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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발굴상황
- 한반도 만주는 4400~4500년전
- 황하문명은 4200년전
한반도 만주의 배달문명이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으로 드러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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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의 고고학 발굴과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단군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개시는 다른 지역보다 늦지 않았으며,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로 보아 황하(黃河)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 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지난날에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문화의 발전이 늦을 것으로 믿어왔다.
지금까지 확인된「청동기문화」연대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주거지 유적)과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청동기시대 유적(고인돌 무덤)에서
서기전 2500년경으로,
만주(요녕성)에서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에서
서기전 241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중국 "황하문명" 에서는 서기전 2200년경으로,
시베리아에서 가장 앞선 청동기문화인 미누신스크문화는 서기전 17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문화 개시연대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앞선다는 것이다.
임효재(任孝宰; 1941∼)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전 한국고고학회 회장)가 발굴한 8천년(서기전 6천년경)된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유적(주거지 유적) 등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고유문화를 형성한 후,
(한웅님의) 전파문화를 흡수했음이 분명하다.
(삼국유사에는 한웅님과 웅녀 할머니의 만남으로 표현된다.)
(흑요석제 석기(당시 가장 발달된 돌칼 , 돌도끼등)는 백두산이 원산지임).
오산리유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시베리아 신석기 유적보다 2천년이상이나 앞서는데...
고대 최고의 희귀 장신구인 "유리"가 단군조선시대인 서기전 5세기 무렵에 우리나라에서 제작ㆍ사용됐음이 밝혀져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고조선 유리- 평양시 정백동 출토]
동아일보 1997년 4월 12일자 29면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최 주(崔 炷: 65ㆍ책임연구원) 박사팀은 1995년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리구슬에 대해 성분분석을 한 결과,
이 구슬이 서기전 5세기쯤 한반도에서 나는 납을 혼합해 제작 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간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유리문화가 초기 철기문화와 함께 서기전 2세기 무렵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밝혔었다.
이 유리구슬은 바륨(Ba)이 섞여 있는 중국계통의 유리와는 달리 바륨이 들어있지 않는 등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작 된 것이어서 이 땅에 일찍이 유리문화가 뿌리 내렸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성분분석 결과 유리구슬에 산화납(pbo)이 1.7% 함유되어 있음이 증명됐는데
산화납은 낮은 온도에서 유리를 만들 수 있게 하면서
유리의 내구성(오래동안 깨지지 않는 성질)을 높여주는 첨가물질 로,
따라서 산화납의 존재는 유리제조 기술이 매우 앞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기전 5세기경의 유리구슬에서도 산화납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 주 박사가 "금강유역에 발달한 청동기문화는 중국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실험결과로 유리 제조기술 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개발 되었다는「새로운 역사」를 밝혀낸 것이다.
최 주 박사는 특히 비파형동검(고조선 특유의 청동검)이 남한의 원료를 써서 만들어진 것임을 입증 했다.
고조선의 검들 사진.
3, 4, 5, 6, 7 번 검이 [비파형(비파 모양) 동검]
그의 지적으로 우리 교과서의 단군조선 유물인 청동기 등 고대금속유물의 기원과 성분 특성 등에 대한 수정이 이뤄지고 있다.
중앙일보 1998년 4월 1일자 1면과 3면에 보면, 국내에 한점도 없던 단군조선의 토기(흙 도자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런식이라면 단군조선에 대한 아직도 많은 유물과 사료들이 국내ㆍ외에 산재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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