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성경해석

산상수훈(8복)강해: 마 5:3-10)

白鏡 2007. 7. 3. 03:37
 

산상수훈(8복) 강해 (마 5:3-10)

※ 개요

  일반적으로 팔복으로 알려져 있는 3절에서 10절 말씀은 예수를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누리는 복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 말씀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복(blessed)이란 한시적인 세상의 복(hapiness which is dependant

  on outward circumstances)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통한 근원적인 행복과 영적인

  환희(ultimate well-being and distinctive spiritual joy)를 말하는 것으로서 천국을 보고,

  누리고, 나라로 이어 받을 자의 조건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 개요

심령이 가난한 자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로서 자신의 영적인 타락을 솔직히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해 애통해 하며 사람들이 자랑하는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해 애통해 하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고 발버둥 치며 애통해 하는 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를 믿고난 후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줄 알며, 또한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를 가진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영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갈망하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자, 남의 죄를 용서해 주는 자,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나 궁핍한 사람을 동정하는 자 등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자(약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와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

화평케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같이 희생의 댓가를 치르더라도 화평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서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등을 의미한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in contrast to the spiritually proud and self-sufficient)

 

심령이 가난한 자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로서 자신의 영적인 타락을 솔직히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자라는 의미


* 가난한 자의 의미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 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적절치 않은 것 같다.

  (1)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 (suppression)

 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시 37:14; 40:17; 69:29; 잠 16:19).  

 

시 37:14-15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시 40: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2)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3) 메시아가 구원할 사람들의 심령적 특성(사 57:15; 66:2)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 들에 대해 기술하고있다. 

사 57:15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로서 자신의 영적인 타락을 솔직히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자라는 뜻

 

복이 있나니(*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아쉬레'(*)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 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 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 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5: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 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 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여기서 '위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이다.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시37: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인용


온유한 자(*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란  타고난 성품이 유순한 사람 즉 겉으로 보기에 비폭력적이고 잔인하지않은 사람이 아니라 과거의 성품이 어떻하였던 간에 예수를 믿고 난 후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칼빈의 말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줄 알며, 또한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11:29; 약 3:13).


예수님의 경우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와 같이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신약에서 쓰인 땅'(*게)이라는 단어의 의미 (마태복음에  45 회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9:6), 지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롬 8:16-17)을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에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다.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

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

(시 42:1;63:1;107:9; 암 8:11-14).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암 8:11)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의'(稱義) 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Hill, Greek Words pp.127ff; 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190 ff). 


(벧후 3:12-13)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6: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이다(요 4:14; 6:51).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긍휼히 여기는 자 -

1) 용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에서 파생    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와 '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 )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 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2) 사용처: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3)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4) 긍휼의 구체적 내용: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남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 나아가서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5) 긍휼히 여길 대상 :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위의 사항을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1서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실로 긍휼은  이 세상의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마음이 청결한 자 -

A)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 )나 '레바브'(*)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으로  '가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          (삼상 12:12) 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B)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

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와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19:21;33:20;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5:9 화평케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화평케 하는자 -


A)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 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B)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이다. 

  

C)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 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

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

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 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

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

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

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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