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 우리역사

[스크랩] 시대에 따른 `왜`의 정체

白鏡 2008. 8. 23. 14:17

삼국시대 후기에 백제계로 대변되는 좀더 뚜렷한 흔적 이전에서의 신라초기부터 등장하는 왜라는 세력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큰 테두리에서 좀더 확실한 것은  어떤  특정한 정치 세력의 지속

 

적이고 일정한 흐름이나  열도 섬나라 자체의 세력은 아닐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점입니다.

 

열도 섬나라의 고대 정치적 세력을 알기 전에 섬나라의 고대 도시? 문명적 발전에 대한 이해가 더 해진다면  혼란스러운 문제

 

에 대한 좀 더 크고 분명한 시각을 줄것이라 봅니다.

 

sdfdsfsdd.jpg


<열도 섬나라의 신석기시대인 죠몬시대 곡옥 분포>

 

그림에서 보이듯 신석기 죠몬시대의  인구는 동쪽 열도에 집중되어 있고 서로는 거의 인구가 없었다는 점을 알수 있습니다.

죠몬인들은 야요이시대 이후에도 인구는 거의 변함이 없으며 .
에도시대까지도 수렵사회였을 정도로 문화수준은 상당히 낮았으며
일정한 정착지가 없이 시간이 흐르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형태를 보입니다.

 

이후 청동기시대인 야요이 시대로 대변되는 야요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섬나라의 학자들도 이미 조몬과 야요인의 계승 관계가 없는 외부 세력 즉 한반도의 우리 남부 세력들이 큐슈를 기점으로 이후 동으로 점점 청동기적 영향력이  퍼져 나감을 인정하고 이미 판명난 상황입니다.>

 

식량채집을 기초로 한 전단계의 조몬문화[繩文文化]와는 근본적으로 수준의 차이가 야요이시대와 구분되는것이 특징이며 , 뒤이어지는 고분시대(古墳時代) 이후의 문화나 경제적 구조는 야요이 시대의 특징성에서 아래 그림처럼 큰 변화없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야요이시대 전 ·중기에는 아직도 석기가 대량으로 사용되며 화살등이 유용한 무기입니다. 물론 청동기는 보기(寶器) ·제기(祭器) ·장신구 면에서 현저한 발달을 보이며 철기시대로 나아갑니다.. .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취락 형태>

야요이시대의 환호유적입니다.이러한 형태는 고분시대(3~6세기)에도 그다지 차이가 없이 시대에 따라 좀더 소규모 농촌하 되는 형태를 보입니다.

아스카시대 이전(6세기 후반)까지 가장 큰 취락 유적은 야요이시대의 요시노가리유적으로 인구는 1000명으로 아직까지 이것보다 더 큰 취락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한 때 고분시대 초기(3~4세기)로 추정되는 마키부쿠유적이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실제 100차례가 넘는 발굴한 결과 주거지는 별로 나오지 않았습니다.-지배자의 거주지가 수혈식-



▲ 경남 창녕 비봉리 고분에서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배(木舟)가 출토됐다. 발굴팀은 고고학적 퇴적층위로 미뤄 이 배의 제작 연대를 8천여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는 지금까지 출토된 선사시대의 배로는 최고(最古)연대다. 원 안에 가공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불에 그을린 흔적이 보인다. /연합
 
울산의 암각화등 신석기 당시의 한반도 남부인들은 이미 상당히 바다를 경험하고 또한 남부 취락지에서도 상당히 밀도있는 인구수를 확인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명적 배경들은 이후 큐슈 후쿠오카로 들어가서 야요이 청동기 시대를 열고 이후  가야나 백제등의 더욱 정치화된  세력들은  오카사지역으로 확장된 공간의 더욱 발달한  문명과 정치적 유적,유물들을 남기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조몬과 야요이의시대 구분과 그것이갖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우리가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를 말하는 것은 단순히 발달한 질적 도구의 사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정치화되어 가는 사회 그런 정치적인 사람들로 대변되는  <세계관>에서 큰 차이가 나온다는 점입니다.
 물론 현대에서 문명이나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지만 신석기와 청동기의 차이는 단순한 물질 문명만이 아니라 신석기 인들은 자신이 주거 하는 환경에 순응하며 일부 문명적 생활속에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그런 삶이라면 이후 청동기적 정치화 되는 사회는 특징적 부류나 집단이 땅이나 자원,사람들을 단순히보지 않고 어떤 식의 역학적 관계나 효용성을 가지고 보려 하고 그래서 지배하려는 형태로 나아가면서 신분화의 사회로 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서도 이런  동열도 섬나라와는 달리 서열도 섬나라의 공간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이며 이는 곧 우리민족이 들어가서 이후 고분시대로의 좀더 발달한 정치체와를 이루어 왔다는 점을 알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고대  백제의 멸망후에 섬나라에서 본격적이고 갑자기 등장하는 왕성이라는 개념에서 이전 백제의 아스카 문명. 그리고 앞서의 가야의 정치세력의 영향력 그리고 청동기 시대에 큐슈를 기점으로하여 대마도와 함께 한반도 남부에 미치는 왜라는 집단에 대한 정치 세력은 열도섬나라 자체의 원주민이나 정치세력이 아닌 우리 선조들의 또 다른 명칭으로  이후 더욱 고도화되는 정치세력으로 백제가 한반도에서의 멸망후 열도에서의 본격적 세력화로 등장하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높을 것입니다.- 신라 초기의 등장하는 왜의 배들은 삼국시대의 대규모 함선과는 다른 소형의 규모로 이해해야 할것입니다.
 

** 추가 기록하나

14세기 초에 씌어진 일본 불교 왕조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推古天皇元年正月, 蘇我大臣馬子宿. 依合戰願, 於飛鳥地建法興寺,

立刹柱日 島大臣竝百餘人 皆着百濟服, 觀者悉悅, 以佛舍利, 籠置刹柱礎中.”

588년, 백제 왕실에서 건너온 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文賈古子) 등에 의해 일본 최초의 칠당 가람이 아스카에 착공됐다. 위 대목은, 스이코 여왕이 등극한 직후인 593년 1월에 소가노우마코 대신과 만조백관이 ‘백제옷’을 입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백제에서 보내온 부처님 사리함을 찰주의 기초 속에 안치했다는 내용이다. ‘만조백관이 ‘백제복’을 입었다’는 것은 스이코 여왕의 아스카 왕실이 백제계 왕가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당시에 관한 ‘일본서기’ 기록에서는 ‘백제복을 입었다’는 ‘부상략기’의 대목을 발견할 수 없다.

 

출처 : 韓民族! 옛 제국을 찾아서...
글쓴이 : 대고구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