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우리 한민족은 어디에서 온 누구인가?
우리 민족을 한민족이라 한다. '한'을 한자로는 '韓'이라고도 쓰는데 한자의 뜻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더 엄격히 말한다면 우리말이 속하는 알타이어 계통의 말로써 '한'은 '크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국명인 '대한민국(大韓民國)'은 크고 큰 나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또 '한'은 북방민족의 '우두머리', '수장'을 뜻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현대 한국인들은 우리 민족은 반만년을 이어온 단일민족이며, 농경민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장에서 이런 생각들에 반론을 제시하고, 우리 민족이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를 밝혀 보려한다.
1) 우리 민족의 인류학적 분류
오늘날의 세계 인류는 크게 세 종족으로 나뉜다. 백인종을 포함하는 코카소이드(Caucasoid)와 황인종을 총칭하는 몽골로이드(Mongoloid) 및 흑인종을 총칭하는 니그로이드(Negroid)가 그것이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이러한 세 종족으로 분리된 것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단계로서, 지질연대로는 후기갱신세(後期更新世)에 해당된다.
우리 민족은 몽골로이드에 속하는데, 몽골로이드의 형질적 특징이 형성된 곳은 시베리아의 바이칼호 부근이라고 한다. 몽골로이드의 형질적 특징으로는 광대뼈가 나오고, 눈꺼플이 겹쳐진 것(epicanthic fold)을 드는데, 이는 시베리아와 같은 추운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시베리아의 몽골로이드는 다시 형질적, 언어적으로 서로 다른 두 그룹으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옛시베리아족(Palaeo-Siberians) 또는 옛아시아족(Palaeo-Asiatics), 옛몽골족(Palaeo-Mongolians)이고, 다른 하나는 새시베리아족(Neo-Siberians) 또는 새몽골족(Neo-Mongolians)이다. 시베리아의 몽골족이 언제
이와 같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는지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
뒤로도 분화되어 오늘날과 같은 많은 수의 민족을 이루었다. 즉, 옛시베리아족에는 축치족(Chuk-chee), 코리악족(Koryak), 캄차달족(Kam-chadal), 길리악족(Gilyaks),
아이누(Ai-nu), 아메리카 인디언 등이 있다. 새시베리아족에는 사모예드족(Samoyeds), 위그르족(Uigrians), 핀족(Finns), 터키족, 몽골족, 퉁구스족 등이 있다.
그리고 새시베리아족은 다시 언어학적으로 우랄어족(Ural language family)과 알타이어족(Altai language family)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가운데 우리민족은 알타이어족에
속할 개연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우리 민족은 같은 알타이어족 속하면서도 몽골족이나 퉁구스족과는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 민족은 알타이어족의 한 갈래로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국 장성지대의 동북부와 요령지방 및 한반도에 정착하여 하나의 민족 단위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산재하는 난하( 河), 대릉하(大 河), 요하(遼河), 노합하(老合河) 등 여러 하천의
유역에 펼쳐진 충적평야에 정착하여 취락을 형성하고 농경문화를 시작했다. 아울러
농업생산력을 배경으로 한 청동기문화로 발전하면서 읍락국가(邑落國家)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읍락국가 가운에 가장 강성하였던 고조선(古朝鮮)이 여러 읍락국가의 맹주국(盟主國)이 되었던 것이다.
2) 우리 민족의 문화적 분류와 동이족(東夷族)
우리 민족의 신화와 습속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가 주로 시베리아지방에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가 주로 시베리아지방에 있는 여러 민족의 원시문화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기원과
계통이 그들과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걸어온 고고학적 특징 또한 중요하다. 우리 민족은 현재 한반도를 삶의
주된 터전으로 삼고 있지만, 원래는 여러 경로를 거쳐 이동해 와서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민족이 이동한 경로를 밝히면 우리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실마리가
자연적으로 풀리게 된다.
한반도에 구석기시대가 물론 존재했으나, 구석기 시대의 주민이 우리 민족의 직접적인 선조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들이 한반도에 살면서 문화를 남긴 것은 분명하지만,
세계 다른 지역에서처럼 이 구석기문화는 그 뒤에 오는 신석기문화와 연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민족의 형성 문제와는 시간적 공백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구석기문화는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에 끝난 홍적세(빙하기)와 함께 없어졌으며,
그 뒤로는 새로운 자연환경에 적응해서 나타나는 중석기문화가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중석기문화가 있었다는 뚜렷한 흔적이 아직 보고된 적이 없어 우리와
관련되는 직계조상은 서기전 4천 년경에 시작되는 신석기시대의 주민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문화로는 2가지의 큰 흐름이 주류를 이룬다. 그 하나는 만주를 거쳐
북중국에 연결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시베리아의 문화가 만주를 거쳐 남하한 흐름이다. 그 외 남방적 문화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도 있으나 그것은 극히 적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인데, 이것은 핀란드와 서북 소련의 오카-볼가 상류지방에서 동쪽은 바이칼지방에 이르는 시베리아 일대에 퍼진 소위 '피트 콤 웨어(pit-combwore)'의 전통에 연결된다. 빗살무늬토기는 형태가 반 달걀형이고, 표면에 찌른 자국과 빗 같은 것으로 누른 빗살무늬가 있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빗살무늬토기로서 대표되는 문화의 분포 지역은 시베리아에서 대체로 북위
55도 이북이다. 이 문화는 주로 수렵과 어로에 의존하는 빈약한 신석기문화였지만, 스키나 썰매를 이용하여 그 기동력은 의외로 컸다. 이 문화가 볼가강과 그 지류인 오카강 상, 중류 일대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우랄산맥을 넘고 중부 시베리아의 오브강 하류의 지류인 라핀강 유역으로 진출한 후 다시 동쪽으로 이동해서 예니세이강 중류를
거쳐 바이칼호에 도달하고, 거기서 남으로 꺾어 흑룡강을 타고 두만강 하류 지역에서
나타난 것이 우리나라의 빗살무늬토기문화라고 추정된다.
1952년이래 바이칼 남쪽 흑룡강 상류의 쉴카 유적지에서는 우리나라의 것과 똑같은
빗살무늬토기들이 나왔다. 물론 문화 내용에서 세부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 자료와의 비교에 의해 우리나라의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 빗살무늬토기의 동쪽 끝 형색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처럼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는 시베리아와 연결되고
그 시대의 상한은 서기전 4천 연대로 본다.
한편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동이족들은 회하 유역과 산동반도에 걸치는 중국 동해안
일대, 남만주. 발해만 일대, 한반도 북부에 걸쳐서 거주하면서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북아시아 문화의 주체를 이루는 동이문화는 동이족에 의해
창조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 자료와 역사 문헌에 기록된 내용 및 연구성과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동이족에 속했던 민족임이 분명하다. 중국인 학자인 여진우는 사전시기중국고대문화(史前時期中國古代文化)에서 동이족의
발상지를 지금의 바이칼호 일대로 보았다. 그 후 점차 남하하여 요녕성 서부에 와서
한 갈래는 동북으로, 다른 한 갈래는 발해를 따라 산둥반도로 진출하였다고 했다. 또
중국의 고고학 자료와 학계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요녕성 서부의 홍산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라고 본다. 결국 바이칼 호수에서 남하한 동이족이 요녕성 서부에 정착해 홍산문화를 이루어 냈다고 볼 수 있다.
시라무렌강과 노합하에서 기원전 4천년경부터 꽃핀 홍산문화는 기원전 2300년경에
쇠하면서 소하연문화라는 조그만 신석기 말기문화로 대체된다. 소하연문화는 이내 하가점하층문화라는 초기청동기시대문화로 다시 대체되는데 이때가 기원전 2천년경이다. 소하연문화는 과도기적단계로 지적되는 문화단계인데, 이때 만주 송화강유역에
등장하는 문화가 백금보문화를 비롯한 신석기말 청동기초의 문화로서 고조선 초기문화라고 여겨지고 있는 문화이다.
요녕지역의 문화전개양상을 고고학적으로 보면 기원전 2300년경을 전후하여 문화의
중심지가 요서지역에서 요동지역과 북만주지역으로 이동한다. 그러다가 기원전 2000년경을 전후하여 다시 요서지역이 융성해지는 이전상태로 돌아간다.
시라무렌강과 노합하유역의 홍산문화가 쇠하면서 송화강유역에서 일단의 문화가 전개되고 이후에 다시 노합하유역을 중심으로한 하가점하층문화가 발전하는데 이를 북만주지역의 고조선세력의 문화권역이 확산되어 하가점하층문화가 전개된다는 역사적
사실로 보려한다.
시라무렌강 상류 임서(林西)에서 기원전 2000년경의 다량의 구리 노천광산이 발견되었고 이곳에서 오랜 기간동안 초기청동기시대의 제련이 행해졌음이 밝혀졌다. 하가점하층문화는 이러한 청동기를 바탕으로 전개된 문화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B.C.13세기경에 어떠한 기후변동의 결과로 인간생활에 변화가 발생하였는데, 기온의 급강하(-3℃)로 이전의 농경기반이 목축기반으로 전환되면서 하가점하층문화도 문화의 성격이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전의 하가점하층문화가 비파형청동검을 표지유물로 하는 완전한
청동기문화인 하가점상층문화로 대체되는 것이다.
동이문화가 지닌 기본 특징으로 새를 토템으로 하는 난생설(卵生說)과 암각화 및 수렵과 관계되는 활 문화의 발전을 들 수 있다. 동이족의 원시문화에서 기원한 암각화도
중국의 동북, 내몽골, 신강, 광서지역, 러시아의 레나강 일대 및 한반도 등 동이족의
이동과 관계되는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동이족의 문화권에 거주하고 있던 종족 중에서도 후에 우리 민족을 형성하는
데 주류가 된 것은 맥족와 한족이었다.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라고 하나, 그 퉁구스족과 분화된 시기는 상당히 일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으로 퉁구스족(만주족 포함), 몽골족, 터키족을 알타이(Altai)족이라 하는데, 이
세 민족의 언어는 같은 알타이어족에 속하고, 오랜 어느 시기에 같은 종족에서 갈라진
것이라 한다. 알타이족은 원주지로부터 서쪽으로 중앙아시아를 지나 유럽의 동쪽에까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의 레나강 유역까지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일파가 만주를 거쳐 한반도와 일본의 서쪽에까지 이동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알타이족이 본주지로부터 동쪽으로 또는 북쪽으로 이동 확산하기 전에 북방 아시아에는 이전부터 살고 있던 종족들이 있었다. 이 선주 종족들은 알타이족의 이동에 밀려
동해안과 북극지방의 불모의 땅으로 옮아갔다. 이들을 통틀어 고아시아족 또는 고시베리아족이라고 부른다. 북극지방의 축치족이나 사할린 남부와 북해도의 아이누족,
멀리 동북쪽으로는 베링해협의 양안에 분포하고 있는 에스키모들이 그들이다. 이들
고아시아족은 알타이족에 밀리기 전에는 아시아의 내륙에 있었다. 따라서 만주와 중국 북부 역시 고아시아족의 일파가 점거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우리 민족와 만주족 등의 알타이족에 밀려 동쪽과 북쪽으로 이동하였을 때에, 그 일부는 한반도로 밀려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을 두고 일부 학자는 우리 민족을 고아시아족이라
한 일이 있으나, 다른 연구 경과에 의하면 우리 민족의 구성에 고아시아족의 요소가
있을 가능성은 있으나 고아시아족은 아닌 것이 여러 모로 분명하다.
한편 보편적으로 우리에게 통용되는 것이 퉁구스족 설이지만 이는 학문적 근거와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한 추론에 불과하다. 우리 민족이 몽골족와 퉁구스족의 잡종이라든가 또는 한족(漢族)와 몽골족의 후예라든가 하는 이설도 있으나, 이것 또한 '만선사관(滿鮮史觀)'을 내세운 일제시대 식민사학의 영향이며, 과학성이 결여된 학설인 것이다.
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여러 기록에 나타나듯이 예와 맥들이 우리 민족의 선조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중국 사서에 우리 민족을 예맥이라고 일컫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아무튼 예맥족은 넓은 의미에서 동이족에 포함된다.
예맥족은 발달된 농경문화의 경제력은 기반으로 하여 먼저 홍도 계통의 문화와 그 종족들을 흡수하여 보다 넓은 문화기반을 만들면서 우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제 예맥족(濊貊族)에 대해서 살펴보자.
3)예(濊)와 맥(貊)은 누구인가?
청동기시대 중국동북지역에 등장하는 종족명은 '숙신족', '예맥족', '동호족', '산융족',
'조선족', '발족' 등이다. 예맥족(濊貊族)에 관해서는 고조선을 이룬 중심세력이라는
것과 그 위치가 부여·고구려지역에서 원래부터 분포하고 있었던 종족이 예족(濊族)이고 서쪽에서 이동해 들어가 예족과 융합하여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이 맥족(貊族)이라는 견해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문헌상에서 보면 고대 중국동북지역에 관한 종족명칭으로 예(濊)와 맥(貊)이 많이 등장한다. 중국측의 문헌에서는 주로 춘추시대이후 형성된 것으로 보는 중화사상(華夷觀)에 의해 주말(周末)에서 진통일(秦統一)까지 동이(東夷)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고
진한(秦漢) 이후는 예맥(濊貊)이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진나라가 강족(羌族=西夷의 갈래)출신이었기에 중국지역에 분포하는 이(夷)에 대한 관념을 비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夷)나 예맥(濊貊)은 아마도 종족칭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최근의 북경에서 펴낸 『중국대백과전서(中國大百科全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夷)는 중국 동북지방 특히 발해연안에 거주하였고 그 분포가 강회지방(江淮地方:양자강유역)에 이른다. 이들은 하(夏), 상(商(殷)), 주(周) 삼대(三代)때는 이(夷) 혹은
구이(九夷)라 하고 서주초(西周初) 성왕(成王)때는 한동안 이(夷)가 서로 연합하였으며 그들 종족의 본원지는 동북지방에 있었다.’
'호(胡)는 북방(北方)거주족이며 맥(貊)은 동북(東北)거주족이다. 「注」맥은 즉 예이다.’
예와 맥은 고고학상으로 볼 때, 신석기시대인이 아니고 청동기시대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시 중국고대에는 예와 맥에 대해서 별로 구분없이 비하적 표현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고구려를 맥이라 하고 부여에 대해서는 예라 하는 관점을 일부학자들은 각기 다른 지역경제를 반영한 명칭이라고도 보기도 하는데, 한자(漢字)의 의미구성을 고려하여 맥을 산악지역의 거주족으로 보고 예를 하천지역의 거주족으로 보는 견해로 아직 명확한 근거는 없다. 한가지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夷), 예(濊), 여(黎), 여(麗), 여(餘) 등의 연관성과 맥(貊), 낙(駱), 백(白), 호(毫), 발(發), ㅂ·ㄺ의 연관성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가 맥족이란 사실이 고대사의 통설이다. 고조선지역에 예족이 있었는데 고구려의 맥족이 이동해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족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동이족중 토착민이고 맥족은 유목적 기질을 지닌 이주민들이라는 의미가 짙게
배여 있다. 후대의 '예맥조선'이라는 표현도 예족과 맥족의 조선이란 의미이지 그 자체가 국가명칭은 아닌 것이다.
종족별로 구별한다면 이미 중원지역에 중국계 종족이 형성되기 전에 중국동부연안의
평야지대에는 발해연안에서 진출한 '이족(夷族)'이 분포하고 있었고 이들 중 일부가
황하문명을 발전시킨 은(段)나라 문화를 창조하였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었는데 또 하나의 이족(夷族) 출신인 진시황의 통일이후 독자적 세력이 와해되고 중국내륙에서 다른 종족과 동화되어 버렸던 역사적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중국사서에는 '발조선(發朝鮮)'이란 명칭이 자주 등장한다. 일부학자들은 '발조선(發朝鮮)'을 '발(發)'과 '조선(朝鮮)'으로 분리시켜서 보려고 하는데, '발(發)'을 '맥(貊)'과
연관지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으나, '發'과 '貊'은 어원의 형성과정이 다르다. 후술하겠지만,'發'은 '밝'의 알타이어계 한자표기로써 '백(白, 百)'과 같고 후에 '번(番)'과 연결되는 음차(音借)일 뿐 '맥(貊)'과는 상관관계가 없다.
맥은 락(手+各)자로부터 비롯되는데 '各'은 갑골문에서 혈거(穴居:지하식 주거지)를
뜻하고, 부수 '豕'는 '돼지, 벌레'를 뜻하므로 맥은 혈거에서 돼지를 기르며 생활하는
모습을 표현한 상형문자의 합성이다. 락(手+各)은 호(胡)락(手+各)으로 연칭되다가
'胡貊'으로 바뀌는데 맥의 등장은 발(發), 백(白), 백(百)과 연계성이 확인된 이후의 호칭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기(史記)』에는 '예락(濊(豕+各))'의 기록이 보편적인데 진(秦)나라 이전의 선진시대부터 맥보다 낙이 먼저 등장한다. 『순자(荀子)』에는 "진북계에 호락이 있다”하였고, 『전국책(戰國策)』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한편, 춘추시대의 유가경전류에는
모두 맥으로만 표기되어있는데 이것은 후대의 유가사상가들이 편찬한 개작이기 때문이다.
『좌전(左傳)』의 소공구년조(召公九年條)에 있는 '숙신(肅愼), 연(燕), 호(毫)이 북토(北土)’라는 기사는 『좌전』이 춘추시대 당시 그대로의 기록을 담고 있다고 보면 이들 세 지역은 중원문화권을 벗어난 북방문화권적 성격을 암시하는 말로 풀이된다.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 북방민족이 장성 이남까지 내려와 점거하고 있었는데 소위 몽골남부지역의 수원(綏遠:Ordos)청동문화의 분포권이다.
따라서 맥의 전신인 락은 호(胡)와 이웃하고 있었고 호는 전형적인 중국북방의 유목민족을 일컫는 호칭이므로, 호락(胡(豕+各))이 연합하여 연(燕)과 제(齊)를 침범하였다가 제환공에게 패하여 퇴각하였다는 『관자(管子)』「소광편(小匡篇)」 기사는 낙(手+各)의 위치가 요서지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낙(豕+各)은 곧 맥(貊)으로 변하고 예(濊)와 함께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중국동북지역의 중원지방과 가까운 발해북안 요서지역에 일정한 시기동안 맥족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 맥이 중국북방의 호와 함께 서주말부터 춘추시대에 걸쳐 중원지방으로 빈번하게 침범을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중원식 청동기물을 반입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양상이 하가점상층문화에 반영되어 부분적으로 중원식 청동기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맥은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대수맥(大水貊)과 소수맥(小水貊)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 맥족이 부여와 고구려가 설립된 만주지역에 이동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흉노(匈奴)가 강성하였던 모돈시대(冒頓時代)일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의 강력한 대추장 모돈(冒頓)에 의해 동호(東胡)가 격파되고 그 여파로 맥(貊)도 동쪽으로 이동하여 예족(濊族) 지역에 들어가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 것이다.
『사기』에 “흉노(匈奴)가 동으로 예맥조선(濊貊朝鮮)과 접하게 되었다”는 기사에서 '濊貊'연칭은 이러한 시대적 정황을 반영한 표기이다. 따라서 예는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신석기시대부터 강이나 하천을 터전으로 농경생활을 영위해왔던 선주민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들 예족도 맥족과는 자연환경이 달라 경제생활 방식이 달랐지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지역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과 같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맥은 하가점상층문화에서 나타난 기마풍속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또한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를 구성한 중요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맥족은 비록 목축을 주로
하였지만 농경을 바탕으로 한 예족과 같은 동이족(東夷族)이었기 때문에 상호 융화에
큰 무리가 없었을 줄 안다. 이것은 요동지역과 길림장춘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의 주인공은 예족이고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는 맥족이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맥족이 동천하기 전의 하가점상층문화와 요동지역 청동문화가 지역에 따른
문화적 성격은 다를지라도 종족적으로는 같은 동이족으로서 상호연계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산동반도와 회하 유역에 있던 동이족들은 동이족과 관계가 깊던 은(殷)이 망하고
서쪽에서 진출하여온 주나라의 침입을 받아 싸우게 되었다. 그 결과 동이족의 일부는
중국 한족(漢族)에게 흡수되고, 그 일부는 남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산동반도 지역과 회화 유역에 계속 남아 있다가 한족에게 흡수된 동이족은 주나라 이후에도 상당기간 세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전국시대 말기까지 많은 부족국가를 건설하였다. 후한시대에 건설된 산동성 가상현 소재의 무씨사당 석실의 화상석에 삼국유사가
전하는 단군설화의 내용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사실을 말해준다. 또
이런 점을 볼 때 우리에게 단지 신화나 허구로 취급받는 단군설화가 우리 민족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4) 단군설화에 담긴 우리의 역사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오는 단군설화는 우리 민족의 기원을 전하는 중요한 문헌 자료이다. 이 기록은 분명히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경위를 거쳐 조선이라는 나라를 처음으로 창건하였다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귀중한 자료가 종래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이유 없이 무시되어 왔다. 고조선 연구에 있어서 이웃
나라의 고문헌들이 전하는 구구한 단편적 자료들이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우리나라 역사의 기원이나 전통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단군설화에는 비록 간단하지만 고조선의 종족 문제, 지역 문제, 사회제도 문제, 국가 기원을 비롯한 각종 연대 문제, 고대 문화와 관련된 자료적인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다. 단군 설화는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에 전한다. 단군설화가 실려있는 대표적인 문헌인 삼국유사를 보면,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나간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환국(桓國)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어 자주 나라를 가져 볼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지망하더니 그의 아버지가 그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三危太伯) 땅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에게 큰 이익을 줄 직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보내어 여기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여기를 신시(神市)라 이르고 그를 환웅천왕이라 했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들로써 농사, 생명, 질병, 형벌, 선악을 맡게 하고, 무릇 인간살이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살면서 정치와 교화를 베풀었다.'
'때마침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으로 화하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이 때에 환웅은 영험있는 쑥 한 자루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쉽사리 사람의 형체로 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스무 하루
동안 기를 하여 곰은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기를 못해서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곰처녀는 혼인할 자리가 없었으므로 매양 신단수 아래서 어린애를 배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화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궁왕검이라 하였다.'
'그는 당나라 요임금이 즉위한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 곳을 또 궁홀산(弓忽山) 이라고도 하고 또 금미달(今彌達) 이라고도 하니 천오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우선 환국의 서자 환웅이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환국(桓國)은 환인(桓因)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환국과 환인' 이 다른 기록에서 오는 단군설화의 해석 차이는 엄청나다. 우선 환국이라고 써있었을 경우 환웅은 하늘의 나라를 뜻하는 환국에서 이동해 온 지도자가 된다. 하지만 환인일 경우 그것은 하나의 신격 인물로 환웅 역시 하느님의 아들로 하늘에서 내려온 신격 존재가 된다. 그 두 가지의 차이는 뒤의 서자(庶子)의 해석에도 영향을 준다. 환국일 경우 서자는 나라의 관직명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환인일 경우 서자는 환인이란 인물의 아들중의 하나나 또는
첩에게서 나온 아들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런 상고시대에 적서를 구분하는 것도 이상하고, 아들중의 하나라면 굳이 서자(庶子)보다는 그냥 자(子)로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서자는 나라의 관직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고 본다. 환국이 적당하다는 또 다른 근거는 기록 중의 부지자의(父知子意)에 있다. 만약 환인이
맞다면 하느님을 뜻하는 환인을 불경스러운 다른 표현인 부(父)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환인지자의(桓因知子意)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국일 경우에는 그 부(父)는 환인이 아닌 서자환웅(庶子桓雄)의 친아버지를 지칭한 말로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 된다. 환국이라고 적혀있는 기록이 맞는 것이라면, 환국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어느 한 부족국가였을 것이다. 환국이란 국명은 고기(古記)를 쓴 후손들이 모국(母國)을 위대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이 환웅은 환국에서 이주해온 세력이며 이 환국은 몽골로이드의 고향 바이칼 부근의 부족국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뮤 대륙에 대해 연구를 한 학자 제임스 처치워드는 초고대의
중앙아시아에 위구르 대제국이 있었다고 했다. 이 발표는 환국이 실존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라는 명칭이 적혀있다. 이 기록은
보통 바람과, 비, 구름이 농사에 필요한 것이라고 하여, 환웅이 발달된 농사기술을 가지고 이동해 왔다고 보고 있다. 물론 이 견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세 가지가 꼭
농경민족에만 필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사냥을 하는 수렵족, 배를 타는 해양족에도
그것들은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풍백, 우사, 운사는 꼭 농사나, 사회 구조에 관련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그냥 관직명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곰과 호랑이의 기록은 환웅부족이 이동해 왔을 때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두
부족을 두 가지 동물로 상징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환웅족이 만주와 한반도에 왔을 때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이 있었는데, 곰 부족은
그들에게 호의를 보여 쉽게 융화되었는데, 호랑이 부족은 적의를 보여 저항하다가 다른 지역으로 쫓겨갔다고 해석된다. 또 곰이 여자가 된 웅녀는 환웅과 혼인한 여자로
기술되었는데, 이는 곰 부족과 친밀해지기 위한 환웅족의 혼인정책으로 보인다. 이 곰과 호랑이 부족은 어떤 종족이었을 것이란 확실한 학설은 없지만 환웅족이 바이칼 부근에서 난하, 요하 부근의 요서지역으로 이동해 오기 전에 살던 고아시아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학설의 근거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고아시아족의 요소를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유어 중에 개마고원, 고마, 영감, 대감, 이사금, 임금 등은 모두
어원이 ㄱ, ㅁ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아시아족으로 현재 일본에 소수가 살고 있는 아이누족의 '가미'라는 단어가 신을 뜻한다는 것이다. 결국 웅녀 즉 곰처녀는 이런
고아시아민족계일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우리민족의 고아시아적 요소를 하나 더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설화이다. 흑룡강성에 살고 있는 고아시아족들의 신화에는 이런 것이 있다. '옛날에 오누이가 살았다. 오빠는 호랑이와, 누이는 곰과 각각 결혼했다. 호랑이는 자식을 못 낳았지만, 날 뛰는 곰
누이는 곰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얻었다. 그 아이가 우리의 조상이 되었다.' 이 설화는
우리의 단군설화와 같은 기원을 갖고 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고아시아족이 우리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은 될 수 없어도 우리에게 그들의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5) 결론
우리민족이 걸어온 길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우리민족은 몽골로이드에 속하고 언어학적으로는 알타이어에 속하며, 바이칼 근방에서 기원전 4천년경에 요서와 요동, 만주에 자리잡은 동이족의 한 지류인 예맥족이다. 예맥이 이동해 오기 전 요서, 요동, 만주 등지에는 고아시아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예맥은 순응적인 곰부족(고아시아계)은
받아들였고, 공격적인 호랑이부족(고아시아계)은 배척하여 물리쳤다. 이들이 고조선을 건국했고, 현대 우리민족은 그들의 후손이다.
우리 민족의 원류를 찾기 위하여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확실한
학설은 없으며 식민사관 등의 틀에 사로잡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사학자, 인류학자들에게 무(無)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스승이나 출세 등의 틀에 묶여서 더 멀리 보지 못하는 학자들이 틀을 벗어났을때
한민족의 뿌리를 찾는 연구는 빛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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