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석의 얼굴특강

사얼메(033) 제2장 눈이 둘인 이유 5 - 관조의 눈, 욕망의 눈

白鏡 2018. 3. 6. 07:08

사람의 얼굴이 전하는 메시지

서문(序文)

1 사람 얼굴, 모양으로 만들었나?

2 눈이 둘인 이유

1. 많이 보고 많이 배우라

2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하라

3. 때로는 한 쪽 눈을 감아라

4. 위를 보는 눈, 아래를 보는 눈

5. 관조(觀照)의 눈, 욕망(慾望)의 눈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 중 지금껏 가장 많이 사람 입에 오르내린 건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선악과(善惡果) 이야기일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후 사람을 위하여 에덴동산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두었는데

동산 내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으되

중앙에 있는 나무 열매는 먹지 못하게 금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 제일 간교한 뱀이

이브에게 나타나 참으로 교묘하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

 

이에 이브가 답하길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3:2,3)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4-5)

 

이브는 하나님이 금단의 열매로 지정한 나무라

평소에는 아예 쳐다 볼 생각도 안 하다가

뱀의 말을 듣고서는 마음이 동하여 그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6)

 

이 사건 이후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고

이브는 출산의 고통을 크게 더하고, 수고와 함께 자식을 낳고,

아담의 지배를 받게 되며( 3:16)

 

아담은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평생 얼굴에 땀 흘리며 뼈 빠지게 수고해야 입에 풀칠하고 살아가게 되는

형벌을 받게 된다.(3:17-19)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까지 대물림 되어

모든 인생살이가 이다지도 고달프게 되었으니 참으로 열 받을 만도 하다!

 

도대체 어쩌다가, 얼마나 어리석었기에

이브 할머니는 그딴 뱀의 꾐에 넘어갔단 말인가?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브가 선악과를 보고 느낀 감정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자가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그녀의 처음 느낌은 '먹음직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보암직'도 해졌고, 나중에는 '탐스럽게'까지 보였다.

 

이러한 느낌을 신약성경 '요한서'의 기자(記者)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풀이한다(요일:2-16)

 

육신의 정욕(情欲)이란

먹고, 마시고, 자고, 섹스하고, 쉬고 싶은,

육신이 원하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의미하고

 

안목의 정욕이란

화려하고 멋지고 예쁘고 매력적인 외적인 것들에 빠져들고

자신 또한 그렇게 보이고자 외모치장에 온갖 정성을 다 쏟는

허영심을 말하고


이생의 자랑이란

. 명예, 권력, 재능, 학벌, 지식 등을 탐하는 소유욕과

그것으로 남에게 으스대고 싶은 과시욕을 말한다.

 

이브는 이 세가지 정욕을 동시에 다 느꼈다.

하지만 이런 욕구를 느꼈더라도 한가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그 열매를 보고서

보암직하고 탐스럽다는 생각에서 끝냈더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을

'먹음직스럽다'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결국 사물을 관조(觀照)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욕망(欲望)의 눈으로 바라보는 바람에

이렇게 후손들에게까지 민폐를 끼치게 된 것이다.

 

남녀관계의 문제도 마찬 가지다.

넘어서는 안될 사이의 남녀가 그 선을 넘는 바람에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경우를 종종 본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불가촉(不可觸)의 멋진 이성을 보고서

'보암직 하다'로 끝내야 할 것을 '먹음 직 하다'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상대를 관조의 시선으로 보지 못하고 욕망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

사단(事端)의 원인이다.

 

그러면 육체적 욕망은 품어서는 안 될 나쁜 것인가?

아니다.

욕망은 모든 생명체의 가장 강력한 생명력(生命力)이다.

이것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며칠을 굶어 위와 장이 다 비었는데도 먹고 싶다는 욕망이 없다면

물 구경한지가 며칠이나 되었는데도 갈증을 느끼지 않는다면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았는데도 자고 싶어 죽겠다는 욕망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이성(異性)을 보고서 욕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개체를 보전(保全)해 갈 수 있을까?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없어

자다 일어나서 그 차림 그 머리 그대로 기신기신 밖으로 나 다니고

있는 모습 그대로 보인답시고 속에 든 말 있는 대로 다 까발리고 다니면

과연 사회가 보기 좋고 아름답게 돌아갈까?

 

집안에 양식이 다 떨어졌는데도 가장이 돈 보기를 돌 보듯 하며

집안에서 빈둥거리고 있으면 식구들 입에 밥은 누가 넣어주나?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에게 본능(本能)이라는 형태로 욕망을 부여하셨다.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부디 살아남으라고.

그리고 자신을,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즐기며 온 땅에 번성하라고.

 

그런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문제는 본능을 넘어서는 욕심(慾心)에 있다.

 

동식물은 본능만 충족시키고 나면 멈출 줄을 안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서 멈출 줄을 모르고

채워도 재워도 끝이 없고 채우면 채울수록 커지기만 하는

욕심(慾心)이라는 단계로 발을 내딛는다.

 

인체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영양소도 과다하게 섭취하면 독이 되듯이

필요를 넘어서는 욕망, 남의 것까지 탐내는 과도한 욕심은

인간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그러한 욕심은 욕망의 눈을 크게 뜨기 시작하면서 싹이 트고

그 싹은 고통과 고뇌와 슬픔과 분노의 열매를 충실히 맺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 대한 안전장치로 눈을 하나 더 주셨다.


눈을 하나만 주면 세상을 온통 욕망의 시선으로만 바라볼까 봐

관조(觀照)의 눈()을 하나 더하셨다.


지혜의 눈으로 삼라만상의 참모습을 바로 보고 즐기며

존중하며 받아들이라고.

 

그런데도 인간은 욕망(欲望)의 눈만 너무 크게 떠 왔다.

 

그 결과 인간의 능력은 신의 자리까지 넘볼 만큼 커졌는데

행복의 분량은 갈수록 줄어들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파멸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지칠 줄 모르고 달린다.

 

이제 우리 관조(觀照)의 눈을 뜨는 연습을 하자.

 

매일 아침 명상(冥想)과 기도로 새벽을 열어보자.

욕망으로 뜨거웠던 눈의 열기가 식으면서

차분하고 평온한 마음 한가운데에서 관조의 눈이 서서히 열릴 것이다.

 

감겼던 관조의 눈이 뜨일수록

왕방울만큼 커졌던 욕망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올수록

그동안 과도한 욕망과 욕심으로 쌓였던

체지방(體脂肪) 같은 너저분한 찌꺼기가 빠지면서

자신과 세상이 점점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