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석의 얼굴특강

사얼메(032) 제2장 눈이 둘인 이유 4 - 위를 보는 눈, 아래를 보는 눈

白鏡 2018. 3. 3. 07:41

사람의 얼굴이 전하는 메시지

서문(序文)

1 사람 얼굴, 모양으로 만들었나?

2 눈이 둘인 이유

1. 많이 보고 많이 배우라

2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하라

3. 때로는 한 쪽 눈을 감아라

4. 위를 보는 눈, 아래를 보는 눈

 

사람에게는 두 개의 눈이 주어졌다.

그 결과 한 쪽 눈의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다른 한 쪽 눈의 시력이 형편없으면 잘 볼 수 없다.

 

또한 두 눈이 합력(合力)하여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두 눈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눈이 하나인 것만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눈을 두 개씩이나 주었을까?

 

세상을 바라볼 때 한 곳만 보지 말고

그 반대편도 보라고, 그 너머도 보라고, 그 안()도 보라고 그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눈앞의 일에 급급하여 한 쪽 눈만 뜬 채 한 곳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일에

너무 익숙하진 않았는지?

이제 우리 그 동안 거의 감다시피 해온 또 하나의 눈을 뜨는 연습을 해 보자.

 

여기 잔이 하나 있고 그 안 에는 물이 채워져 있다.

이 물을 다른 사람의 잔에 따르고 나면 내 잔은 비게 된다.

물로 충만 하던 내 잔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고 텅 빈 공()이 된다.

 

이것이 땅()의 이치(理致).

누군가에게 실()이 있으면 누군가에게는 득()이 된다.

과학적으로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쯤 된다.

 

하지만 하늘()의 이치(理致)는 다르다.

내 잔 속의 물을 나보다 훨씬 더 갈급한 사람에게 부어주고 나면

내 잔은 빈 공()의 상태가 아니라 공기로 가득 찬 충()의 상태가 된다.

눈에 보이는 물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로 찬 텅 빈 충만(充滿)함이다.

 

물은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며칠 못 가서 죽는다.

 

하지만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몇 분을 못 버틴다.

공기는 소중함을 넘어서 절박한 것이다.

 

내 잔을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채우기 위해선 먼저 그 잔을 비워야한다.

이것이 하늘()의 이치다.

 

어떤 일을 하건

먼저 하늘의 뜻을 살핀 후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다.

 

위만 보고 걷는 사람은 바로 눈앞의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고

땅만 보고 걷는 사람은 머지않아 다가 올 낭떠러지를 예측하지 못 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다.

비록 생채기가 생겼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낫게 되고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면역력은 증가되고 지혜는 늘어난다.

 

하지만 이 길이 전부인 양, 이 길이 영원할 것인 양 땅만 보고 걷다가

갑자기 눈앞에 천 길 낭떠러지가 나타나면 그 얼마나 황당하고 두려울까?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 공포로 다가오는 것은 죽음의 실체가 무언지, 언제 닥칠지, 죽음 다음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으로의 여정이고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 했다.

그렇게 소중한 죽음을 평소 생각지 않으면서 사는 인생은 참으로 어리석다.

죽음을 이해하려면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답이 궁하면

죽음 후에 갈 곳이 어딘지를 생각하면 의외로 쉽게 답을 구할 수 있다.

죽음 후에 어디로 갈지를 알려면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떠나온 본향(本鄕)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돌아갈 본향(本鄕)이 있는 사람,

벗은 발로 뛰어나와 반가이 맞아 줄 부모가 기다리는 본향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이런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때가 되면 돌아갈 날이 기다려진다.

 

그러나 이 본향은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밑으로 땅을 보는 눈만 크게 뜨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위로 하늘을 우러러 보는 눈도 같이 뜨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에피소드(Episode)

때는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조그만 마을에 한 남자아이가 동네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땅에 금 그어놓고 땅따먹기 하고, 딱지치기 하고, 구슬치기 하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저녁이 되니 각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가고

아이 어머니들은 대문 밖에 대고 밥 먹으러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러자 아이들이 놀다 말고 하나 둘씩 집으로 달려갔다.

 

아이 혼자 남았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그는 부르는 사람도 갈 곳도 없었다.

 

땅 한 뼘 더 딸 거라고,

딱지 한 장 구슬 하나 더 모을 거라고

하루 종일 친구들과 옥신각신하며 악착같이 모은

딱지가 한 호주머니 가득, 구슬이 다른 주머니에 가득,

 

땅에는 내 땅이라고 그어놓은 영역이 큼지막한데

갈 곳 없는 자신에게 그딴 것들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렇게 재미나게 놀다말고 엄마가 부르니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지금쯤 따끈따끈한 밥상 앞에서 가족들 오순도순 모여앉아

맛있게 재밌게 밥 먹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지?

위의 이야기는 이십 수년 전에 한 의사의 신앙 간증 테이프에서 들은 스토리다.

 

아버지는 육이오 당시 전사하고

자신은 아버지 얼굴도 못 본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다.

그 어려운 시기에 어머니 혼자 힘으로 자녀까지 양육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어머니는 아침에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하고 오다보니

다들 저녁 먹을 시간에 자신의 집에는 자기를 불러줄 사람도

따끈한 밥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당시 그의 간증을 듣고 진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 날 저녁 그가 처했던 상황, 그리고 그 느낌이 바로

우리네 인생 이야기 같아서……..

 

해는 지는데 돌아갈 집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사람들의 인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