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사군(漢四郡)과 낙랑군(樂浪郡).
한(漢)나라의 일곱번째 황제인 세종(世宗)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의 왕검성(王儉城)을 함락시킨 후 고조선 지역에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渡郡)을 설치해 다스렸다. 기원전 82년 한나라는 진번군, 임둔군의 절반을 낙랑군과 현도군에 통합시켰다. 이 중 현도군이 고구려 등의 공격으로 소자하(蘇子河) 상류 지역으로 쫓겨감에 따라 옛 고조선 지역에는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군만 남게 되었다. 현도군에 합했던 옛 임둔군의 나머지 현들도 낙랑군에 귀속되는 결과가 되어서 낙랑군은 옛 진번군의 7현과 옛 임둔군의 7현까지 통치하게 된 것이다. 낙랑군은 옛 진번 7현에는 남부도위(南部都尉)를, 옛 임둔 7현에는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해서 이 지역을 통치했다.
서기 8년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은 낙랑군을 낙조군(樂朝郡)이라 개칭했지만 다시 낙랑군으로 환원되었다. 이 무렵 낙랑군에서는 낙랑의 토착민인 왕조(王調)가 반기를 들어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대장군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를 자칭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한 한나라는 영향력을 상실한 남부도위와 동부도위를 폐지하고 그 지역의 거수(渠帥)들을 모두 현후(顯候)로 봉하여 이른바 조공관계를 맺었다.
이는 사실상 해당 지역의 지배권을 포기한 것으로서 낙랑군의 세력은 이 조치로 크게 축소되었다. 이에 따라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는 낙랑의 속현이 18성(城) 호수(戶數) 6만 1천 492호, 인구 25만 7천 50명으로 축소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 두개의 낙랑(樂浪)
그런데 낙랑군의 정확한 실체 파악은 한국 상고사 연구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낙랑군의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자.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영제(靈帝) 때에 공손탁(公孫度)이 세력을 확장해 낙랑군을 장악했는데, 237년 그 손자 공손연(公孫淵)이 연왕(燕王)을 자칭하자, 이듬해 삼국 중 하나였던 위(魏)가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그를 참살하도록 했다. 그 뒤 낙랑군은 위나라를 대신한 서진(西晉)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다시 고구려와 모용씨 선비족(慕容氏鮮卑族) 사이에서 각축전을 벌이다가 314년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의 공략으로 설치된 지 약 420여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낙랑군은 이처럼 420여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존속하면서 우리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지금껏 한국의 역사에는 낙랑(樂浪)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정치세력이 낙랑군(樂浪郡) 외에 또 하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서 많은 오해와 혼선을 낳았다.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樂浪郡) 외에 낙랑국(樂浪國)이라는 정치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낙랑국과 낙랑군의 차이점, 그리고 그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한국 상고사 연구에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한국 상고사의 여러 논란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낙랑군과 낙랑국의 위치 문제다. 두 정치세력의 위치가 파악되면 한국 상고사의 전반적인 위치체계가 재정립될 수도 있다.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의 위치 문제는 비단 두 정치세력의 위치 확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위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평양 근교에서 출토되는 중국식 유물들을 낙랑군(樂浪郡)의 유물로 단정해 비정해 왔던 고조선의 위치 문제는 '낙랑국(樂浪國)'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면 근본적인 수정을 요하게 된다.
낙랑국과 낙랑군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지금껏 의문에 싸여 있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 세가지를 먼저 살펴보자. 신라본기(新羅本記)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30년(기원전 28년) 조의 기사에는 낙랑군(樂浪軍)이 신라를 공격하려고 국경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내용이 있다.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원년(기원전 4년)에는 낙랑군(樂浪軍)이 서라벌(徐羅伐)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지 국왕은 "지금 이웃나라[隣國]가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어 외롭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은가."라고 한탄하는 기록이 있고,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13년(36년)에는 "낙랑(樂浪)이 북쪽 변경을 침략해 타산성(朶山城)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낙랑(樂浪)이 신라를 거듭 공격하는 이 기사에 대해 지금껏 잘못된 기록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이는 현재 우리의 역사 지식에 맞지 않으면 우리의 역사 지식을 다시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후대인의 횡포다. 이를 잘못된 기사로 본 데에는 여기 등장하는 낙랑을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랑에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에도 나온다.
"4월에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지방을 유람하고 있었는데, 마침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그 곳에 출행하여 그를 보고, "그대의 얼굴이 보통 사람이 아닌데, 혹시 북국(北國) 신왕(神王)[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을 말함]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묻고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와 사위로 삼았다."
여기서 최리(崔理)를 낙랑태수(樂浪太守)가 아닌 낙랑왕(樂浪王)이라고 표현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낙랑군(樂浪郡)과는 별도로 낙랑국(樂浪國)이라는 정치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라를 공격한 의문의 낙랑도 낙랑군(樂浪郡)이 아니라 낙랑국(樂浪國)인 것이다. 이 낙랑국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사이의 유명한 로맨스 끝에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서기 32년)에 멸망하고 만다.
한국 고대사에 낙랑(樂浪)이란 이름의 정치세력이 둘이 있었음에 다름 아니다. 하나는 최리(崔理)가 국왕으로 있던 낙랑국(樂浪國)이고, 다른 하나는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樂浪郡)이다. 앞의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원년 조의 기록에서 신라의 '이웃나라[隣國]'는 바로 낙랑국(樂浪國)인 것이다.
●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의 위치
그렇다면 낙랑국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앞의 대무신왕(大武神王) 조의 기록은 고구려를 북국(北國)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낙랑이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앞의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13년조의 기록에서 '낙랑(樂浪)이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는 기록은 낙랑국이 신라의 북쪽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이자 신라의 북쪽에 있던 나라였다.
그럼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의 위치에 대해서 살펴보자.
일제강점기 이래 낙랑군의 위치는 대동강 유역이라고 설명해 왔고 현재가지도 그것이 통설이다. 대동강 유역에서 중국 측 유물이 다수 발굴된 것이 이 지역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실증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다음의 중국 측 사료는 낙랑군이 과연 대동강 유역에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부여 조에는 111년에 "부여왕(夫餘王)이 보기(步騎) 7, 8천명을 거느리고 낙랑(樂浪)을 공격하고 이민(吏民)을 살상한 후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북쪽에 있던 부여가 과연 7, 8천명의 보기(步騎) 병력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무사히 통과해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을 공격한 후 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을까? 게다가 북만주의 부여는 왜 남쪽 멀리 대동강 유역에 있는 낙랑군을 공격해야 했을까? 고구려라는 완충지대를 두고 북만주에 있는 부여와 대동강 유역에 있는 낙랑군이 군사적 충돌을 해야만 할 이해관계가 있으리라고는 추측하기 힘들다. 이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부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럼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중국 유물들은 무엇인가?
광무제가 공격한 낙랑(樂浪)이 정확히 어떤 정치조직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중국계 유물들이 낙랑군(樂浪郡)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증으로 연결 될수는 없다. 낙랑군은 부여와 군사적 이해를 다투던 만주 지역에, 낙랑국(樂浪國)은 대동강 유역에 그 중심지가 있었다.
참고서적
휴머니스트(humanist) 版「살아있는 한국사 -한국 역사 서술의 새로운 혁명」
경세원 版「다시 찾는 우리 역사」
한국 교육진흥 재단(재단법인) 版「반만년 대륙 역사의 영광- 하나되는 한국사」
대산출판사 版「고구려사(高句麗史) 7백년의 수수께끼」
서해문집 版「발해제국사(渤海帝國史)」
충남대학교 출판부 版「한국 근현대사 강의」
해설자
이덕일(李德一)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영우(韓永愚) 한림대학교 인문학부 석좌교수
고준환(高濬煥) 경기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병국(徐炳國) 대진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인철(李仁哲)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위원
박걸순(朴杰純) 충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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