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 2장 구문해석>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사도 된 바울 - 바울은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모든 서신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밝힘으로써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에 의해 택함받은 열 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막 3:14-19), 그가 개심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특별한 계시에 근거하여(행 9:15) 열 두 졔자들과 동등한 사도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본 서신에서 서두에 자신의 사도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그의 사도권에 대해 도전해 오는 것에 대응하여 자신의 사도됨의 정당성(正當性)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디모데 -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소스데네를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고전 1:1)
과 달리 디모데를 본 서신의 공동 발신인으로 언급한 것은 디모데가 본서신의 공동 저
자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디모데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함
이다.
* 디모데
①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남
② 주변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모범적인 젊은이 (행16:1, 2),
③ 바울에게는 아들이라고 불릴만큼 각별한 사랑을 받음 (딤전1:2;딤후1:2),
④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 후서, 빌레몬서의 서두에 언급될 만큼 바울의
절친한 동역자이기도 함 (행16:1-3;빌 2:19-22).
⑤ 나이가 젊고 담대하지 못함 (딤전 4:12; 딤후 1:7;2:1)
⑥ 고린도에서 그의 사역은 미미한 성과밖에 거두지 못였거나 거의 실패하였음
(고전 4:17;16:10, 11).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1) 여기서 '하나님의'라는 소유격은 교회의 소유자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는 고린도 교회에 침입해 들어와 바울의 권위를 깍아 내리고 추천 장을 내세워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하며 자기들만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주장하여 고린도 교회에 문란을 일으켰던 적대자들과(3:1;4:2;10:7) 그에 동조했던 사람들에게 교회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하고자 하였다.
2) 또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함은 본 서신의 수신자가 ’고린도교회 교인들‘ 즉 한 교회의 교인뿐만 아니라 고린도 지역과 그 주변에 있는 교인들이 모두 해당함을 암시한다. 즉 이 표현은 여러 수신처를 포괄(包括)하는 대표적인 언급이라 하겠고 이러한 견해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첫번째 서신(고린도 전서)의 초두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문구에 이어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 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 1:2)라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지지될 수 있다(Tasker).
아가야 - 로마가 헬라를 지배할 당시 로마는 헬라 전체를 마게도냐(Macedonia)와 아가야(Achaia) 두 지역으로 구분하여 통치하였다. 에피루스(Eqirus), 데살리
(Thessaly), 갈시디스(Chalcidice)를 포함하는 중북부 지역이 마게도냐에 속하고 아덴 (Athens)과 펠로폰네수스(Peloponnesus)를 포함하는 남부 지역은 아가야에 포함되었고 아가야의 행정 수도는 고린도(Corinth)였다. 바울이 본 서신을 보내면서 고린도뿐만 아니라 고린도를 포괄하는 아가야 전지역의 성도들이 읽기를 희망했던 것은 아덴에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는 행 17:34의 기록과 겐그레아에 한 교회가 있었다는 롬 16:1의 기록과 부합되는 것이니, 아덴과 겐그레아는 모두 아가야 지역 내에 위치한 곳이었다.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아시아'는 지금은 터키 영토이고 당시에는 로마영인 소아시아의(Asia minor) 서쪽에 있는 지방의 이름으로서 그가 환난을 당한 정확한 장소 및 환난의 종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We were under great pressure, far beyond our ability to endure, so that we despaired even of life. Indeed, in our hearts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 바울이 받은 환란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큰 것이어서 그것으로부터 헤어나고(survival) 회복돤 것(reovery)을 사망으로부터 되살아 난 것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Then many will give thanks on our behalf for the gracious favor granted us in answer to the prayers of many
이부분은 ‘많은 사람’ 및 ‘우리를 위하여’라고 우리말로 번역된 부분 때문에 해석이 이상하게 되는데 'on our behalf'를 빼든지 ‘우리를 대신하여’로 바꾸고 ‘많은 사람’의 주체를 밝혀 다음과 같이 번역하면 이해가 쉽겠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너희들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인하여 너희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커다란 힘을 갖는 중보기도를 부탁함에 있어 자신이 사도로서 일방적으로 사역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도움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밝힘으로써 그들이 바울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동시에 서로 협력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일치를 이루자고 권고하고 있다.
또한 많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 바울에게 은혜가 내린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1:13)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For we do not write you anything you cannot read or understand.
본문은 고린도교인들 중에 바울의 서신이 진실하지 못하고 모종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는 적대자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그것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서신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의미외에는 다른 의도가 전혀 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1:14)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as you have understood us in part
본절은 다소 완곡어법적(婉曲語法的)인 표현으로 되어 있다.
즉 그들은 바울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 온전히 알지 못했다는 의미로서 이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목회가 다소 어려움이 있음을 엿보게 한다. 즉 지금은 완전한 상호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래에의 기대를 바울이 본절을 통해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1: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바울은 마게도냐를 다녀가는 길과 오는 길에 두 번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그들과 은
혜와 기쁨을 나누고자 했다.
(1:17)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앞절에 언급된 바울의 여행 계획이 변경된 것에 대해 고린도교회의 바울 적대자들은 그것을 바울을 비난하는 빌미로 삼았다. 아마 그들은 바울이 진실되지 못하고 경솔하며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사람들을 선동했을 것이다(12절).
바울은 그의 적대자들이 자기에 대하여 그와 같이 비난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는 대적들의 비난과 중상(中傷) 가운데서 바울이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경홀히'(*엘라프리아)란 말과 두 번 거듭 언급된 '예'(*나이),'아니'(*우)라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한편 적대자들의 비난에 대한 바울의 반박은 반어법적인 수사법으로 되어 있다. 바울의 어조를 살려 본문을 재해석하면,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경솔한 일이었습니까? 또는 인간적인 동기로 계획을 세워 편리할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려는 줄 압니까?"(공동번역)가 된다. 바울은 '육체'(*사륵스), 곧 자기 이익을 따라 임의로 계획을 변경하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고 성도들의 유익을 구하였다(2:1-3;행 16:6;고전 16:7).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so that in the same breath I say, "Yes, yes" and "No, no"?
(표준새번역)
내가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기를, '아니오, 아니오' 하려는 속셈이면서도, '예, 예' 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겠습니까?
(1: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 실루아노 - 이는 '실라'의 로마식 이름으로서(살전 1:1).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자 중 한 사람이었고(행 15:22), 바울의 동역자이자 친구였다(행 15:36-41). 바울, 실루아노, 디모데가 고린도에 복음을 증거한 것은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기간이었는데 먼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고(행 18:1-4),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나중에 합세하였다(행 18:5). 이들 세 사람은 고린도에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교회를 세우고 세례를 베풀었다(행 18:7-11).
그리스도는 ...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는 한 입으로 두말 하는 사람이 아니고 한 번 하면 한다는 분이다’라는 뜻이다.
(2:5)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찌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If anyone has caused grief, he has not so much grieved me as he has grieved all of you, to some extent--not to put it too severely.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 본절에서 거론되는 핵심적인 논리의 주제는 '바울을 대적하여 문제를 일으킨 자가 누구였으며 그가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이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바울의 서신들에서 찾아낼 만한 근거 자료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먼저 5-7절과 7:12에 근거할 때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한 사람이었다(anyone)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사람이 고린도 교인 중 한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외부에서 고린도로 여행 온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다음은 이 문제의 인물이 행한 일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최근 학자들은 이 적대자의 행위가 바울의 두번째 고린도 여행 즉 가슴 아픈 방문과 관련하여 바울을 모욕하고 바울의 권위를 무시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Barrett, Lowery, Harris). 그런데 이 행위가 바울 개인에 대한 도전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에 대한 문제 행위로 여겨지는 것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사이의 특수한 관계 때문 일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전적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에 근거해 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 사역과 그의 인격과 사도적 권위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도전은 그의 인격과 사도권에 대한 도전이며 교회 전체에 대한 적대 행위였던 것이다.
어느 정도 너희 무리 - '어느 정도'라는 표현은 대적자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상당히 완화되었음을 반영한다. 바울은 대적자의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서 가능한 한 자극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리하고자 했을 것이다. '너희 무리'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스 휘마스'(*)는 문자적으로 '너희 모든 무리'라는 뜻이다(all of you, NIV). 이것은 바울을 대적했던 자가 고린도인이 아닌 외부에서 유입(流入)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2:8)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I urge you, therefore, to reaffirm your love for him.
(2:11)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바울은 회개하고 있는 적대자를 용서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용서하지 않는 것이 곧 사단에게 속는 것이므로 속지 않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단의 목적은 기독교 신자를 유혹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는 것이다.
(2:12-13)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 바울은 가슴 아픈 고린도 방문 이후 에베소에 되돌아와 '눈물의 편지'를 디도에게 주어 고린도를 방문하게 하였다.
바울은 디도를 보내면서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듯하며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마게도냐에서 만나기로 한 듯하다(13절). 바울이 드로아를 방문한 것은 이 약속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나 에베소에서 데메드리오가 주동이 되어 발생한 은장색(은세공인)들의 소동 때문에 다소 약속보다 일찍 왔을 것으로 보인다(행 19:23-41).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바울의 드로아 방문의 목적은 디도와의 만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 했다. 바울은 가슴 아픈 고린도 방문 후 심적으로 고통을 당하고있었으며 디도를 통해 '눈물의 편지'를 보내 그 결과가 상당히 궁금하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물론 디도를 만나지 못한 불안 때문에 끝내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떠났지만, 복음 전하는 일을 최우선적 과제로 여기는 바울의 사도적 소명은 대단히 강한 것이었다.
(2:13)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 아마 드로아에서 몇일 동안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약속된 기일이 되도록 디도가 도착하지 않자 바울의 심령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복음을 전할수 있는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떠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토록 바울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다음의 두가지 일 것이다.
1) 첫째 고린도 교회에 대한 불안
바울의 고린도 방문은 그에게 슬픔만을 안겨 주었고 그리하여 두 번째 방문을 취소하고 대신 디도편에 '눈물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의 결과에 대한 불안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직접 방문을 피하고 편지로 대신하였는데(1-3절) 그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거나 지난번 방문 때 있었던 가슴아픈 일들이 치유되지 않고 도리어 더욱 악화된다면 그것은 피차간에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2) 둘째 디도의 신변에 대한 염려
디도는 눈물의 편지를 전하는 일 외에도 당시 기근으로 빈핍(貧乏)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금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강도들의 위협에 처할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일로 인해 바울은 더 이상 드로아에 머무를 수 없어 마게도냐로 떠나간 것이다.
==> 7장 5절에서 story는 다시 이어진다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But thanks be to God, who always leads us in triumphal procession in Christ and through us spreads everywhere the fragrance of the knowledge of him.
이기게 하시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드리암뷰오'(*)는 로마의 황제나 장군들이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결박하여 끌고 오면서 군중들에게 구경시키는 개선행진을 가르킨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언제나 끼워 주시는'(공동번역)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을 승승 장구하는 장군의 영광에 참여하는 병사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 여기서 '냄새'는 로마 황제가 개선할 때 길가에 향을 피워 냄새를 내는 것이나 쥬피터카피톨리누스(Jupiter Capitolinus) 신전까지 개선행진을 하여 희생 제물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관례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전하는 것을 향기에 비유하고 있다. 자기가 복음을 증거하였으나 사실상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바울 자신은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도구로 삼아 그리스도의 지식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2:15) 그리스도의 향기 - `향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오디아'(*)는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창 8:21; 출 29:18; 레1:9; 민15:3).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삶은 그가 롬 12:1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희생 제사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자 예수의 삶을 연장하여 사는 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과 핍박을 당하였고 죽음을 무릅써야 했다(행21:13;23:12-15; 골1:24).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전해진 바울의 복음 전파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부분적으로는 거부되었다(행 17:32). 이러한 받아들임과 거부의 차이는 종말론적 차이로 나아간다. 받아들이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나 거부하는 자들은 망하게 된다.
(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바울에 의해 선포된 하나의 설교가 두 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의 향기인 바울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악취가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된다. 예수의 죽음이 평범한 한 인간의 죽음이며 그것으로 끝난 것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그들의 생각에 따라 죽음을 맞게 될 것이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그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자기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롬 8:34).
하나의 실재가 선과 악, 생명과 죽음과 같이 두가지 효력(效力)을 발생하는 것에 대한 개념은 유대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개념이었다. 그 한가지 예로 '토라'를 들 수 있는데 혹자는 소개하기를 "꿀벌이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는 꿀을 간직하고 다른 자들을 위해서는 독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토라의 말들은 이스라엘에게는 생명의 약이고 세상 민족들에게는 죽게 하는 독약이다"라고 하였다(Manson).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이것은 바울이 적대자를 염두에 두고하는 말이다. 그들
은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자신만만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름
하는 중대한 사역을 인간적인 자격이나 능력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
모한
일이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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