:1;5:12).
적대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추천을 받은 사도라고 자랑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사도이다(갈 1:1).
그들은 비교를 통해 자기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것이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기로서...헤아리고...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
사실 적대자들이 만든 표준이나 척도 즉 인간적인 지혜, 사도로서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위압적인 태도, 수사학적인 웅변술 등은 당시에 어느 정도 일반성을 갖는 것이었다(Barrett)).
그러나 바울은 그런 기준들을 이미 오래 전에 하찮은 것으로 버렸다
(4:5; 고전 2:1-5).
바울이 보기에 그런 척도들은 천박한 것이었고 그 척도를 가지고
자신을 추정하고 과시하는 것이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10:13)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 - 바울은 적대자들의 자랑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선교의 영역을 무시한 것이므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한계'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노노스'(*)는 '길이를 재는 막대기','줄자'라는 뜻인데
(1) 규범이나 표준의 의미로도 쓰이고(갈 6:16),
(2) 일정하게 한정된 영역을 가리키기도 한다(10:14-16).
본절에서 이 말은 후자의 의미이며 바울이 여기서 문제삼는 것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선교 영역의 준수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고(행 9:15; 롬 1:5;15:18), 그에게 이방(異邦)을 선교영역으로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도 합의된 바 있다(갈 2:9).
이런 한계에 입각하여 바울은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한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롬 15:20).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러 복음의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지키면서 행한 것이었다
(10:15)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우리는 주제 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활동 범위가 여러분 가운데서 더 넓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Our hope is that, as your faith continues to grow, our area of activity among you will greatly expand.(NIV) so that we can preach the gospel in the regions beyond you.(10:16)
(10:16)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For we do not want to boast about work already done in another man's territory. (NIV)
15절과 16절은 같이 연결시켜 읽어야 바른 뜻이 통한다.
(11:1)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이제부터 바울은 자기가 지금까지 말해온 바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주장(10:18)에 모순되게도 자기의 공로를 나타내려 한다.
그 이유는 그의 표현대로 고린도 교인들이 억지로 시킨 일이었다(12:11).
왜냐하면 유감스럽게도 고린도 교인들의 수준이 턱없이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현혹되는 정도였으므로(10:7) 그들에게 바른 것을 보여주고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바울 자신이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I am jealous for you with a godly jealousy. I promised you to one husband, to Christ, so that I might present you as a pure virgin to him
'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로'(*)는 '열심'이라는 말보다는 '시기'나
'질투'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Farrar, Martin, Barrett).
그리고 영역 성경 중 RSV, NIV 등도 '시기'나 '질투'로 번역하고 있다.
본 구절의 내용은 바울 자신이 애써 전도했던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에게 유혹된 것에 대한 질투이자 하나님의 질투하심과 동일한 질투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에 침입해 들어온 적대자들을 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은 여기서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혼인관계의 비유를 고린도 교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관계의 비유로 사용하고 있다.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누가 - 이들은 가상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 즉 바울의 적대자임에 틀림없다. 본절만으로 이들의 정체를 밝혀내기가 어렵지만 적어도 이들이 팔레스틴에서 온 자들로서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사이비 기독교인들이라 볼 수 있다.
①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11:13)
② 히브리인 (11:22)
다른 예수 - 역사적으로 존재했으며 열 두 제자를 거느렸던 예수를 부인하고 또 다른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본질에 관해 달리 해석하는 것을 가리키다.
가령 예수의 인성(人性)을 인정하지 않는 영지주의적 기독론, 즉 예수는 순수한 인간이 아니라 영적 인간(pneumatiker)또는 신적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Goudge).
다른 영...다른 복음 - 이것은 '다른 예수'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다. '다른'이란 말이 게속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은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다른 복음'에 대해서는 갈 1:6-9 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대속의 도를 부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갈 1:4).
(1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줄 생각하노라
바울이 이들을 ‘큰 사도’라고 지칭한 것은 그들을 비꼬는 어법으로 볼 수 있다.(Pasul's sarcastic way of referring to the false apostles ... -The NIV Study Bible-)
(11:7)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하나님의 복음을 값 없이 -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하되 그 교회로부터 아무런 물질적 지원을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바울의 대적자들에 의한 또 하나의 중상모략은 바울이 자신의 가름침에 대가를 받지 않은 것은 그만큼 그의 가르침이 보잘것없었다는 증거이며 또한 선생은 자신의 수고한 가치만큼 (in proportion to the worth of his performance) 댓가를 받아야한다는 규정(rule)을 범하는 죄를 지었다고 공격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서 그들의 목적이 그 당시(1세기) 헬라 지방의 떠돌이 철학자나 신학자들(travelling philosophers and religious teachers)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돈을 벌고자 하는데 있다는 것을 은폐하기에도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11:10)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폐를 끼치려 하지 않은 자신의 처신이 오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 것임을 결의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다.
이는 사도로서의 마땅한 권리인 생활비 보조에 대한 요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자신의 청렴함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며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다.
나의 이 자랑 - 사례를 받지 않고 사역한 일
(11:11)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애정의 결핍을 증명하는 결과가 된다는 오해가 생겼음이 분명하다.
(11:12)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이 오해를 받아가면서까지 대가를 거부한 것은 거짓 사도들과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바울처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도라고 주장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본절은 거짓 사도들이 내심으로 바울도 자신들처럼 복음의 삯을 받기를 바랐고 또한 그렇게 된다면 자신들도 바울처럼 복음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 전심 전력(全心全力)하는 사도로 인정되리라고 믿었음을 암시해준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그렇거니와(10절 주석 참조), 거짓 사도들에게 그들 스스로 합리화시킬 기회를 주지않기 위해서도 고린도 교인들의 재정 지원을 사양할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11:20)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In fact, you even put up with anyone who enslaves you or exploits you or takes advantage of you or pushes himself forward or slaps you in the face.
종을 삼거나 - 복음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자유를 빼앗아 율법의 종
노릇하게 만드는 것 (갈5: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잡아 먹거나 exploits-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스디에이'(*)는 '삼키다' 란 의미가 있는데 (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
이는 마치 기생(寄生)하는 동물처럼 자기는 노력하지 않고 남의 피와 땀의 결과를 착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사로잡거나 takes advantage of - 이 말은 미끼를 던져 속이고 이용하는 행위
자고하다 하거나 pushes himself forward - for the purpose of lording it over the members of the church (1:24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Not that we lord it over your faith,)
이 말은 거짓 사도들이 교인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자신들을 높이고 고린도 교인들을 무시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빰을 칠지라도 slaps - 그들을 복종케 하기 위해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여 협박하였다
(11:21)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To my shame I admit that we were too weak for that! ...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하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스스로의 권위를 주장하며 비록 허위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자신감 넘치는 행위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약한 자였다. 그는 이 약함을 스스로 시인한다.
(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Are they servants of Christ? (I am out of my mind to talk like this.) (NIV)
이 말을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군이라고? 나 참 돌겠네 ..”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11:25) 세번 태장으로 맞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 죄수에게 매를 때리되 사십대에 한해서 때리게 하는 형벌은 신 25:1-3에 의거한 유대인들의 태형집행 관습이었다. 그런데 서른 아홉 대를 때린것은 때린 횟수를 잘못 계산하여 사십을 넘기게 되는 잘못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태장 - 태장(笞杖)이란 로마시민에게는 금지된 로마식 태형으로 채찍 끝에 납을 매달아 치는 무서운 형벌이며 이 태장을 맞는 중에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행16:22, 37).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벌을 받았다는 것은 선교적 목적을 위해 로마 시민의 권리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로마 관리들이 죄수된 자의 신분을 먼저 물어보는 법 절차를 무시했기 때문일 것이다(행 16:37, 38).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If I must boast, I will boast of the things that show my weakness.
바울이 말하는 약함이란 육체의 풍모나 신체적인 면에 있어서의 허약함, 세상적인 것을 가지지 못한 약함,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난의 여정을 걸어야했던 것 등이라고 본다(11:23-27;사 53:4).
그리고 이러한 연약함이 그에게 자랑거리라는 말은 매우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그의 약함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 은총의 넘쳐나는 힘(superabundant strength of God's grace)을 경험하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그의 모든 자랑은, 거짓 사도들과는 달리, 자신이 이룬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룬 것에 있는 것이다.
(11:32-33)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방백 - 이는 지방의 '행정 장관'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부분은 행 9:23-25에 나오는 사건을 말하는데 본 구절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세례를 받은 후 예수 추종자를 잡으러 온 그가 유대의 각 회당에서 예수를 증거하여 그들을 굴복시키니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기 위하여 즉 단순히 체포하기 위해서(잡으려고)가 아니라 잡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으나 제자들의 도움으로 밤에 광주리를 타고 도망갔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바울로서는 그 사건이 그다지 명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 체험을 고백하는 것은 이미 바울 자신이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광주리를 타고 들창 밖으로 몰래 도망해야 하는 것은 바울의 약함과 비천함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랑했다.
(12: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한 사람을 아노니 - 바울은 오래 전에 경험한 신비 체험을 말하는 방식이 있어 자기 자신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라는 간접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1) '나'라는 말대신 '그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랍비적 표현법이 영향이었거나
(2) 바울의 그 경험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 사년 전 - 바울은 매우 오래 전의 경험을 되살리면서 특히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함 으로써 증언의 신빙성(信憑性)을 강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시기 및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 이 경험이 다메섹에서의 경험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부정적이다.
(2) 이 경험이 본서가 집필되기 14년 전이라면 A.D. 43년 경이었을 것이고 수리아의 길리기아에서 보냈던 '침울의 세월'(약 A.D. 35-43년)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일리가 있다(Harris).
(3) 혹자는 행 22:17에서 언급된 바대로 성전에서 본 환상을 가리킨다고 추정한다(Hughes).
행 22:17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세째 하늘 - 본문에 대해서는, 그 개념상의 특이성 때문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1) 먼저 '세째 하늘'이 유대인들의 하늘 개념에서 온 것이라는 견해(Salmond). 즉 유대인들은 하늘이 일곱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12족장의 유언) 그 중 세번째 하늘은 의롭게 죽은 자들이 머무는 처소라고 한다(에녹서8:1-13;42:3).
그렇다면 바울은 바로 이 죽은 의인들의 처소에 다녀온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주장에 동의하는 학자들은 별로 없다.
(2) 본문의 표현이 신자들이 마지막 날에 들어갈 하늘 혹은 천국의 선취(先取)를 의미한다고 본다(Barrett).
(3) 본문을 공간적인 개념으로 보지 말고 바울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래서 사람의 언어로는 정확히 묘사할 수 없는 곳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이해하는 견해.
그러나 이 견해가 맞다면 바울이 어떻게 ‘세째’라는 숫자까지 동원한 단계적 개념의 하늘을 묘사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4) 그래서 'The NIV Study Bible'의 주석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세째 하늘'은 첫째 지구대기권을 나타내는 immediate heaven을 넘어, 둘째 그 위에 있는 outer space를 넘어, 하나님 자신이 존재하는 하늘로 올라갔다.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구절로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늘’을 모두 복수의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여기서 ‘승천하신’ 이란 말은 영어성경에는 'gone through the heavens '로 표현, 즉 ‘복수의 하늘을 지나가다’
(엡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He who descended is the very one who ascended higher than all the heavens, in order to fill the whole universe.
(히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Such a high priest meets our need--one who is holy, blameless, pure, set apart from sinners, exalted above the heavens.
이끌려 간 자라 - '이끌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르파겐타'(*)는 수동태 분사형으로 자의나 자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붙잡힌 바 되었음을 뜻한다. 즉 성령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몸 안에...아시느니라 - 본 구절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여 자아가 몸과 분리될 수 있음을 바울이 생각했다고 논리를 전개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다만 그 환상의 경험이 인간의 오성(悟性)과 관념의 범주로는 포착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아시느니라'는 진술에서 바울은 계시나 환상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임을 암시적으로 가르친다. 따라서 만약 적대자들이 그들의 환상 경험을 자랑하되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낙원으로 - '낙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데이손'(*)은 페르시아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동산'을 뜻했는데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를 차용했다(Bruce).
(1) 구약성경에서 '낙원'은 아담과 하와가 거주했던 에덴 동산(창 2:8;사 51:8) 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겔 28:13;31:8).
(2)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한 곳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3) 또는 세상에서 신앙으로 이기는 자가 얻을 영생의 장소로 묘사되어 있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따라서 '낙원'은 구원받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는 너무도 신비로운 것이어서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들은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되는 신적 비밀이기 때문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구약에서 보여지는 봉인(封印)된 계시에 관한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사 8:16;단 12:4).
(단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이런 사람을...자랑하겠으나 -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의 당사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은폐(隱蔽)시키고 있다. 바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오해하는 것을 방지하고 또 그런 자랑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얻으려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취할 영광은 그 환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곧이어 언급한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약한 것들 - 바울는 은 매우 현명하게 자신의 논리를 진전시켜 이제 정말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시실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려는 것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신비 체험을 말하는 것은 다만 적대자들이 그들의 사도직의 증거로서 황홀경 체험을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사도직의 증거라면 바울 자신도 얼마든지 말할 것이 있다는 의미로 환상 체험을 진술했을 뿐이다. 바울이 결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도로서의 자랑이 오직 자신의 약함이 있다는 것을 적대자들이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周知) 시키는 것이다.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체에 가시 - 이것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가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콜롸스'(*)는 '가시'라는 말 외에 '파편', '말뚝'등의 의미를 갖는다.
바울이 이 가시를 육체에 지닌다고 할 때
(1) 이것을 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적대자로 보거나 거듭나지 않은 영혼의 한 부분 때문에 생기는 육적인 유혹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Calvin).
(2) 그러나 이는 지속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간질, 두통, 그리고 안질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안질이나 간질일 가늠성이 높다고 본다.
안질일 가능성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강렬한 빛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갈 4:13-15)
간질일 가능성은 바울 자신이 '가시'를 가리켜 사단의 사자로 재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마 17:14-18;행 9:9;갈 4:14).
(3) 이 밖에 참고로 바울이 '복음을 위한 유대인 동료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Menoud)와
(4) '언어의 장애'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근거로 바울이 편지로는 유창하지만 첫 인상이 나쁘고(갈 4:13) 외모나
언변이 보잘것없다는 것을(10:1, 9-11;11:6)언급한다.
(5) 이 밖에도 여러 가지로 견해들이 많으나 모든 것이 추측에 의한 진술들이다.
사단의 사자 - 이렇게까지 표현한 데에는 바울이 그 '가시'로 인하여
당한 고통이 대단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가시가 그의 삶에 여러 모로 방해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는 사단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어서 성도의 보존을 위해 사용됨이 나타난다.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세 번 - '세 번'이라는 숫자는
(1) 일정하게 여러 번 반복하여 드리는 기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2) 예수님의 경우에서와 같이 문자적 의미의 세 번을 뜻할 수 있다
(막 14:41).
세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고통스러운 질고(疾苦)를 벗고 싶어서 매우 진지하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주께' 기도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헬라어 '호 퀴리오스'(*)를,
하나님을 지칭할 때 관사없이 단순히 '퀴리오스'(*)를 사용했는데
본 구절에서는 전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기도한 것은 질고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에게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infirmities)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구체적으로 자신의 질병을 거론하여 기도했음을 암시한다.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But he said to me,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이 말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이 더 많은 복 받기를 원할 때 “네가 이미 받은 은혜만 해도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라!“고 권면할 때 주로 인용되는 말로 기억되는데 뒤에 따라 나오는 구절과 전체 문맥을 보면
‘인간의 나약함(weakness)은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는데(display) 이상적인 기회(ideal opportunity)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그런 고통스러운 나약함이나 질병, 불행들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머물게 - 여기서 '머물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케
노세'(*)의 의미는 '장막에 확고히 머무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바울의 약한 부분들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은 확고하고 변함없이 머무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즐거이 약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고 자기의 약함을 도리어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약함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기들의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강함을 과시하는 적대자들은 결국 주님의 능력이 자기들에게 나타나지 않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된다.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강해지려고 했고 그로인해 그리스도는 감추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가 영광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영광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인되신 그리스도가 영광 받도록 철저하게 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 삶의 결과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약하고 비천(卑賤)하게 보였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충만해졌던 것이다.
(12: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The things that mark an apostle--signs, wonders and miracles--were done among you with great perseverance
사도의 표 (things that mark an apostle) - signs, wonders and miracles (표적과 기사와 능력)
이는 사람이나 어떤 인간의 권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사도로서의 자격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초자연적인 능력과 행위가 포함된다. 거짓 사도들은 이러한 사도로서의 징표(these apostolic signs)도 없이 암암리에 그들에게 스며들어 왔던 것이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 - 이것들은 각각 다른 유형의 능력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된 능력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즉 '표적'은 복음을 확증하는 능력이며, '기사'는 하나님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도록 하는 능력이고, '능력'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힘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예수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사역을 특징적으로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행 2:22,43). 이는 바울의 사도직을 더욱 확증해준다.
(12:13)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 바울은 사도에게 요구되는 모든 자격을 구비했으나(1-4절, 12절) 복음 전도자에게 부여되는 재정 지원에 대한 권리는 행사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문제가 되었다. 아마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긴 오해였을 것이다.
하나는 바울이 재정적 권리를 요구하지 않은 것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혹시 정당한 사도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갖도록 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다른 교회에서는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고린도 교회에서만은 받지 않음으로써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이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 미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으리라는 추측이다. 바울은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고 재정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었다. 이에 그는 부드러운 풍자로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려 하였고 이는 그의 독특한 표현법이다(11:5-12;고전 9:1-18).
(12:14)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Now I am ready to visit you for the third time,)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우선 (고후 2:1)을 참고 해 보면
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
So I made up my mind that I would not make another painful visit to you.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따나온 후 언젠가 다시 한 번 비통한 심정으로 고린도교회를 찾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린도서 개관 참고)
그리고 여기서 세 번째라는 표현은 고린도에 처음 전도여행을 간 것을 포함하여 이제 총 세 번째 그들에게 나아간다는 의미가 된다.
어린 아이가 - 바울은 이런 표현을 종종 쓰는데 이는 자신이 ‘영적인 아버지’임을 나타낸다.
(12: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바울이 교회에 재정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사례를 받지 자 그의 적대자들이 퍼뜨린 또 하나의 소문은 바울이 사례비를 받지 않은 대신 예루살렘에 있는 극빈자들을 핑계로 헌금을 모금하여 자신이 착복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그 일을 맏겼던 자의 이름 즉 디도의 이름을 들어 그가 결백하다면 자신도 결백하다는 논리를 다음 절에서 전개한다.
(12: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나의 원하는 것...너희의 원치 않는 것 - 만약 바울이 사전에 고린도 교인들의 오해와 잘못된 가르침과 소문에 의해 오도된 상태를 바로잡지 않고 그들을 대면한다면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은 피차 기대에 어긋난 상태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은 결국 서로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 바울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자기의 개인적인 오해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가르침에서 떠나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고, 고린도 교인들이 염려하는 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징계의 채찍을 휘두르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어지러운 것 - 공동 번역에는 '난동을 부리는' 것이라고 번역 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모임에서 조차 보기 힘든 폭력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이는 아마 자기가 속한 분파가 그 교회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13: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터이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두 세 증인 - 이 표현은 특별히 어떤 인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율법이 정한 바 범죄자에 대한 재판 시 두 세 증인의 증거가 필요한 것처럼(신 19:15), 바울이 전통적인 율법에 따라 합법적이고 공정한 재판을 엄격하게 시행하겼다는 의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13;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I already gave you a warning when I was with you the second time. I now repeat it while absent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하나님의 능력으로 -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음으로 그의 약한 인성을 보이셨다. 그러나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고 부활하심으로 강한 신성을 보이셨다.
바울은 이와 같은 원리를 이제 고린도 교회에 적용할 것을 경고한다.
지금까지는 악한 무리들에게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교회 내의 범법자들을 응징할 것이다.
(13:5)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여기서 바울은 교인들에게 사도를 시험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신자로서의 확증을 찾으려는 노력을 보일 것을 요구한다.
(13:8)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여기서 '진리'(*알레데이아)는 일반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복음'을 뜻한다고 본다(Harris). 그리고 불트만(Bultmann)의 해석대로 '다른 복음'에 반대되는 참된 교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도 타당성이 있다.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찌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기뻐하라 -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감사하며 생활하라
온전케 되며 - 고린도 교인들은 정말 온전케 되어야 한다. 환자의 몸이 건강하게 회복되듯이 그들은 무질서와 방탕함에서 벗어나서 다시금 영성(靈性)을 회복하여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위로 받으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이스데'(*)는 '격려하다', '위로하다', '탄원하다', '권면하다' 등의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공동번역은 '내 권고를 귀담아 들으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가능한 해석이다.
한편 좀 다른 차원에서 이 말은 '서로 서로 격려하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다툼'과 '분냄', '당짓는 것', '중상'등과 같은 요소들을 모두 갖춘 그들로서는 사랑을 회복하여 더욱 '서로 격려함'의 미덕이 필요한 것이다(12:20).
마음을 같이 하여 - 이는 '동일한 생각과 사상을 지니라'는 의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의 복음', '하나의 그리스도', '하나의 하나님'이 라는 사상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 있음으로써 거짓 사도들의 미혹에 속지 않으며 분열하지 않을 것이다.
입맞춤(Kiss) : 서양의 악수에 해당하는, 중동지방에서는 아직도 널리 행해지는, 상호 신뢰와 애정의 표시로서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입맞춤을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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